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10장.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난다 (6)
나는 헤레이스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저녁 식사를 하며 최대한 이상한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주의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말했다.
“내일 황궁에 가려고 합니다.”
평소에도 황궁에 자주 갔기 때문에 별다른 핑계가 필요 없었다. 그저 미리 황궁에 간다고 말하는 것이 전부였다. 헤레이스가 웃으며 말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조금은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일찍 잠들겠다고 한 뒤, 나는 방에서 조용히 증거들을 하나씩 확인했다. 혹시나 놓친 것이 없나 찬찬히 훑으면서.
…눈꺼풀이 무거웠다.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지금이 몇 시지. 아침인가 밤인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몸을 벌떡 일으켰다. 지금 설마 잠들었던 건가?! 나 스스로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 보니 나도 모르게 깜박 잠들었었다. 그리고 지금은 한밤중이었다.
“언제 잠든 거지?”
그 전에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거지? 지금같이 중요한 시기에 잠들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이제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지금 마음 편하게 잠들어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잠을 깨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마치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여전히 비몽사몽 했다. 평소에 잠이 많은 편이 아닌데도 자꾸만 졸렸다. 지금도 눈꺼풀이 무거워 자꾸만 아래로 내려오려고 했다.
산책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방에서 나오자, 에밀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왜 나오셨어요?”
“그냥. 졸려서…산책이나 좀 할까 싶어서.”
여전히 반쯤은 잠들어 있는 것처럼 정신이 몽롱했다. 그래서인지 발음도 잘 나오지 않고 어눌했다.
그나저나 에밀은 왜 이렇게 당황하는 거지? 이상하네. 그런 생각을 하며 연못이 있는 후원으로 향했다. 그래도 밤공기를 맞으니 정신이 조금씩 맑아지는 것 같았다.
“어…근데 에밀, 왜 여기 있어…?”
‘나 에밀에게 뭔가 부탁하지 않았나. 아니, 그러기 전에 잠든 건가.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부탁을 해야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순간 주위의 공기가 이상했다.
나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분명 평소와는 다른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공작가가 조용하네.”
에밀이 대답했다.
“밤이니까요.”
그런데 순간 소름이 끼쳤다.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니었다. 공작가는 사람이 모두 빠져나간 것처럼 사람이 없었다. 공작가를 호위하는 사람들 역시 손에 꼽을 정도로밖에 없었다.
“공작님은 어디 계시지?”
“글쎄요. 침실에…….”
나는 그대로 달려가 헤레이스의 침실로 향했다. 그리고 역시나 그곳에는 헤레이스가 없었다.
반역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어야 했다. 그렇기에 불안한 마음을 한켠에 두고 평소와 다르지 않은 일상을 보내는 척했다.
그런데 아주 잠깐의 방심으로 결정적인 순간을 놓쳐 버렸다. 결국, 반역이 일어났다. 그것도 한밤중에 갑자기!
회귀 전에도 이랬다. 한밤중이었지만 그들은 수많은 횃불을 들고 황궁으로 들이닥쳤다. 그 횃불이 얼마나 환한지 마치 거리가 대낮처럼 밝다고 느껴질 만큼. 그들은 그렇게 제국을 어지럽히는 폭군으로부터 제국을 구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당당하게 반역을 일으켰다.
하지만 폭군을 물리친다는 명분은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루이스는 성군이라 하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더 이상 폭군이라고 하기에도 힘들었다. 조금씩 루이스의 편을 드는 백성들이 늘어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이런 식으로 갑자기 하는 것인가.
그래도 너무 급작스러웠다. 헤레이스의 동태를 살피다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바로 알리려고 했는데. 오히려 내가 잠에 든 사이에 모든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다급하게 돌아선 채 대문을 향해 달렸다. 한시가 바빴다. 조금이라도 지체하다가는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에밀, 당장 황궁으로 가자.”
“위험합니다!”
에밀이 나를 말렸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도움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가야 해. 가서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돼.”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최소한의 몫일 것이다.
* * *
한편, 귀족 연합 역시 움직이고 있었다.
백작 가문에서 크레톤 제국과 거래해 들여온 무기들을 보관하고 있던 창고에 도착했을 때였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백작은 당황했다. 그 뒤에 따라온 그레이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분명 어제 확인할 때까지는 괜찮았는데, 총과 폭탄이 모두 물에 젖어 있었다. 도저히 쓸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었다.
“대체 똑바로 관리하지 못하고 뭐한 것이냐!”
