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화. 외전 4. 하필 오늘이라니 (헤레이스 외전) (3)
어느 순간부터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더더욱 무관심하게 행동해야만 했다. 그녀가 힘들어하는 걸 알면서도,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서도 외면해야만 했다.
그리고 결국, 그녀의 하나뿐인 혈육인 황제 루이스를 지켜 주지도, 그녀에게 모든 것을 고백하지도 못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그녀에게 최악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에일린에게 단 한 순간도 좋은 사람이었던 적이 없었다. 만약 다시 한번 되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는 다시 만나지 않는 것이 에일린에게 좋은 일일 것이다.
그래도 아주 만약에 그런 기회가 생긴다면, 바라건대 오로지 에일린만을 위해서 살아가리라.
* * *
다시 눈을 뜨니 과거로 돌아와 있었다. 그것도 첫날 밤 직후로.
회귀 전 나는 결혼 첫날밤에 에일린과 함께하지 않았다. 그녀를 방에 놔둔 채로 밤새 밖에 있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허울뿐인 결혼. 그 진짜 의미는 내가 에일린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이 결혼은 허울뿐, 나는 결코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선대 공작의 약점이 있는 한, 나는 루이스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런 우리의 결혼이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할 수 없는 것은 필연이었다.
이것은 기회였다. 다시 한번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기회.
이번만큼은 실수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는 오로지 에일린과 함께할 것이다. 그녀를 외면하지 않고 힘들게 하지 않을 것이다.
* * *
내가 회귀를 했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은 루이스가 살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회귀해서 돌아온 시기는 정확히 결혼식을 하고 난 후, 첫날밤이었다. 그때 나는 에일린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황궁에서 루이스를 만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회귀했을 때 가장 처음 본 사람은 황제 루이스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가 살아 있다면, 에일린도 살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
‘하필 오늘이라니…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었다. 그리고 미치도록 감사했다.
황궁을 나오자마자 곧바로 공작가로 달려갔다. 하지만 바로 에일린이 있는 방에 들어갈 수 없었다. 몇 번이나 망설인 끝에 방으로 들어갔다.
순간 나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뜨릴 뻔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모습의 에일린이 그 안에 있어서. 그녀의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어서. 그 순간이 현실 같지 않고 정신이 멍한 상태로 붕 뜬 것 같았다.
겨우 표정을 관리하며 말했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울컥 감정이 쏟아질 것 같아서 참다 보니 너무 무심하게 말한 것 같았다.
‘그래도 정말 돌아왔어.’
모든 걸 되돌릴 수 있다. 처음부터 다시 제대로 할 수 있었다. 그런 기회가 생긴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머지는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 낼 것이다. 이번에는 절대로 똑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리고 에일린과 함께 황궁으로 갔을 때, 그녀가 우는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에일린을 지키는 방법은 루이스를 지키는 것이다. 회귀 전에도 반역을 막으려고 했지만, 실패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 일들 때문에. 그러니 이번에는 루이스를 살리자.
그리고 회귀 전처럼 다른 이유들 때문에 에일린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할 것이다.
나는 내 옆에 있는 에일린을 보며 결심했다.
* * *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회귀 전과는 조금씩 달라진 점들이 보였다. 에일린이 달라졌다.
나와 결혼한 후부터 언제나 할 말을 참고 눈치를 보던 에일린이 원래의 모습 그대로 행동했다. 대체 회귀한 직후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 수 없지만, 그 모습이 보기 좋았다. 나 때문에 참지 않고 할 말을 다하고 당당한 에일린의 모습이.
하지만 에일린의 변화는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었다.
처음 의심을 하기 시작한 것은 마담 세실 의상실에 갔을 때였다. 에일린이 드레스 스타일을 골라 레이스를 얘기할 때, 그게 언제 유행했는지가 떠올랐다.
‘설마…….’
하지만 그것만으로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신을 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갑자기 에일린이 황궁에서 지내게 되었을 때, ‘어쩌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황궁에서 열린 연회에서 에일린이 “제게 잘하세요.”라고 말한 순간 확신했다.
‘에일린도 회귀했구나.’
그녀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적의, 분노, 원망이 가득 담긴 눈빛이었으니까. 회귀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두 알고 있는 시선이었다. 그러니 알 수밖에 없었다. 에일린도 회귀했다는 사실을. 내가 한 끔찍한 모든 것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녀에겐 끔찍한 과거들일 텐데, 모두 기억하고 있다면 분명 지금도 괴로워하고 있을 것이다.
‘전부 말할까. 나도 기억하고 있다고. 그러니까…….’
나는 에일린의 편이라고. 회귀 전에 있었던 일은 모두 후회한다고. 어찌 되었든 잘못된 일이었다고. 나는 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것이고, 반역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 낼 거라고.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만 에일린이 믿어 줄 리 없었다.
