?제73화. 9장. 진실 (2)
의식을 되찾은 뒤에도 몸을 회복하는 데 한 달 정도 걸렸다. 그러고 나서야 나는 차분하게 그날의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다. 내가 잘못 보지 않은 이상, 내 납치에 황제가 개입된 것이 분명했다.
생각해 보면 아무리 혼자 몰래 움직였다고 해도 황궁에서 납치를 당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심지어 대낮에.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 그리고 보름이 지나도록 아무도 나를 찾을 수 없었던 이유. 그것은 내가 납치를 당한 시작점인 황궁 안의 흔적을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지웠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가능한 사람 역시…….
황녀 납치 사건. 그 사건의 주범은 헤레이스의 아버지이자 선대 공작이었다. 그리고 황궁에서 내가 납치당할 수 있도록 공조한 사람. 즉, 공범은 나와 루이스의 아버지인 선황제였다.
‘이 사실을 오라버니가 알게 되기라도 하면…. 안 돼. 나는 아무것도 몰라야 돼.’
나는 나를 도와준 헤레이스를 지키고, 납치 사건의 숨겨진 진실을 감추기 위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척했다. 만약 루이스가 알게 되면 황궁에 피바람이 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황제에게 이런 일은 처음이 아니었으니까.
선황제의 황권은 약했다. 그는 언제나 귀족들에게 위협을 받았고, 오로지 황제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무엇이든 했다. 루이스는 그런 황제를 볼 때마다 비굴하게 자리를 지키는 것이 황제냐며 비아냥거렸지만, 선황제에게는 황제라는 자리가 자신의 전부니까. 그러니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나는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도구에 불과했다. 언제나 나의 아버지인 선황제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나를 주저없이 버렸다.
황궁에서 나를 지켜 준 것은 오로지 루이스뿐이었다. 내가 팔려가듯 결혼을 할 뻔했을 때도 루이스가 불같이 화를 내며 막아 냈다.
나는 황녀였지만, 고위 귀족의 영애들의 눈치를 봐야만 했다. 그녀들의 심기가 뒤틀려 자신의 가문에 달려가 조르르 일러바치면, 언제나 황제인 아버지가 내게 와서 화를 내며 그들에게 가서 잘못을 빌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언제나 복수를 해 주는 것은 루이스뿐이었다.
나는 일부러 제국의 사정에 대해 알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자연스럽게 귀에 흘러들어오는 것들이 있었다.
선황제는 귀족들에게 협박에 가까운 요구를 받고 있었다. 선황제가 반역이라는 빌미로 귀족들을 정리할 계획이었던 것이 발각된 것이었다. 그들은 그것이 오해라는 증거를 보여 달라고 했다.
그 ‘증거’가 설마 나였던 건가. 내 목숨을 저들에게 던져서 증명하려고? 황제라는 건 제 자식을 제물로 바쳐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였던가.
“내가 돌아와서 낙담하셨겠군.”
아버지이자 선황제를 향해 품고 있던 일말의 동정심마저도 사라졌다. 나는 그 후로, 형식적인 자리를 제외하고는 선황제와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잠을 자고 있는데 바깥이 소란스럽더니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그 사이로 들어오는 사람은 루이스였다.
“오라버니…? 이 시간에 어쩐 일로….”
그런데 루이스는 어째서인지 험악한 얼굴을 하고 내게 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내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너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루이스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대체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나는 얼떨떨해서 루이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너 설마…….”
“오라버니…왜 그러세요?”
“아니다. 내가 알아서 해결하마.”
루이스는 뭔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그리고 얼굴을 잔뜩 구긴 채 돌아섰다.
한밤중에 찾아와서 잔뜩 험악한 분위기를 풍기더니. 뭐지?
처음에는 무슨 일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날 밤 루이스가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폐하를 감금시켰습니다!”
황궁 안에서 일어난 반역에 가까운 사건. 반역이라고 하지 않는 것은 황제가 황태자인 루이스에게 자신의 자리를 선위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위나 그 후의 일련의 과정들이 평화로웠던 것 역시 아니었다.
황위를 이어받은 루이스는 곧바로 황권을 강화하기 위한 작업에 몰두했다. 그는 오로지 황권을 강화하고 귀족들의 세력을 누르는 데만 관심이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을 집중했다. 루이스는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숙청을 거듭했다. 죄가 있는지 없는지를 떠나서 수많은 이의 피를 본 루이스는 어느새 역사상 가작 악명 높은 폭군이 되어 있었다.
그때 사고로 위장된 채 죽음을 맞이한 것이 선대 공작, 이사벨의 남편이자 헤레이스의 아버지였다.
