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화. 12장. 하지만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2)
어린 소녀가 헤레이스를 발견하고는 활짝 웃으며 달려왔다. 반갑게 인사하는 소녀를 따라 짧은 다리로 뒤뚱거리며 달려온 소년도 혀 짧은 발음으로 인사했다.
“엇. 아저씨! 안녕하세요!”
“안냐세여.”
헤레이스는 두 사람이 익숙한 것처럼 웃음을 지었다.
“그동안 잘 지냈니?”
“네, 덕분에 잘 지내고 있어요.”
소녀는 싱글거리며 웃었다. 그녀의 남동생 역시 따라 배시시 웃었다.
“그때 만났습니다.”
“그때라니…….”
갑자기 떠오르는 순간이 있었다. 루이스가 황궁을 나와서 사고를 쳤던 날, 헤레이스가 마중을 나왔었다.
“그때……. 하지만 어떻게…?”
헤레이스는 분명 모든 일이 다 끝난 후에 나타났었는데, 어떻게 이 소녀를 알고 있는 거지? 게다가 분위기로 볼 때 지금도 소녀와 연락을 했던 것 같은데, 어떻게 지금까지 연락하고 지내는 거지.
“사실…그때 부인과 폐하가 있던 식당 맞은편에 제가 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그럼 전부 지켜보고 있었던 건가요?”
헤레이스는 소녀와 그 남동생을 보며 말했다.
“어쩌다 보니 인연이 생긴 거죠.”
헤레이스는 괜히 먼 하늘로 시선을 돌리며 답했다. 나는 그런 헤레이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때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면, 지금 이 상황도 자연스럽게 이해됐다. 나는 결국 피식,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나와 헤레이스는 아이들과 함께 식당으로 왔다. 전에 한 번 헤레이스와 왔던 곳이다. 나를 발견한 주방장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스페셜한 코스로 모시겠습니다.”
주문도 전에 주방장이 의욕 가득한 상태로 머릿속에 메뉴를 구상 중이었다. 결국, 우리는 주방장에게 메뉴를 맡기기로 했다.
“맛있니?”
소녀와 남동생이 입안에 음식을 가득 담은 채 대답했다.
“네. 맛있어요!”
“마시쪄!”
터질 것 같이 부풀어 오른 볼이 귀여웠다.
“꼭꼭 씹어 먹으렴.”
나도 모르게 소녀의 남동생이 열심히 먹는 동안 흘리는 것을 손으로 닦아 냈다. 옆에서 에밀이 깜짝 놀라 손수건을 내밀었지만, 내 손이 더 빨랐다.
“지금 생활은 어떻게 하고 있니?”
계속 걱정되었던 것을 물었다. 소녀와 그녀의 남동생이 긴장이 풀릴 때까지 기다렸었다.
“백작 가문의 자잘한 심부름을 하고 있어요.”
“백작가?”
“네. 뉴튼 백작가라고 하는데……. 주인분들이 너무 친절하세요. 좋아요!”
뉴튼 백작가라면 올리비아의 가문이다. 어떻게 그 많은 귀족 중에서도 뉴튼 백작가에서 일을 하게 된 거지? 이게 우연일 리는 없었다.
나는 헤레이스를 돌아봤다.
“제가 아닙니다.”
“그럼?”
헤레이스가 미소를 지으며 내 생각에 동의했다.
“네. 그분입니다.”
그 말은 곧 루이스라는 거다.
“저도 신경 쓰여서 알아봤는데, 이미 백작가와 연결이 되어 있더군요.”
“…….”
“대신 가끔씩 사람을 보내서 어떻게 지내는지 확인하고 있습니다. 근처를 지나갈 일이 있으면 제가 직접 가 보기도 하고요. 그러다 보니 저 아이들과 친해졌습니다.”
“…다행이네요.”
나는 그냥 웃었다. 이래저래 신경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결국에 잘됐으니 된 일이다.
식사를 다 하고 식당을 벗어날 때 동생의 손을 꼭 붙잡은 소녀가 말했다. 소녀의 눈은 똘망똘망 빛나고 있었다.
“이제 저희 걱정은 마세요. 덕분에 저희는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어요.”
소녀는 그야말로 당찼다. 그 모습에 나와 헤레이스는 소녀와 남동생의 머리를 보듬어 주었다.
소녀는 몸을 돌렸다. 이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볼 때였다. 몇 걸음 걸어가더니, 소녀가 남동생의 손을 놓고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왜 그러니?”
소녀가 할 말이 있는지 나와 헤레이스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내 물음에 소녀가 당차게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의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 겁니다!”
“…….”
“감사합니다. 공작님. 그리고 황녀 전하.”
소녀가 인사를 하고 다시 동생에게 달려갔다. 동생의 손을 꼭 붙잡고 씩씩하게 걸어갔다. 종종걸음이었다. 특히나 남동생의 발걸음에 맞추다 보니 우리들의 시야에 사라지는 데까지는 한참이나 걸렸다.
그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는데, 헤레이스가 나를 보며 말했다.
“부인, 잠시 걷지 않겠습니까.”
“…네.”