‘내가 한 일이 있으니까.’
그건 말 몇 마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내가 회귀 전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바꿔야만 믿어 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야 에일린이 갑자기 달라진 이유도 알 것 같았다. 그녀 역시 회귀 전의 일을 모두 바꾸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나를 좋아하지 않겠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에일린이 그랬던 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무엇이든 할 것이다. 끈질기게. 에일린이 내게 마음을 열 때까지 무엇이든 할 것이다.
그리고 에일린이 공작가로 돌아왔다. 몇 가지 조건을 걸고.
나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녀는 내게 화를 내기 위해 내건 조건들이었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회귀 전에는 해 줄 수 없었던 것들, 알면서도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것들을 해 줄 수 있었으니까.
에일린이 티파티에서 영애들 앞에서 해야 할 일을 알려 주었을 때 역시도 에일린이 오해할 일 없게 보란 듯이 했다. 그동안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진심을 담아서.
생각해 보니 그동안 에일린에게 해 주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이번에 다 해 주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된 선물을 한 적도 없네.’
마담 세실 의상실에 갔을 때도 갑자기 나타난 카일라 때문에 애매했다. 이번에야말로 에일린이 정말 좋아할 선물을 주고 싶었다. 물론, 그 선물이 모두 거절당했지만.
그래도 에일린에게 뭔가를 해 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실은 즐거웠다. 이번에는 오로지 내가 에일린에게 해 주고 싶었다.
에일린이 나를 의심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려도. 그녀가 별장에 왔다 간 사실을 알고 있어도. 그녀가 내가 반역을 할 거라고 믿고 있어도.
나는 아무것도 모른 척 웃으면서 지금의 평화를 유지할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공작님.”
나를 부른 에일린이 사르르 미소를 지었다. 순간 표정 관리가 되지 않을 만큼 깜짝 놀랐다. 얼굴에 불이 난 것처럼 뜨거워졌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에일린이 내게 잠깐이라도 잘해 줄 때마다 힘이 났다. 앞으로도 잘할 수 있을 거라는.
* * *
하지만 회귀를 해도 과거에 있었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카일라, 그리고 그레이스. 내가 많은 스캔들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 단 한 번도 에일린에게 해명할 수 없었던 이유.
귀족 연합에게 황제 루이스는 절대 공존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한쪽이 무너질 때까지 서로를 공격할 수밖에 없는 관계.
에일린이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모르지 않았다. 다만 회귀 전에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는 외면할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철저하게 착각이었지.’
그렇게 나는 모든 것을 잃어야만 했으니까.
그러니 이번에는 영애들로 귀족 연합의 눈을 속이는 방법 따위는 쓰지 않을 것이다. 대신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지만.
나와 에일린의 관계가 소문이 나면서 귀족 연합으로부터 다양한 독촉을 받았다.
“설마 인제 와서 손을 떼려는 건가.”
“그럼 지금 이혼할까요? 그러면 황제는 바로 저를 비롯한 귀족들을 겨눌 겁니다.”
“…이혼을 말하는 게 아니지 않나.”
“지금 저에게 스캔들이 나는 순간, 황녀는 이혼하려고 할 겁니다.”
나는 철저하게 에일린이 아닌 황녀를 이용하는 척했다.
“이렇게 자주 만나면 황녀의 의심을 살 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더 조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철저하게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회귀 전의 기억을 떠올려 반역에 갈팡질팡하는 자들을 따로 만나 그들을 포섭했다. 반역은 실패할 것 같다는 가능성을 그들의 마음에 심었다. 그들이 반역이 일어날 때 귀족 연합이 아닌 루이스의 편에 붙도록.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반역이 성공할 수 있었던 진짜 이유였다. 루이스가 먹은 독. 그 독을 먼저 제거해야 했다.
하지만 그 독만큼은 나도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이미 루이스가 독에 상당히 중독된 후에야 그 존재를 알게 되었으니까.
회귀를 하고 난 후부터 나는 독의 출처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보좌관으로부터 가장 유력한 집단을 찾아냈다. 그 상단은 나도 알고 있는 집단이었다.
“귀족 연합의 뒷일을 모조리 도맡아 하는 상단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거리를 휘젓고 다니며 횡포를 부리는 질이 안 좋은 정도인 것 같지만, 사실은 뒤에서 많은 일을 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 독을 가져왔다는 건가.”
“그럴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중독되기 전까지는 전혀 눈치를 챌 수 없는 독의 출처를 찾았는데, 거기서 그곳과 거래를 한다고 합니다.”
“어떤 거래지?”
“희귀한 보석이나 향신료를 거래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런 독이 섞여 있어도 아무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독의 출처를 알아내어 상단에게서 독을 알아내려고 하는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루이스가 상단에게 붙잡힌 데다가 에일린까지 루이스가 붙잡힌 곳에 나타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