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도 바쁜 황녀님-89화 (89/124)

?제89화. 11장. 반역의 전말 (6)

루이스와 대화를 끝내고 나왔을 때였다. 헤레이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돌아가죠.”

헤레이스가 말한 돌아갈 곳은 공작가였다. 반역이 끝나고 내가 공작가로 돌아가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반역이 끝나는 순간, 나와 헤레이스의 관계는 당연히 끝날 것이라고 그렇게만 생각해 왔으니까.

헤레이스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안 가고 뭐 하십니까.”

그는 언제나와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결국, 이번 반역의 피해를 최소화하며 끝낼 수 있었던 데에는 헤레이스의 역할이 가장 컸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해도, 회귀 전에 루이스를 죽인 사람은 헤레이스였다. 그런 그에게 고맙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럼 대체 뭐라고 해야 하지.’

나는 헤레이스에게 할 말을 정하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헤레이스에게 말했다.

“어째서…반역을 막은 겁니까.”

결국, 내가 헤레이스에게 한 말은 고맙다는 말도 원망의 말도 아니었다. 그가 모두를 속여 가며 반역을 막으려고 한 이유.

내 물음에 헤레이스는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폐하를 지키겠다고요.”

“…….”

“그게 부인을 지키는 일이 될 테니.”

헤레이스가 씨익,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앞으로도 저는 폐하의 편에서 폐하를 지킬 것입니다.”

헤레이스는 내가 그 말을 한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가 나를 배신하고 루이스를 향해 검을 겨눌 것이라고 생각해서 내가 오기로 했던 말. 헤레이스는 그 약속을 얘기하고 있었다.

헤레이스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 믿어 주세요. 저는 부인이 시키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겁니다.”

분명 그의 말속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이 기껍지 않았다.

게다가 헤레이스의 말에 그 약속이 떠올랐다. 헤레이스가 내게도 부탁이 있다며 했던 말. 그를 버리지 말라는 것은 무슨 의미였을까.

분명 결과만 놓고 보면 모든 것이 잘됐다. 루이스는 여전히 건재하고, 반역이 일어날 것이라는 불안함 역시 사라졌다. 게다가 헤레이스는 루이스를 도와 반역이 실패하도록 만들었다.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된 것인데.

‘왜 이렇게 찝찝하지.’

그렇다면 홀가분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알 수 없는 찝찝함이 계속 남아 있었다.

헤레이스는 왜 루이스를 도왔을까.

나와 루이스가 회귀한 사실을 알아서? 그래서 이번에는 반역을 성공하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과거에 내가 죽은 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래서 반역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가 이번에 루이스를 도왔다고 해서 그를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과연 이것으로 나와 헤레이스의 악연이 모두 끝났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

헤레이스 역시 내 얼굴이 심상찮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는 몇 번이고 내 상태를 확인했다.

밤이지만 잠이 오지 않아서 테이블 앞에 앉아서 창밖 너머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헤레이스가 찾아왔다. 그는 내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나를 불렀다.

“부인, 할 얘기가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헤레이스의 눈동자는 복잡해 보였다.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저는 부인이 끝까지 모르기를 바랐습니다.”

“공작님이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요?”

“네.”

내가 그가 회귀한 사실을 모르기를 바랐다니. 어째서지? 헤레이스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어 나갔다.

“저는 부인의 마음을 돌리고 싶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습니다.”

어쩐지 그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절절하게 느껴졌다. 그는 힘들어하면서도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제가 회귀를 했다는 사실을 알면, 부인이 다시는 저를 돌아보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헤레이스의 말이 맞았다. 그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이기에 나는 그의 곁에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면, 나는 곧바로 그를 적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언제 그가 반역을 저지를지, 무슨 짓을 할지 더욱 촉각을 세우며 대비했을 것이다. 그와 다정한 척 연기하는 어처구니없는 짓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얼굴에서 단호한 거부감이 드러났는지, 헤레이스의 얼굴이 안쓰러울 정도로 일그러졌다. 그가 힘겹게 입을 뗐다.

“과거에 제 잘못으로 부인이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압니다. 그것을 만회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그의 말에 단호하게 말했다.

“…이기적이네요.”

결국엔 자신이 저지른 일을 만회하기 위해 내게 숨겼다는 뜻이었다. 나는 냉정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내 말에 헤레이스는 불안한 듯, 그러면서도 혹시 모르는 희망을 담고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냉정하게 말했다.

“어차피 저도 공작님께 얘기하지 않았으니까요.”

“!?”

“결국엔 달라지는 건 없어요.”

그래, 달라지는 건 없다. 그가 반역을 막는 일에 일조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나와 헤레이스의 관계는.

그러나 헤레이스는 오히려 더욱 단호하게 선언했다.

“달라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래도 저는 부인이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할 것입니다.”

“…….”

“제가 부인에게 한 말은 모두 지킬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의 말에는 자신의 한결같은 마음에 대한 맹세가 있었다.

