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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바쁜 황녀님-90화 (90/124)

?제90화. 외전 4. 하필 오늘이라니 (헤레이스 외전) (2)

아직 가세가 기울기 전의 공작가는 지금보다 더 컸고, 그녀가 감금된 곳은 몇몇의 하인이 아니면 발길조차 하지 않을 만큼 외진 곳이었다. 그날 그곳을 내가 지나간 것 또한 흔히 있지 않는 우연이었다. 그러고도 바로 구하지 못했다. 이미 공포에 질려 떨고 있는 어린 황녀를 바로 밖으로 꺼내 주지 못했다.

그 죄책감 때문에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 싶었다. 얼마나 괜찮은지. 죄책감 때문에 저절로 관심이 갔고 도와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도와주고 싶었다.

그 마음 때문에 결혼이라는 상황이 오게 된 것은, 사실 내가 아닌 에일린에게 독이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쩌려고. 자신을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간 게 이곳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면서도 그 사실을 미리 고백하지 못하는 것은 나의 미련이었고, 그 사실을 먼저 말하지 못한 루이스 또한 그의 어리석음이었다. 말도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자신이 직접 그녀가 감당하기 힘든 진실을 말해 그녀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은 미련과 어리석음이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감히 황제를 향해서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인정하기 싫으시면 허락하지 마셨어야죠.”

나도 못 했지만, 당신도 똑같지 않냐는 반항이었다.

그 순간 루이스의 호위가 내 목에 검을 겨눴다. 살기를 전혀 숨기지 않은 상태로 언제든지 자신의 주군인 루이스가 신호를 보내는 순간 내 목을 벨 기세였다.

“주제를 알아야지.”

“…….”

“잊지 마라. 네놈의 목이 언제나 내게 있다는 것을.”

제국의 사랑받는 황녀와 제국의 공작의 결혼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검소했다. 검소하다는 것도 좋게 표현한 것일 뿐, 실상은 초라한 결혼식이 될 예정이었다.

* * *

나는 그레이스와 함께 있었다. 지금 제국에서 나의 내연녀로 가장 유명한 사람이 그레이스였다. 나는 반역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비밀리에 만나도 탈이 없는 방법으로 내연녀를 만나는 척했다. 내가 내연녀로 유명한 여자들이 대부분 귀족 영애인 것 역시 그런 이유였다.

물론, 귀족들은 반역이 성공한 후에 공작 부인으로 자신의 딸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한 행동이기도 했지만.

나는 문득 그레이스를 만나러 오기 전 마주쳤던 에일린이 떠올랐다. 그녀는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눈빛만으로도 내가 어디에 가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결혼 후에도 나는 에일린을 철저하게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루이스와 귀족 연합군 사이에서 약점이 생기면 안 됐다. 에일린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철저하게 모른 척했다.

“아버지께서 보낸 서신이에요.”

그레이스가 내게 서신을 전달했다. 나는 바로 확인하지 않고 품속에 보관했다. 그레이스가 말했다.

“이미 황제는 죽어 가고 있어요.”

나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레이스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동안 극소량으로 조금씩 독을 넣고 있었답니다.”

나는 최대한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며 물었다.

“언제부터 했습니까.”

“벌써 삼 개월이 지났어요.”

“그럼 지금 상태가…….”

“이미 독이 몸속까지 퍼져서 어쩔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을 겁니다.”

그레이스가 씨익, 자신 있게 웃으며 말했다.

“이번 반역은 저희의 승리에요. 공작님.”

그레이스가 내 목에 자신의 팔을 둘렀다. 하지만 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레이스가 내 얼굴에 가깝게 다가오며 말했다.

“곧 황제와 황녀 모두 죽이고, 저희도 새로 시작해요.”

그녀의 말은 에일린을 죽이고, 다시 결혼을 하자는 뜻이었다. 하지만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침묵하자 그레이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공작님, 아버지로부터 전언이 하나 더 있었어요.”

그레이스가 내 어깨를 잡아 가까이 다가갔다. 얼굴이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거리였다.

“만약 공작님께서 저희를 배신한다면, 그 대가는 황녀께서 치르게 될 것입니다.”

나는 최대한 동요하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전부 알고 있다는 듯이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웃었다.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내가 에일린을 꽤나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런 협박이 통할 것이라는 것도.

그레이스가 말을 덧붙였다.

“그 독은 황녀도 마시고 있으니까요.”

망했다. 나는 더 이상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죽기 전까지는 독에 중독된 사람도 몸의 이상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

“물론, 저는 그 해독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리는 것을 아마 그레이스도 보았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그레이스는 더욱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내가 귀족 연합군과 처음 손을 잡게 된 계기는 선대 공작이자 나의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의문이 많은 죽음이었다. 사고라고 하지만 타살이 의심되었고, 그 범인은 루이스일 확률이 높았다. 이사벨은 루이스가 자신의 남편을 죽였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때는 분노로 눈이 멀었었다. 그래서 일부러 거리를 두고 있던 귀족들에게 먼저 찾아갔다. 그들의 방향에 동의하며 함께하겠다고, 선대 공작의 뒤를 잇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곧 후회했다. 에일린과 결혼하고 루이스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

하지만 이미 너무 늦은 후회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일들로 인해 나는 혼란스러웠다.

