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화. 9장. 진실 (3)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한 것에 대해 묻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모른 척 숨기고 있었던 사실에 대해 이제는 루이스에게 고백해야 했다.
“그날 일을 다 기억하고 있다니.”
루이스의 얼굴이 복잡해 보였다. 화가 난 것 같기도, 걱정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고통스러운 듯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있자니, 과거의 일에 벗어나지 못한 것은 내가 아니라 어쩌면 루이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루이스를 불렀다.
“오라버니.”
루이스는 제국의 황제이지만 나의 오라버니였다. 어쩐지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게 오랜만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루이스는 아무 대답 없이 나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침묵이었다.
‘제가 기억하는 것은 그뿐이 아니에요. 사실 저는…한 번 죽은 적이 있어요. 지금으로부터 오 년 정도의 시간을 이미 한 번 겪어 봤고, 그 끝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알아요. 헤레이스는 반역을 일으켜요. 오라버니는 그에게 죽고, 저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어요. 그런데 하필이면 결혼한 첫날로 회귀했어요.’
이렇게 내가 겪은 모든 것을 말하고 싶었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천천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루이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목소리 역시 날카로웠다. 화가 난 것도, 배신감을 느낀 것도 같았다.
“그래서 모두 기억하고 있으면서 기억나지 않는 척한 것이냐.”
“…죄송해요.”
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그 끝에 있는 비참한 죽음을 내 입으로 말할 수 없었다. 아직 헤레이스와 귀족 연합의 반역 증거를 완벽하게 알아내지 못했다. 조금만 더, 모든 것이 확실해지고 나면 말하자.
회귀 전, 나를 괴롭히는 존재는 많았다. 좋은 시어머니인 척하던 이사벨, 헤레이스의 내연녀를 자청하던 그레이스와 카일라…….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나를 힘들게 한 건, 역시 헤레이스였다.
과거에는 헤레이스가 나에게 마음을 열어 주지 않는 건 황가와 공작가의 질긴 악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버틸 수 있었다. 나를 2번이나 구해 준 사람이니까. 기다리다 보면 분명 긴 기다림을 보상받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회귀 전 내가 죽던 생의 마지막 순간에 무슨 생각을 했었더라?
내게 만약 한 번 기회가 생긴다면, 쓸모없는 사랑놀음 같은 건 하지 않겠다고. 오로지 나의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고 그들과 함께할 수 있음에 감사히 여기겠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헤레이스의 반역을 막아야 했다.
……여기까지는 그동안 지긋지긋할 정도로 수없이 생각했다.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헤레이스의 반역을 막아 내고야 말 것이다. 그리고 루이스를 지킬 것이다.
하지만 그 마음에 섣부른 행동을 했다가 역효과가 날 수도 있었다. 괜히 귀족 연합에게 반역을 저지를 만한 명분을 주어서는 안 된다. 내 손에 확실한 증거가 들어올 때까지는.
루이스가 나를 다시 불렀다.
“에일린.”
그는 역사상 손에 꼽힐 정도로 강한 황권을 지닌 황제였다. 폭군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어도, 그의 황권은 현재 굳건했다. 하지만 아무리 황권이 강하다고 해도 안정적이지 못했다. 그 결과, 회귀 전 귀족들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도 너무나 순식간에 황권이 무너졌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루이스가 적어도 백성들에게 민심을 얻는 것이. 그리고 귀족 중 그의 편을 유지 시키는 것이. 그러니 반역이 일어나기 전까지 루이스는 성군이 되어야 했다.
앞으로 벌어질 반역도, 내가 회귀했다는 것도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이것만큼은 제대로 말하자.
나는 결연하게 루이스에게 말했다.
“폐하, 약속해 주세요.”
“약속…?”
갑자기 무슨 약속이냐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흔들리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제가 지금부터 하는 말을 무시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시겠다고요.”
“뭔데. 일단 말해 봐.”
“안 돼요. 약속해 주지 않으면, 저도 더는 얘기하지 않을 겁니다.”
루이스가 얼굴을 구겼다. 고민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나는 루이스의 표정 변화를 유심히 관찰했다.
미간이 구겨졌다가 눈썹이 올라갔다. 입술이 벌어지는 모양이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낼 것 같았다. 하지만 잠시 행동이 멈추더,니 얼굴 근육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풀기 시작했다. 어느새 루이스는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제 말해 봐.”
사실 반역을 도모하는 주축이 누구인지는 이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과거에나 지금이나, 황권에 대립하며 귀족들을 위해 움직이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귀족들 사이에서도 입지를 굳건하게 다지고 있었고, 제국에 미치는 영향력 또한 상당했다. 그래서 그들은 웬만한 잘못이 발각되어도 크게 처벌받지 않았다.
그러나 반역은 다른 문제다. 반역을 하다 발각되는 즉시 사형에 처하는 것은 그들에게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반역을 도모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폐하는 성군이 되어 주세요.”
루이스가 황당한 얘기를 들은 것처럼 내게 되물었다.
“…뭐?”
