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화. 9장. 진실 (4)
“에밀.”
에밀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네!”
나는 그런 에밀을 향해 웃었다. 에밀이 반나절을 이렇게 떠들어 대도 나는 질리지 않았다. 에밀이 하는 모든 말을 귀담아듣고 싶었다. 하지만 이러다가는 반나절이 아니라 삼일 밤낮으로 말할 것 같으니까.
“고마워.”
에밀이 순간 굳었다. 어깨를 잘게 떨더니 갑자기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흐윽…!!”
설마……. 처음 단계로 다시 넘어간 거야?!
에밀이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다. 아아, 오늘은 피곤한 하루가 되겠네.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린다.
“아기씨이…….”
흐느끼느라 에밀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다 보니 괜히 가슴 한쪽이 따뜻해지는 것 같다.
에밀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늘 밤만큼은 푹 주무세요.”
잠들기 전 내 머리를 쓰다듬는 것은 오래된 그녀의 버릇이다.
에밀의 손길에 오늘은 그녀의 말대로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눈꺼풀이 조금씩 무겁게 가라앉았다.
* * *
헤레이스는 이사벨을 마중하고 돌아서는 순간, 하늘에 낀 안개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는 달이 신경 쓰였다. 달도 별도 보이지 않는 오늘 밤은 유난히 깜깜했다.
헤레이스가 에밀을 은밀하게 찾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에밀의 얼굴에는 탐탁지 않아 하는 것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걸 뻔히 보면서도 헤레이스는 모른 척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네.”
“부인은 밤에 잠을 잘 주무시는 건가.”
헤레이스는 에일린이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부터 그 부분이 계속 신경 쓰였다. 에밀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편안히 주무십니다.”
에밀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단, 완벽한 사실 또한 아니었다. 에일린은 최근 여러 사건으로 인해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두통도 심해지고 잠을 자다가 도중에 깨어나는 일이 잦았다.
에일린의 컨디션이 좋을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처럼 몸이 안 좋을 때, 도중에 잠에서 깨어날 때가 문제였다.
몽롱한 정신에서 눈앞에 보이는 어둠은 그녀에게 공포로 덮쳐 왔다. 한번 그 감각을 깨닫게 되면, 에일리는 아침이 될 때까지 이불 안에서 몸을 웅크린 채 벌벌 떨면서 다시는 잠들지 못했다. 과거의 기억이 아직도 그녀에게 본능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에밀은 그런 것까지 헤레이스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에밀의 입장에서 볼 때, 에일린의 이런 상태에 그가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네.”
“공작님, 정말 걱정되시는 거면 직접 여쭤 보세요.”
에밀을 통해 물어보는 건 비겁한 행동이다. 헤레이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에일린이 과거의 일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그녀의 폐소 공포증과 한동안 시달렸다던 불면증이 걱정되었다.
그녀가 모든 기억을 잃었다고 했을 때, 헤레이스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는 편이 그날의 일들을 극복하는데 좀 더 수월할 테니까. 그런데 이제까지 모두 잊은 척 기억하고 있었다니. 그 모든 걸 기억하고 있으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을 에일린을 생각하니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걱정되었다.
* * *
그날 밤, 나는 잠들어 있지 않았다. 아무리 해도 잠이 오지 않아 잠이 잘 오는 차라도 마실까 해서 일어났는데 에밀이 없었다.
밤에는 다른 시녀들이 내 방을 지키는 게 불편했다. 그래서 웬만하면 에밀만 곁에 두는데,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직접 차를 가지러 나왔는데, 복도 끝에서 에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와 대화하는 거지?’
나도 모르게 발소리를 죽였다. 소리가 들리는 쪽에 다가갔을 때, 에밀의 말 상대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헤레이스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기 시작했다.
“혹시 부인이 잠을 못 자거나 하면 나한테 얘기해 줄 수 있을까.”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었다. 헤레이스는 나의 유모인 에밀이게 왠지 쩔쩔매고 있었다. 공작과 가문의 시녀가 나누는 대화라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아기씨는 언제나 잘 주무시기 때문에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오히려 에밀이 누가 봐도 뚱한 목소리였다. 내가 절대 누구에게도 내 상태를 얘기하지 말라고 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냥 에밀이 헤레이스를 싫어하기 때문일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다 보니 웃음이 살짝 튀어나올 뻔했다.
“…지금 무슨 소리 나지 않았나요?”
귀신같은 에밀이 한층 더 낮은 목소리로 주위를 경계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들키기 전에 서둘러 방으로 돌아갔다.