* * *

나는 고심 끝에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루이스를 찾아갔다. 그런데 루이스 역시 자신이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루이스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이제 곧 반역을 일으키겠지.”

딱히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이는 것 같았다. 내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하지 못하자, 루이스는 다시 입을 열었다. 갑작스럽게, 다정한 목소리로 선심 쓴다는 듯이 피식 웃기까지 하면서.

“공작, 나를 죽이도록 해 주지.”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대답할 수 없었다. 루이스가 내 쪽으로 다가오며 심각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단, 에일린의 목숨은 보장해라. 그 아이의 안전을 보장한다면, 기꺼이 죽어 주지.”

어차피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이었다. 그들의 반역을 저지한다고 해도 오래 살지 못했다. 후계자도 없는 황제였다. 그것이 이 순간에 후회될 줄이야.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루이스는 차라리 자신의 죽음을 대가로 에일린을 지키기로 한 것이었다.

내가 물었다.

“어째서 독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까.”

루이스가 독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전에 흘리듯이 나왔던 안건을 실행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루이스는 덤덤하게 답했다.

“방심했나 보지.”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사실 루이스의 말은 진짜였다. 그가 독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후였다. 루이스는 조금씩 고립되어 가고 있었고, 더 이상 황위를 유지하는 것은 힘들다고 판단했다.

“네 손으로 죽여라.”

“…….”

“다른 놈들이 죽이려 한다면, 내가 모두 베어 버릴 것이니.”

아무리 온몸에 독이 퍼졌다고 해도 루이스는 루이스였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 누구도 루이스를 막을 수 없을 것이었다.

* * *

결국, 반역이 일어났다. 실상 반역을 일으킨 주체는 내가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내가 반역의 주체라고 인식했다. 그것은 곧 상징성 때문이었다.

황가와 오랜 시간 대척한 공작가. 그러면서도 황녀의 남편. 그 존재 자체로 나는 귀족 연합군들로부터 반역을 상징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사전에 약속한 대로 루이스를 내 손으로 직접 죽였다. 하지만 그 순간에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에일린이 모든 것을 본 것이다. 에일린은 루이스를 끌어안으며 울부짖었다. 나를 원망하면서.

일단 에일린을 공작가에 있는 지하 감옥에 가뒀다. 황궁 감옥이 아닌 공작가로 데려올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명분상이라도 내 아내라는 이유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선 상황을 어느 정도 정리한 후에 에일린에게 상황을 설명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죽어 버렸다. 에일린은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것도 내가 지켜보는 앞에서 일부러 보란 듯이 독을 마시고.

나는 결국 루이스와의 약속을 지킬 수가 없었다.

* * *

에드문드는 최악의 황제였다. 능력은 없고 욕심만 많았다. 귀족들 역시 그렇기에 에드문드를 황제로 추대한 것이었다. 그는 결국 허수아비로서 사치와 향락만을 추구했다.

귀족들은 힘겹게 쟁취한 힘을 보상받으려는 것처럼 엇나가기 시작했다. 제국은 이전보다 더 살기 힘들어졌다.

나는 그레이스와 결혼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없었다. 공작가는 귀족 연합과 결별했다. 귀족 연합은 공작가를 치우기 위해 모략을 일삼았다. 나는 더 이상 싸울 힘이 없었다.

결국, 나는 귀족 연합에 의해서 물러나게 되었다.

‘에일린에게 단 한 번이라도 다정하게 대해 줄 수 있었다면.’

지난 결혼생활 내내 나를 향해 그리운 시선을 보내던 에일린의 눈빛이 결국 원망으로 가득 찬 것으로 변했을 때,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녀가 내 앞에서 독을 마시는 순간, 나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나와 얽힐 때마다 에일린에게는 안 좋은 일이 하나씩 늘어났다. 나의 아버지이자 선대 공작으로 인해 겪지 않아도 되는 일을 겪어서 폐소공포증이라는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나를 좋아하게 되고 청혼했을 때, 나는 모진 말로 거절하며 상처를 주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고, 나는 그녀의 끈질긴 노력을 핑계 삼아 하는 수 없는 척 결혼했다. 하지만 사실 단 한 순간도 기대조차 할 수 없었던 결혼을 끝끝내 밀고 나간 그녀가 너무도 고마웠다.

그러면서 결혼생활 내내 단 한 번도 그녀에게 다정하게 대하지도 제대로 된 부부처럼 지내지도 못했다. 언제나 약점이 있는 결혼생활. 에일린에 대한 마음이 커질수록 귀족 연합에게 그녀는 나의 약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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