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화. 10장.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난다 (4)
반역 같은 거 꿈도 꾸지 마세요. 당신이 어떤 방법을 써도 내가 막아 내고야 말 테니까. 그래서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는 것은 나와 루이스가 아닌 헤레이스, 당신이 될 테니까.
나는 속으로 헤레이스에게 몇 번이고 말했다. 전해졌을지는 알 수 없지만.
헤레이스는 여전히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부인이 하지 말라는 것은 안 할 겁니다. 부인이 하라는 것만 할 거고요.”
헤레이스는 나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구름 한 점 없는 것처럼 맑고 깨끗한 눈은 흔들릴 줄 몰랐다.
“믿지 못하겠다면 한번 시험해 보세요. 무엇이든 부인의 말에 따르겠습니다.”
헤레이스는 당장 내 발에 키스하라고 해도 할 것 같았다. 그런 것 따위 받고 싶지도 않지만.
그는 나를 믿게 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래서 이런 위장한 얼굴과 목소리로 나를 속이려고 하는 것일까. 그가 적극적으로 나올수록 내 의심이 사그라들기는커녕 점점 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럼 무슨 일이 있어도 폐하를 지켜 주세요.”
역시나 헤레이스는 대답이 없었다.
그가 반역의 주체인데, 루이스를 지켜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일단 나를 속여 넘기기 위해서라도 그러겠다고 대답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헤레이스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서는.
이윽고 헤레이스가 천천히 입을 열어 대답했다. 여전히 눈은 나에게 맞춘 채로.
“알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폐하를 지키겠습니다. 제 목숨보다도 폐하를 먼저 할 것입니다. 절대로 부인께서 슬퍼할 일은 없을 겁니다.”
강직한 대답이었다. 그는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대답하는 것일까. 어차피 빈말이겠지.
헤레이스는 갑자기 내 양 팔을 붙든 채 나에게도 약속을 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니, 부인도 한 가지만 약속해 주세요.”
분명 이건 헤레이스가 먼저 자신을 시험해 보라며 꺼낸 말이었는데, 어째서 나까지도 약속을 해야 하지?
“저를 버리지 말아 주세요.”
어쩐지 그렇게 말하는 헤레이스의 눈빛이 너무 간절했다. 그가 잡고 있는 내 양팔에 어느새 힘이 들어갔다. 꽉 쥐고 있는 아귀힘이 분명 답답한 데도 아프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대답했다.
“알겠어요.”
“저는 앞으로도 부인을 계속 보고 싶습니다.”
헤레이스는 다짐받듯이 내게 다시 한번 확인했다. 내가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헤레이스는 그제야 안심한 듯 물러났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웃는 얼굴로 칼끝을 숨기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내 얼굴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황궁은 이미 철저하게 방어를 하고 있었다. 여기서 헤레이스의 움직임을 살피다가 이상한 행동이 보이면 바로 알릴 것이다. 두 번 다시 그들에게 당하지 않을 것이다.
* * *
나와 헤레이스의 사이에는 철저하게 위장된 평화가 유지되었다. 나는 그를 감시하면서 그와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사르르 미소를 지었다.
“외출하시나요.”
“네. 잠시 확인할 게 있어서요.”
헤레이스가 확인해야 한다는 것은 아마도 반역에 관한 것일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렇게 헤레이스를 마중하고 돌아서면서 에밀에게 눈짓했다. 헤레이스가 어디로 가는지 확인하도록.
나는 헤레이스가 없을 때 증거를 찾는 일에 몰두했다. 그와 동시에 귀족 연합의 움직임을 감시하며 그들이 최근 거래한 무기들을 보관하는 곳을 알아보았다. 무기가 수도 바깥에 있다면 아직 시간이 조금 남은 것이고, 수도 안에 있다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고 무기를 얼마나 확보했는지. 그것들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지도 확인해야겠지.’
하지만 그중에서 내가 가장 알고 싶은 것은 반역의 정확한 시일이었다. 날짜가 정해진다면, 분명 헤레이스에게 어떤 방법으로든 전달이 될 것이다. 그걸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아내야 했다.
그들이 언제 반역을 일으키려고 하는지 알아내는 것은 중요했다. 회귀 전에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것이 일어나고 난 후에 움직인다면, 너무 늦어 버리니까.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황궁으로 가서 피를 흘리고 있는 루이스를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그런 일을 다시 반복할 수는 없어.’
눈앞에서 소중한 것을 잃는 일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나는 헤레이스가 밖에서 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에밀에게 맡겼다. 그녀만큼 은밀하게 뒤를 쫓아 정보를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리고 그가 없는 동안 나는 공작가 안에서 혹시라도 헤레이스가 숨겨놓은 뭔가가 있는지 찾았다. 물론 그의 보좌관과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서 해야 하기 때문에 의욕만큼 제대로 할 수는 없었지만.
오늘도 나는 헤레이스의 집무실에 들어왔다. 때마침 보좌관들이 모두 사업의 진행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외출한 상황이었다. 덕분에 집무실에는 오로지 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는 집무실에 헤레이스나 보좌관이 있어서 눈으로 보이는 것 귀로 들리는 것 외에는 별다른 행동을 하기 어려웠다. 아마 지금 이 순간이 내가 집무실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 것이다. 나는 사람의 손이 탄 것을 최대한 숨기기 위해 조심히 안을 살폈다. 특히 헤레이스의 책상과 그의 손이 많이 닿는 곳 위주로.