과연 그런 게 가능할까. 나는 회의적이었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니 얘기해도 되겠습니까.”

“?”

“과거에는 제가 부인에게 하지 못 했던 이야기를.”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순간 알아차렸다.

회귀 전에 관한 이야기. 지독히도 불행한 결혼생활과 반역, 그리고 나의 죽음 그 이후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었다.

외전 4. 하필 오늘이라니 (헤레이스 외전) (1)

제국의 무서울 것이 없는 황제가 유일하게 아끼는 혈육이자 동생인 황녀 에일린. 게다가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다고 칭송받는 아름다운 외모까지. 과연 누가 황녀와 결혼하게 될까. 모든 제국민들의 궁금증과 기대감을 한 몸에 받았었다.

그런 그녀가 비록 오랫동안 이어져 온 명망 있는 공작가라고 하지만, 현재는 기울어 가고 있는 가문의 공작인 나와 결혼한다는 것은 제국에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심지어 그 결혼이 내가 아닌 황녀가 한눈에 반해서 열렬한 청혼과 설득 끝에 성사된 결혼이라는 소식은 제국민들이 경악하기에 충분하고도 넘쳤다. 처음 그 사실이 알려졌을 때까지 사람들 대부분은 결혼식이 진짜 진행될 거라고 믿지 않았다. 결혼식 날이 되기 전에 파혼할 거라는 예상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결혼식은 많은 잡음 속에서도 전날까지도 강행되었다. 제국의 그 누구도 축복하지 않는 결혼식이 오늘 밤이 지나면 치러질 것이다. 나와 에일린의 결혼식이.

그와 동시에 이 결혼을 대가로 공작가에 있는 모든 빚을 탕감받기로 약속받았다. 이것은 에일린의 입장에서는 나를 위한 배려였을 것이다. 또한, 나의 어머니 이사벨의 입장에서는 원치 않는 결혼을 허락하는 최소한의 대가였을 것이다.

한편, 이것은 루이스의 입장에서 나를 옥죌 수 있는 함정이었다. 공작가가 에일린을 통해 황가의 도움을 받으면 받을수록, 루이스는 내 모든 행동을 통제할 것이다. 특히 에일린과의 관계에 있어서. 앞으로 공작가가 커지면 커질수록 이 관계의 악순환은 더욱 더 심해지기만 할 것이다.

결혼식 전, 나는 루이스로부터 호출을 받았었다. 무슨 의도로 부르는지는 명확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호출을 거절할 수 없었다.

나와 황제 루이스만 있는 방 안, 넓은 공간에 존재하는 빛은 단 하나뿐이었다. 오로지 사람의 형체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만의 밝기. 나머지는 암흑으로 가득했다. 그렇기에 내 앞에 앉아 있는 루이스의 존재는 더욱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나를 불러 놓고 한참을 아무 말 없이 못마땅한 얼굴로 보던 루이스가 입술을 열었다.

“에일린을 죽일 수는 없어서 당장은 결혼을 허락했지만, 헤레이스 공작.”

나를 향해 살벌하게 노려보는 루이스의 시선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는 내게 경고를 가장한 협박을 하기 위해 불렀다. 그와 짧게 마주친 눈빛만으로도 그 사실을 알기 충분했다.

“네놈이 에일린의 진짜 남편이라고 착각하지 마라.”

루이스는 여전히 나와 에일린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혼식을 하고 공작가에 에일린이 와서 앞으로 살아갈 텐데. 이 사실을 제국민 모두가 아는데. 아무리 모든 것을 가진 황제라고 해도 어쩔 건가. 그가 진짜 남편이 아니라고 한다고 해서 내가 남편이 아니게 되는 건가.

공작가는 황가에 지은 죄가 있었다. 특히, 황녀 에일린과 눈앞에 있는 황제 루이스에게. 그래서 그동안 온갖 멸시를 당하면서도 숨을 죽이고 자세를 낮춘 채 견뎠다. 그게 최소한의 속죄라고 생각했으니까.

에일린에게 무슨 목적으로 접근했냐고 의심했지만, 사실 그녀에게 참지 못하고 말을 걸었던 것은 죄책감 때문이었다.

에일린은 공작가에 납치를 당했다. 모진 일을 당하고 폐소공포증이라는 후유증을 아직까지도 가지고 있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리고 멀리서 바라봤을 때 황녀는 밝고 씩씩했다. 과거의 그 일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몸속 어딘가가 근질근질했다.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은 욕구.

폐소공포증이 나았는지. 견딜 수 있는 건지. 그날의 일 따위 이제는 웃으면서 지나칠 수 있는 건지. 아니면, 혹시 아직도 사방이 갇힌 곳에서는 숨조차 쉬지 못한 채 헐떡거리고, 깜깜한 어둠 속에서 남몰래 손발을 떨어 가며 억지로 참고 있는 건지. 5년이 지나도록 잊지 못해서 꿈속에서 그날의 악몽을 떠올리는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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