“반역의 움직임이 드러나기 전까지 성군이 되세요.”라고 내가 다시 한번 강조하며 말하자, 루이스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왜?”
“제국의 황제 폐하시잖아요.”
“황제라고 전부 성군이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걸 지금 말이라고! 루이스는 가끔씩 말도 안 되는 타이밍에 어처구니없는 말을 한다. 그리곤 이렇게 내 속을 터뜨린다.
“모든 황제가 성군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내가 루이스 때문에 미쳐!
* * *
루이스는 특별히 이사벨의 처분은 에일린에게 맡기겠다고 했다. 사실상 이번 일은 공식적으로 일을 키우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사벨과 그레이스의 일이 알려진다면 결국, 걱정한 대로 진흙탕 싸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아직 다른 곳에 알려지지 않도록 단속했지만, 이 일을 공작가에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이사벨이 그날, 혼이 나간 듯한 몰골로 끌려 왔기 때문이었다.
공작가의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가장 먼저 동요하는 것은 하녀들이었다. 그녀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남들 눈에 띄지 않은 곳에서 수군거렸다.
“그럼 이사벨 마님께서는 죽, 죽는 건가요?”
“무슨. 여기가 황궁이니.”
“그럼 어떻게 되는 건데요?”
“다시는 황도에는 오지 못하게 되겠지. 최악에는 제국 밖으로 쫓겨나거나 아니면 영지에 유폐되실 거야.”
이사벨의 최후에 대해 예상하며 숙덕거리는 모습이 에일린은 어쩐지 낯익었다. 회귀하기 전, 그녀가 헤레이스의 손에 죽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하녀들은 이렇게 모여서 자기들끼리 얘기를 나눴었다.
하녀들이 한창 얘기하고 있는 이사벨은 방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하녀들이 보기에 유폐된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나오지 않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스캔들 논란은 일단락되었다. 결국, 이번 일을 덮기 위해 희생된 것은 소문에 대해 얘기하다가 루이스에게 발각되어 지하 감옥에 있던 시녀들이었다. 그녀들이 황궁에서 소문을 퍼트린 것으로 공식적인 발표가 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말을 모두가 믿는 것은 아니었다. 귀족들 사이에서는 이미 알음알음 이번 사건의 진짜 배후가 누구인지 조용히 퍼지고 있었다.
결국, 소문의 진상은 일단락됐지만, 밖으로 알려지지 않은 스캔들의 전말에 대해서는 여전히 소문이 돌고 있었다. 거기에 그레이스와 이사벨의 문제까지 더해져, 소문은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어디부터가 거짓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양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그중, 공작 부인의 노여움을 산 이사벨이 쫓겨난다는 소문이 사교계 전체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많은 사람의 예상대로 이사벨은 영지로 쫓겨났다. 죄인의 신세로 쫓겨나는 것이기에 그 누구도 그녀를 마중 나오지 않았다.
내가 이런 꼴이 되다니. 이사벨은 자신의 신세가 너무 처참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먼 길을 떠나려 몸을 돌리는데,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목소리만 듣고도 주인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푹 숙인 채 흐느꼈다.
“어머니.”
“흐윽…흐…….”
“조심히 가세요.”
“…헤레이스.”
헤레이스는 이사벨이 떠나는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았다.
이사벨이 어떤 사람이건 간에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였다. 선대 공작이 살아 있고 공작가가 휘청거리기 전까지, 그녀는 모두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공작가의 주인이었다.
평생 부족한 것 없이 모두의 앞에서 당당하게 살아가던 그녀에게 갑자기 변한 상황 앞에서 의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좀 더 버텨 주었다면. 공작가의 치부를 인정하고 에일린을 품을 수 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결과는 나오지 않았을 텐데.
결국, 그녀를 영지로 보내서 유폐와 마찬가지인 생활을 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는 헤레이스의 마음 또한 편하지 않았다.
그래도 더 이상 그녀를 두고 볼 수 없으니까. 이제 이 질긴 악연과 엇갈림을 헤레이스는 끝내고 싶었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조금씩 천천히 풀다 보면 서로에게 쌓였던 앙금이 풀리고 정리될 수 있지 않을까. 그때 이사벨을 한 번 찾아가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그때쯤이면 이사벨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헤레이스는 희망했다.
* * *
루이스에게 말한 순간 에밀도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과거에 내가 납치당했던 전말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그와 동시에 나는 에밀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어떻게 저한테 말 한마디 안 해 주실 수가 있어요? 유모는 정말 섭섭합니다.”
섭섭하다는 에밀의 말이 신호탄이었다. 에밀은 쉴 새 없이 섭섭한 감정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모두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하시려니 얼마나 힘드셨을지…….”
“설마 그래서 여전히 잠을 잘 못 주무시는…우리 아기씨 불쌍해서 어째…….”
“아기씨.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옆에 꼭 붙어 있겠습니다!”
지치지도 않나 싶지만, 에밀의 눈물은 원망과 섭섭함에서 안타까움으로 변하더니, 마지막에는 책임감에 불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