백작이 분노하며 창고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을 검으로 베어 버렸다. 피가 튀어서 바닥을 물들였다. 그 모습을 뉴튼 백작가의 소속 기사가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새벽녘에 그레이스 쪽 사람들이 꾸벅꾸벅 졸고 있을 때였다. 그는 그들의 뒤쪽으로 잠입해 물을 꾸준히 넣었다. 처음에는 눈치채지 못하게. 그러다 눈치를 챘을 때는 이미 늦도록.
“이제 어떡합니까.”
“뭘 어째. 되는 것만 가져가야지.”
그들은 보관 창고 안에서 그나마 상태가 멀쩡해 보이는 것을 챙겼다. 하지만 그것 역시도 결정적인 순간에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이미 전부 고장나 있기 때문이다.
* * *
황궁으로 향하는 길, 나는 악몽을 꾸는 것만 같았다. 회귀 전, 반역이 일어났을 때 내가 봤던 그 광경과 너무 흡사했다. 마치 그날이 그대로 눈앞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처럼.
‘이럴 순 없어…….’
내가 아무리 고군분투해도 한 발씩 늦었다.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말았다. 입술을 깨물었다. 바보같이, 방심하다가 타이밍을 놓쳤다.
다급하게 황궁으로 달려갔을 때였다. 이미 수많은 병사가 뒤죽박죽 얽혀 있었다.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인지 알 수 없는 혼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내가 잠시 멈추고 주위를 살필 때였다. 에밀이 내게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에밀을 봤을 때였다.
“위험합니다!”
에밀이 나를 끌어안고는 옆으로 넘어졌다. 방금 전까지 내가 있던 자리에 병사 한 명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피범벅. 역겨울 정도로 비린 냄새가 또다시 진동했다. 내 손에도 어느새 피가 묻어 있었다. 마지막 숨이 끊기기 전의 루이스를 붙잡으면서 묻었던 핏자국.
‘이게 왜 있지?’
설마, 이번에도 루이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루이스가 죽었던 장소로 가야 한다. 부디 거기에 없기를 바라면서도 불안한 마음에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일어나는 순간 휘청거리며 넘어지긴 했지만, 그런 것쯤이야 다시 일어나면 되는 일이었다.
이미 모든 것이 진행되고 있었다. 순간 머리가 어질거렸다. 과거에 내가 봤던 핏빛 세상, 그게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폐하는!!”
주위를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루이스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집무실도, 그의 침전에도 루이스는 없었다.
“오라버니는!!”
“진정하세요…!”
그럴수록 불안해진 내가 패닉에 빠지자 에밀이 나를 말렸지만, 나는 진정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침착할 수 있어! 이번에도 루이스가 잘못된다면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이번에도 나는 아무것도 못 한 건가.’
절망스러웠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무력한 나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에일린.”
“부인.”
나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았다.
“어…?”
순간 귀가 멍멍해지고 정신은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눈앞이 흐릿해져서 내가 제대로 보고 있는 것인지 헷갈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분명 둘 중 한 사람은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죽지 않았다면 인질로 잡혔을 것이라고.
그런데 아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루이스와 헤레이스는 나란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것도 상처 하나 없는 얼굴을 하고서. 루이스가 시원한 포물선을 그리며 미소를 지었다.
“이제 다 끝났군.”
여기서 혼란스러운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눈만 동그랗게 뜬 채 누구를 봐야 할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때였다. 반대편에서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그것도 굉장히 낯익은 모습.
“…황태자 전하?”
심지어 룩센 황태자까지 나타났다.
룩센 황태자는 스캔들 사건이 마무리된 직후에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었다. 그런데 어떻게 다시 여기에 있는 것이지.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나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해시켜 줄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여기에…?”
룩센 황태자가 가슴을 내밀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지원군을 데리고 왔습니다.”
“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더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반역이 곧 터질 것이라는 것은 미리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확한 날짜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순간도 마음을 풀지 못하고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룩센 황태자는 정확한 순간에 여기에 있는 것이지? 심지어 나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늦었는데.
게다가 다른 나라에 반역에 대한 정보를 알리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그들이 그것을 빌미로 삼아 다른 공격을 해 올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루이스도 그것을 모를 리 없는데, 아무리 우호적인 관계라고 해도 룩센 황태자에게 지원을 요청한다는 것은 쉽게 와 닿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내 눈앞에는 루이스, 헤레이스, 거기에 룩센 황태자까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것도 적이 아닌 아군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