* * *
스캔들에 관한 전말이 알려졌을 때는 소문이 생각보다 크게 확산되어 당황하기도 했었지만, 사람들은 이미 끝난 것에는 자연스레 관심을 두지 않았다. 우리는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소문들을 몇 개 흘렸고, 관심은 저절로 이동했다. 스캔들 사건은 생각보다 쉽게 정리됐다. 스캔들도 어느새 조금씩 잊혀 가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 룩센 황태자가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다. 룩센은 스캔들이 얼마 전까지 극성이었으니, 혹시를 대비해서 조용히 돌아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황궁에서 그를 만나 인사를 나눴다.
그는 어린 시절 나에게 좋은 친구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시절이었지만, 루이스와 결혼할 수 없으면 룩센과 결혼하겠다고 고집을 부린 적도 있었는데. 오랜만에 만났는데 환대는커녕 스캔들 때문에 곤혹만 치르게 했다.
“그동안 죄송했어요. 조심히 돌아가세요.”
“아뇨, 저는 즐거웠습니다.”
룩센 황태자는 진심인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이대로 보내는 게 너무 미안했다. 나는 잠시 망설이며 입을 뗐다.
“반가웠어요. 룩센 오라버니.”
어린 시절에는 늘 부르던 호칭인데, 이제 하려니 어색했다. 내가 어색해서 머쓱해하니까 룩센 황태자가 웃었다.
루이스가 다가와 룩센 황태자에게 눈짓을 했다.
“룩센 황태자.”
곧바로 룩센 황태자가 내게 인사를 하고 루이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중요한 얘기를 나누는 것 같아서 방해하지 않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다렸다.
* * *
모든 것이 마무리되었을 때였다. 루이스가 룩센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룩센 황태자.”
“네, 폐하.”
“그대는 미리 알고 있었지?”
뜬금없는 루이스의 말을 룩센 황태자는 바로 알아들었다. 그 모습을 본 루이스가 확신했다. 루이스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사벨과 그레이스가 수작을 부리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왜 가만있었나.”
“그래서 폐하도 얻은 게 있지 않습니까.”
룩센의 말대로 루이스는 백작가로부터 많은 것을 뺏을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약점까지도 쥐게 되었으니, 루이스에게 나쁜 일은 아니었다.
룩센 황태자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제가 청혼서를 보냈을 때, 바로 찢어 버리신 것에 대한 작은 앙갚음입니다.”
에일린의 상대를 고를 때 룩센 황태자는 가장 먼저 청혼서를 보냈다. 그때 루이스가 멀다는 이유만으로 청혼서를 찢어 버린 일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 그걸…….”
룩센 황태자가 씨익, 웃었다.
“뭐, 에일린과 마지막 추억 하나쯤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고요.”
그런 황당한 이유로 말도 안 되는 고초를 자처해서 겪었다니. 루이스는 룩센 황태자를 황당하게 바라보다 포기했다. 이해하려고 들면 자신만 피곤하다는 것을 알아서다.
그렇게 룩센 황태자는 떠났다. 일련의 스캔들이 모두 끝난 것이다.
* * *
모든 것이 마무리된 것 같지만,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있었다.
상황을 마무리하고 수습을 하는 과정은 급박하게 이루어졌다. 최대한 빨리 끝내야만 여러 가지 말들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그날 이후, 나와 헤레이스는 단둘이 있을 시간도 사적인 대화를 나눌만한 시간도 없었다.
그렇기에 내가 과거의 그 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헤레이스와 아직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사실 나는 피할 수 있으면 끝까지 피하고 싶지만.
헤레이스가 나를 불렀다.
“부인.”
헤레이스의 눈빛을 보니, 그는 절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엔 한 번은 부딪혀야 하는 문제다. 하지만 나도 헤레이스도 쉽게 굳게 닫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대뜸 헤레이스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헤레이스가 고맙다고 하는 것은 분명 내가 기억을 잃은 척 공작가에 대한 것을 말하지 않았던 것을 가리키는 것일 터였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공작님 때문에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나도 헤레이스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 일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은 의미 없었다. 하지만 헤레이스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면서 다시 한번 말했다.
“그래도 고맙습니다.”
헤레이스는 아무것도 묻지 않을 생각인 것 같았다.
결국, 내가 다시 그를 불렀다.
“그런데 공작님.”
예전부터 꼭 한번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네, 부인.”
“그때 어째서 절 도와주셨습니까? 제가 모든 걸 말해 버리면 공작가는 무사하지 못했을 텐데요.”
헤레이스는 잠시 생각하는 듯 말이 없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
“부인이 모든 것을 얘기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책임을 져야 하겠지요. 죽음이든 멸문이든.”
그저 모른 척했다면, 아무런 위험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나를 구해 주었다. 그 당시에 그는 그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었는데도.
내가 납치되었던 사건은 결코 작은 사건이 아니었고, 제국민이라면 모두가 알 정도로 심각했으며 루이스가 눈에 불을 켜고 찾았었다.
그런데도 헤레이스는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것이 진심이라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