루이스가 황제를 감금시키고 수많은 귀족을 처단하는 극단적인 행동을 한 표면적인 이유는 지독하게 약한 황권을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그 당시에 정상적인 방법으로 루이스가 황제가 되었다면 달라지는 것은 없었을 테니까. 루이스 역시 선황제처럼 미약한 황권으로 귀족들과 싸워야 했을 것이다. 루이스에겐 그것을 뒤집을 계기가 필요했다. 절대적인 힘을 얻기 위한 방법.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었다. 아마 내가 납치를 당하는 일이 없었다면, 루이스도 그렇게까지 갑자기 극단적으로 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게 두고두고 마음이 쓰였다.
* * *
이미 루이스가 떠난 지 좀 지났지만, 분위기는 여전히 싸늘했다. 그의 존재감이 아직까지도 느껴지는 듯했다.
헤레이스는 그의 어머니를 일으키지도, 그녀의 몸을 묶고 있는 밧줄을 풀어주지도 않았다. 내가 무슨 말이든 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인 것 같았다.
나는 이사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이런 무모한 짓을 하세요?”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어째서 그녀는 이렇게 무모한 짓을 할 정도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그녀는 방금 전까지 루이스가 뿜어내던 살기에 넋을 놓고 있었다. 공포에 잡아먹힌 것이다. 그래서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독기가 사그라들고 이성이 조금씩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녀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이사벨, 그러게 왜 자꾸 선을 넘어요?”
내 마지막 호의였다. 지금까지 이사벨 당신의 행동들을 참아 주었던 것은. 그날의 마지막 기억 때문이었다.
“이사벨, 그대의 말에 내가 충격이라도 받기를 원했다면 틀렸어요.”
“에, 에…에일린…….”
내가 흔들리기는커녕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하자, 이사벨의 눈동자가 방향을 잃고 흔들렸다.
“내가 지금까지 참아 주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어야죠. 그러니 더는 빠져나갈 생각하지 마세요.”
이사벨의 몸이 위태로울 정도로 떨리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바닥에 엎드렸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빌기 시작했다.
“화, 황녀 전하. 제가 죄송합니다. 제발 한 번만…….”
지금까지 유지해오던 콧대 높은 모습이 어디로 도망갔는지,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처절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대로 돌아서 자리를 떠났다.
“이미 너무 늦었어요.”
이제 더 이상 보고도 못 본 척 이사벨의 만행을 눈감아 줄 수 없었다. 그녀가 과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서 피해 의식에 휩싸인 것도, 여전히 자신의 사치와 과시욕을 위해 이런 짓까지 저지르는 것도. 모두 이사벨이 책임져야 할 몫이다.
* * *
회귀하기 전, 헤레이스의 반역이 성공해 루이스가 죽고 내가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때, 이사벨이 나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 공작가의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다.
“에일린.”
처음 누군가가 나를 부를 때, 그 사람이 이사벨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나온 사람은 이사벨이었다.
내가 갇힌 감옥에는 음식을 가져다주는 시녀 외에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런 와중에 무슨 이유에서 나를 찾아온 것일까.
“…왜 오셨습니까.”
메마른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이사벨이 나를 찾아올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이런 꼴이 된 나를 비웃고 더욱 비참하게 만들기 위해서겠지. 아니나 다를까, 이사벨은 나를 거만하게 내려다봤다.
그녀가 이제 하려고 하는 말이 무엇인지 예상은 갔지만, 나에게는 더 이상 상대해 줄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이사벨을 외면한 채 허공에 시선을 두었다.
그때, 바로 내 앞에 묵직한 주머니가 떨어졌다. 이사벨이 던진 것이었다.
“도망가세요.”
“…?”
“제국을 떠나도록 해요. 배편은 내가 준비했으니까 떠나기만 하면 돼요.”
이사벨이 던진 주머니 안에는 금화가 들어 있었다. 이사벨의 것으로 보이는 주얼리도 있었다. 이것을 여비 삼으라는 것 같았다.
“저를 도망치게 해서 더욱 비참하게 만들고 싶은 건가요?”
이사벨의 알 수 없는 이런 행동들이 선의로 보이지 않았다. 내게 도망칠 수 있다는 유혹을 한 후, 도망치는 나를 붙잡고 더욱 비참하게 죽게 하려는 것인가?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나를 비웃으려는 거다.
“생각은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해요. 다만……. 그대가 내 아들에게 죽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을 뿐이니까.”
이사벨은 자신의 할 말을 다했다는 듯이 그대로 돌아갔다.
처음에는 이사벨이 나를 약 올리며 더욱 비참하게 만들기 위해 찾아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사벨이 한 말은 정말 함정이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쩐지 이사벨이 준비한 것들이 나를 구렁텅이로 빠뜨리기 위한 함정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제안대로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이사벨의 말대로 도망치지도, 헤레이스가 나를 죽일 때까지 기다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나는 내 손으로 독을 마심으로써 헤레이스 앞에서 죽었다.
* * *
현장을 벗어난 후, 나는 그대로 공작가가 아닌 황궁으로 향했다.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일들이 많았지만, 그보다 루이스와 단둘이 얘기하는 것이 먼저였다.
루이스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