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화. 11장. 반역의 전말 (5)
멀리서 보이는 에일린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루이스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 헤레이스 역시 더 이상 다가가지 못했다. 두 사람 모두 지금 에일린이 무엇을 떠올리는지 알고 있었다.
‘이럴까 봐 모르게 하려던 건데.’
그래서 일부러 에밀에게 에일린이 식후에 마시는 차에 수면 효과가 있는 약을 넣도록 지시했었다. 그리고 일찍 잠들었다는 보고까지 들어서 안심하고 있었다. 이렇게 중간에 깨어나서 더욱 혼란스러워하게 될 줄은 몰랐다.
루이스와 헤레이스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에일린에게 다가갔다.
“에일린.”
“부인.”
두 사람이 같이 나타나자 에일린은 놀란 모습이 역력했다.
회귀 전에도 반역이 일어났을 때, 세 사람이 한 공간에 있었다. 그때도 에일린은 저렇게 바닥에 주저앉아 괴로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결말이었다. 루이스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지 않았다. 그는 상처 하나 없이 서 있었다. 헤레이스 역시 루이스에게 더 이상 검을 겨누지 않았다. 그의 아군으로 황궁에 있었다.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난다.
회귀 전에 루이스와 헤레이스는 반역을 막아 보려고 했지만, 아무리 수없이 고민하고 미래를 바꾸려고 해도 무리였다. 결국, 루이스는 반역에 당하는 대신 에일린을 구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한계였고, 헤레이스는 그런 에일린을 눈앞에서 잃어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일어날 일이라고 해도 그 과정과 결과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회귀 후에 다른 선택을 했다. 반역을 막지 않고 오히려 일어나도록 기다리는 것. 그래서 루이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폭군인 행세를 했고, 헤레이스는 반역의 중심에 들어갔다. 반역이 일어나는 순간 모든 것을 바꾸기 위해.
루이스와 헤레이스는 과거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회귀한 것은 에일린 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을 루이스와 헤레이스는 도중에 눈치챘다. 그리고 루이스와 헤레이스는 에일린이 모르는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서로 손을 잡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여전히 못마땅하지만. 미래를 바꾸고 에일린을 지킬 수 있다면, 못할 것은 없었다. 그것이 루이스와 헤레이스가 손을 잡게 된 계기였다.
결과적으로, 반역은 일어났다.
하지만 반역이 일어나기 무섭게 진압되었다. 그것도 철저하게. 다시는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제국 초유의 반역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반역을 주도한 세력들은 그날 밤에 모두 죽었다. 단 한 명도 남김없이.
지하 감옥에 잡혀 있는 자들은 반역을 주도한 것이 아닌 자들이었다. 그만큼 권력에서 떨어져 있고 계급 역시 낮은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차례로 사형부터 유배까지 다양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한밤이 지나 새벽을 거쳐 아침이 됐다. 순식간에 끝난 사건은 제국 전체에 엄청난 속도로 알려졌다. 그리고 귀족 연합군에도 흔들리지 않은 루이스의 존재감이 더더욱 커졌다.
회귀 전에는 루이스의 죽음에 사람들은 죽어도 싸다는 반응과 함께 기뻐했다. 새로운 황제인 에드문드가 어떤 사람이든 루이스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반역 사건에 루이스가 건재하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반역을 일으킨 귀족 연합군에 대한 반발심이 더욱 컸다. 루이스를 옹호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었다. 회귀 전에는 상상조차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앞으로 한동안은 귀족들은 치열한 줄타기를 하고 있을 것이다. 반역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귀족파에 줄을 잡고 있던 자들은 어떻게든 황족파에 줄을 대기 위해 애쓸 것이다. 과거에 열심히 자랑하고 다녔던 귀족파와의 친분 역시 열심히 지울 것이다.
이제 다시는 루이스에게 맞설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 * *
잠시 공작가에 들르기가 무섭게 다시 돌아온 황궁. 루이스가, 그리고 헤레이스가 설명해 주었지만, 나는 여전히 머릿속이 복잡했다.
“폐하와 공작님…모두…회귀를 했다는 건가요…….”
헤레이스는 침묵으로 대신 긍정했다. 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두 사람 모두 회귀했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렇군요.’ 하고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저에게 숨긴 것입니까.”
두 사람 모두 회귀했으면서 나에게는 계속 숨겼다. 반역이 일어나기 직전까지도.
“아직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함부로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하…….”
헤레이스의 변명에 순간 울컥했다. 그래서 철저하게 나에게 숨기고 모든 상황이 끝나서야 얘기하는 건가 싶어서.
“…….”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내가 무조건 루이스와 헤레이스에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나도 아무 말 하지 않았으니까.’
정확히는 나 역시도 말할 수 없었다. 과거는 참혹했고, 그런 일을 얘기하며 바꿔야 한다고 선뜻 말할 수 없었다. 만약 그러다가 오히려 더 잘못될까 봐 두려웠다. 루이스와 헤레이스도 비슷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헤레이스의 행동은 언제나 이상했다. 그때 헤레이스가 회귀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그가 과거를 후회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의심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루이스가 과거를 모두 기억한 채로 회귀했다는 사실이 가장 믿기지 않았다. 내가 회귀를 한 후에도 루이스는 회귀 전과 그대로였으니까. 내가 반역을 막기 위해 그를 바꾸려고 애를 쓸 때도 그는 전혀 달라질 생각이 없어 보였었다.