그렇게 집무실 안을 살핀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헤레이스의 책상 서랍 두 번째 칸에서 불에 그슬린 흔적이 있는 종이가 나왔다. 태워서 없애려다가 중간에 무슨 일이 있어서 다 태우지 못하고 급하게 넣어놓은 것처럼.
‘이게 뭐지?’
하지만 문제는 이미 상당 부분 타 버려 내용은커녕,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글자도 거의 없었다. 무슨 내용이 적혀 있었던 건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종이. 불에 그슬리지 않은 나머지 종이에 적힌 것을 보고 유추할 수밖에 없었다.
‘숫자가 있는 것 같은데…….’
종이를 이리저리 돌려보기도 하고 햇빛에 비춰 보기도 했지만, 애초에 불탄 종이에 적힌 내용을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만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것은 불에 그슬려 반은 잘리고 반은 보이는 애매한 위치에 있는 숫자. 그 숫자가 뜻하는 의미였다. 날짜. 시간. 암호. 만약 이 중에 날짜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하지만 결국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는 없었다. 곧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고, 나는 집무실에서 공작가의 업무를 처리하는 척해야 했으니까.
머릿속에서는 집무실 서랍에서 봤던 종이가 계속 맴돌았다. 그 숫자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을 하나둘씩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헤레이스를 뒤쫓아 갔던 에밀이 먼저 돌아왔다.
나는 에밀과 방으로 돌아와 시녀들을 모두 물렸다.
“별장에 다녀왔습니다.”
“거기 상황은 어때?”
별장의 존재를 알고 난 후부터 나는 그곳의 상황을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에밀은 헤레이스를 은밀하게 쫓아 별장에 다녀온 것이다.
“당장이라도 움직일 수 있도록 완벽하게 무장한 상태로 있었습니다.”
“뭐…?!”
그 말은 반역이 일어나는 날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오늘내일하는 것이었다.
‘언제 이렇게까지 준비했지?’
헤레이스가 공작가에 있는 동안은 계속 그와 함께 있었다. 그가 집무실에서 일을 할 때도 나는 그의 도움을 받는다는 핑계로 그의 집무실에서 함께 일 처리를 했다.
하지만 헤레이스의 행동에서는 반역이 이렇게까지 다가온 것을 눈치챌 수 없었다. 그는 내가 있는 자리에서 보고를 받는 것을 불편해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나에게 뭔가를 숨길 생각이 없다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지금 당장 은밀하게 전달해야 하는 일이나 급박한 상황은 아직 벌어지지 않고 있다고 여겼다.
‘언제나 나를 깜짝 놀라게 하네.’
회귀 전에도 내가 그의 반역에 대해 알아차리지 못한 것처럼, 이번에도 자칫 잘못했으면 못 알아차릴 뻔했다.
* * *
내가 헤레이스와 5년이나 흐르는 동안, 단 한 번도 그를 의심한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아무리 공작 부인으로서 충실하였다고 해도 그에 관한 소문은 몇 번이나 들려왔다.
그중에서는 헤레이스가 수상하다는 것 역시 있었다. 아무리 내가 그를 좋아한다고 해도 분명 미심쩍은 부분이 몇 번이고 눈에 띄었었다.
하지만 나는 내게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함부로 그런 말 하지 마.’라며 오히려 헤레이스를 옹호했다. 그저 믿고 싶었다. 그가 내게 애정이 없다고 해도, 나와 나의 오라버니인 루이스에게 해가 될 일을 할 리는 없을 거라고.
그날은 웬일로 헤레이스가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며 찾아왔었다. 나는 설레는 마음을 애써 누르며 식사를 했다. 식사를 하던 도중, 헤레이스가 무심하게 물었다.
“내일 뭐 하십니까.”
하지만 나는 그가 가져주는 관심에 마음이 들떴다.
“내일은 잠시 외출을 할까 합니다.”
“…제가 내일은 일이 있어서 늦게 돌아올 것 같긴 한데…내일도 오늘처럼 저녁을 함께하고 싶은데 어떠십니까.”
“네…?”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말에 나도 모르게 멍해졌었다.
“아, 혹시…….”
나는 혹시라도 헤레이스가 괜찮다고 말을 돌릴까 봐 냉큼 대답했다. 설레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활짝 웃으면서.
“기다릴게요!”
그리고 그 다음 날. 그날은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누가 실수를 해도 기분이 좋았고, 유리잔이 깨져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 상태가 마지막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저녁이 지나도록 헤레이스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주위가 왠지 어수선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알 순 없지만, 나는 순간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공작가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계단을 계속 올랐다. 공작가에서 유일하게 거리를 볼 수 있는 곳으로.
그곳에서 내려다본 거리는 한밤중인데도 마치 대낮처럼 밝았다. 아니, 붉게 빛났다. 수많은 횃불에 마치 낮이라고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게 무슨 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