나와 헤레이스는 다시 공원으로 돌아왔다. 공원을 걷는데 주위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기분 좋게 부는 선선한 바람. 조용한 공원. 이상하게 평화롭고 모든 것이 순조로운 하루였다. 그래서인지 기분이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헤레이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더 피곤하게 만들진 않았습니까.”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답했다.
“아뇨, 정말 좋았어요.”
진심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오늘은 만족스러웠다. 내 대답에 헤레이스 역시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하늘을 보니 해가 기울어 가고 있었다. 저녁노을이 시작되었다. 오늘 하루가 끝나 가고 있었다. 그때, 헤레이스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제 돌아갈까요?”
“네…….”
내가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헤레이스가 뒤에서 나를 불렀다.
“부인.”
나는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마치 수많은 고민 끝에 말하는 것처럼 그의 입술이 힘겹게 열렸다.
“그동안 부인을 힘들게 해서…미안합니다.”
그는 회귀 전에 있었던 일까지 얘기하고 있었다. 나는 헤레이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를 향해 화를 내지도 미소를 짓지도 않은 채. 헤레이스가 말했다.
“앞으로는 그대에게 잘하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차마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가 하고 있는 말은 미래를 얘기하고 있었으니까. 앞으로 나와 헤레이스가 함께 하자고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헤레이스와 함께 하는 미래를 떠올릴 수 없었다.
분명 헤레이스는 그의 말대로 회귀 전과는 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모든 게 다 좋아지는 걸까. 내 기억 속에는 있지만 지금 시간에는 벌어지지 않은 일은 전부 꿈처럼 사라지는 걸까.
헤레이스는 반역을 막았다. 나와 루이스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 덕분에 지금은 회귀 전과는 다른 결과가 나왔다. 그러니 나와 헤레이스의 관계 역시도 달라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도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있고, 과거를 후회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헤레이스가 내민 손을 잡을 수 없었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어도 나는 여전히 헤레이스를 온전히 믿을 수 없으니까. 나는 앞으로도 꾸준히 그를 의심하게 될 것이다.
그런 상태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까.
회귀 전에 내가 한 가장 큰 실수는 불완전한 관계를 붙잡고 놓아야 할 때 놓지 못했던 것이다. 거기에 내가 알지 못했던 속내가 있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없었다. 반역이 잘 마무리되어서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와 헤레이스의 관계까지 없었던 일이 될 수는 없으니까.
나는 오랜만에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헤레이스.”
그러자 헤레이스가 입을 다물고 미소를 머금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네.”
그러고 보니 결혼 후에 그의 이름을 불러 본 건 처음이다. 지금의 모습만 보고 있으면 그가 또 반역을 일으킬 것 같지 않다. 하지만 분명 그런 날이 올 수도 있겠지.
내가 아무 말 없이 빤히 보기만 하자, 헤레이스가 나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부인…?”
나는 고개를 살짝 올려서 헤레이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분명 내 눈빛에 더 이상 망설임은 없을 것이다. 헤레이스를 보며 입술을 열었다.
“헤레이스, 우리 이혼해요.”
그동안 생각해 오던 것을 드디어 말했다.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가벼웠다. 입가에 미소가 슬그머니 감돌았다.
헤레이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방금 제대로 들은 건지 헤레이스는 확인하고 싶은 것 같았다. 그가 내 얼굴을 빤히 살폈다. 혼란스러워 보였다.
“부인.”
그가 나를 부른 뒤,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짧은 침묵이 흘렀다.
헤레이스는 내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입술만 달싹일 뿐, 더 이상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그저 미간이 구겨졌다가 험악해졌다가 얼굴을 쓸어내리기를 반복했다.
“헤레이스 공작.”
순간 헤레이스가 움찔했다. 내가 그를 아내로서 부른 것이 아니라 황녀로서 공작인 그를 불렀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저는 그대와 이혼할 겁니다.”
결국, 나는 말하고야 말았다. 언제나 마음만 먹고 입 밖으로는 꺼낸 적 없는 말을.
헤레이스가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마치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게…무슨 말입니까.”
나는 다시 한번 헤레이스에게 정확히 말했다.
“우리 이혼해요.”
헤레이스의 눈이 커지는 것 같더니 그대로 굳었다.
* * *
공작가로 돌아온 후에도 나와 헤레이스 사이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앨버트를 비롯한 시종과 시녀들이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헤레이스가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
어차피 내 마음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그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였다. 그가 충분히 생각하고 대답을 할 때까지 아무 말 없이 기다려 주는 것.
하루가 그대로 지나가고 있을 때, 헤레이스가 나를 찾아왔다. 그가 나지막이 나를 불렀다.
“…부인.”
하지만 그 한마디에 그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는지가 복잡한 마음이 전해졌다.
“갑자기 왜 이러는 겁니까.”
“회귀하고 나서 항상 생각하던 거예요.”
결코, 갑자기가 아니었다. 내 말에 헤레이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곧 그는 다시 나를 붙잡았다.
“다시 한번 생각해 주세요.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그래도 대답은 똑같을 겁니다.”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가 아니니까. 결국, 내 대답은 끝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미래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