아무래도 루이스와 좀 더 얘기를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잠시 폐하와 단둘이 얘기하고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저는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헤레이스가 자리를 비켜 주고, 집무실 안에는 나와 루이스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오라버니.”
내 부름에 루이스가 살짝 긴장하는 것이 보였다. 지금까지 태평한 모습을 가장하고 있었던 바로 그 얼굴이.
“모든 걸 기억하시면서…….”
루이스가 회귀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은 내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루이스는 과거와 지금의 모습이 다르지 않았으니까.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면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째서 아무것도 바꾸지 않은 것입니까.”
루이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반역을 막았잖아. 가장 중요한 하나만 바꾼 거다.”
그것 외에는 전혀 바꿀 생각이 없다는 듯이.
“더 많은 것을 바꿀 수 있었잖아요.”
그렇게 하면 루이스를 둘러싼 많은 것들이 달라졌을 것이다. 황제로서 그의 지위와 명성도, 루이스라는 개인으로서의 인생도.
루이스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듯 단호하게 답했다.
“내게 성군이 되라 말하는 것이라면, 내 대답은 언제나 그럴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방금 전까지와는 다를 정도로 냉정한 눈빛이었다. 루이스는 전혀 달라질 생각 따위 없어 보였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겁니까.”
황태자 시절 그는 분명 독선적인 면이 있었지만, 황제가 되면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제국을 번영에 이르게 할 것이라고 일컬어질 정도였다. 그런데 한순간에 달라졌다.
내가 루이스를 설득하려고 하자, 그가 나를 돌아봤다. 매서운 눈빛이었지만, 나는 지지 않고 마주 보았다. 결국, 루이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성군이란 것은 결국 아무것도 못 하는 한심한 놈인 것이다.”
“네?”
“귀족들의 눈치를 보고 세상 평판을 신경 쓰느라, 정작 중요할 때는 아무것도 못 하지.”
루이스가 갑자기 이런 얘기를 꺼내는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그 뒤에 이어질 말도 결코 좋은 말은 아닐 것 같아서 불안했다.
그때였다. 루이스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특유의 싸늘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원하는 것을 지키지도 못하는 것이 성군이라면.”
루이스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루이스의 목소리는 한층 더 낮게 깔렸다.
“나는 폭군으로 남을 것이다.”
루이스의 말은 단호했다. 하지만 그의 말이 나에게만큼은 따뜻하게 들렸다.
황태자 시절 루이스는 자유로운 성격에 독선적이고 감정적이긴 했지만, 사소한 단점을 뛰어넘을 만큼 훌륭한 성군의 재목이라 일컬어졌었다. 툭하면 화를 내기는 했지만, 황태자로서 해야 하는 일이면 억지로라도 참고 버텼다. 자신의 위치에 대한 자각과 책임감이 있었다.
그런 루이스가 달라진 것은 내가 납치를 당하고 돌아온 이후부터였다. 그렇기에 나는 더더욱 루이스가 성군이 되기를 바랐다. 나 때문에 그의 미래를 망친 것 같다는 죄책감이 알게 모르게 따라다녔다.
그런데 지금 루이스의 말은 그런 나의 죄책감마저도 덮어 주는 것이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성군이 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말하며. 내가 거기에서 더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내가 납치당했을 때 루이스는 황태자라는 신분 때문에 많은 것을 제약당했다고 한다. 황태자가 흥분해서 행동하다가 더 큰 문제가 벌어질 수도 있다. 사람을 풀어서 찾고 있으니 황태자는 자리를 지켜야 한다. 그렇게. 하지만 나는 끝까지 찾을 수 없었고, 모두가 이미 포기하고 있을 때 내가 황궁 앞까지 찾아가서 쓰러진 것이었다.
그것은 나에게뿐만 아니라 루이스에게도 트라우마가 되었다.
“…됐어요.”
“뭐…?”
“무사하시니 됐습니다.”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어도, 일단 루이스가 멀쩡했다. 그 안도감이 뒤늦게 온몸으로 퍼졌다. 아직도 생생한 그 끔찍한 모든 일은 더 이상 벌어지지 않는다. 아직도 내 손에 보이는 루이스의 붉은 피는 착각에 불과하다.
‘그래. 그거면 됐어.’
그거면 모두 괜찮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씨익, 미소를 지었다. 마음에 걸리는 것들은 나중에 생각하자. 일단은 루이스가 살아서 다행이라는 것에 안도하자.
“감사해요. 살아 줘서….”
내가 바란 것은 오로지 하나뿐이었으니까. 반역을 막고 싶었던 것 역시도 오로지 루이스가 죽지 않고 살기를 바란 것이니까.
그 외에 루이스가 달라지고 싶지 않다면,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루이스가 읊조렸다.
“…당연하지.”
그의 말에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