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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바쁜 황녀님-94화 (94/124)

?제94화. 12장. 하지만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3)

“제가 얼마나 잘못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용서받기 힘들다는 것도…!”

헤레이스의 얼굴은 절박해 보였다. 그저 이렇게 끝낼 수 없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무턱대고 나를 붙잡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 모습에 동정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걸로 대답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래도 한 번만 기회를 줄 수 없습니까.”

“네.”

잔인하지만 내 대답은 바뀌지 않았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기회는 없다.

“제가 공작님께 생각할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

“하지만 제가 드릴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뿐입니다.”

내가 헤레이스에게 줄 것은 그가 마음을 정리하고 이혼을 결심할 시간이었다. 이혼 여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저를 위하는 게 맞다면…인제 그만 끝내요.”

그게 정말로 나를 위해 주는 것이라고. 나는 헤레이스에게 부탁했다.

인제 그만 모든 것을 끝내자고.

* * *

이혼에 관한 소문이 퍼지기 전에 나는 먼저 황궁으로 가 루이스를 찾았다. 루이스에게는 먼저 말해 두는 게 좋을 것이다.

“공작님과 이혼하려고 합니다.”

“…….”

루이스가 하던 행동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크게 놀라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다. 루이스는 덤덤하게 물었다.

“이혼하겠다고?”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이미 마음의 정리를 모두 끝내고 오는 길이었으니까.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네.”

루이스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갑자기 왜 그런 결정을 했지? 반역도 잘 끝났는데. 난 여전히 헤레이스가 마음에 들진 않지만….”

루이스는 여전히 헤레이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믿어도 좋은 놈이다.”

하지만 더 이상 이전처럼 적대시하거나 위험인물로 여기지는 않았다. 아마 이번 반역을 막기 위해 손을 잡으면서 나름 헤레이스를 인정하게 된 것 같았다.

나는 루이스의 말에 동의했다.

“…그럴 겁니다.”

“그럼 뭐가 문제인 거지? 잘 끝났고 별문제 없을 텐데.”

루이스의 물음에 나는 대답했다.

“모든 게 잘 끝났으니까요.”

모든 게 끝났다고 하지만, 거기에는 나와 헤레이스의 관계 역시 포함이었다.

반역을 막아 냈기 때문에 회귀 전에 있었던 일은 잊고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반역을 막아 냈기 때문에 내가 지금까지 유지해 오던 것들은 더 이상 필요 없어졌다. 공작 부인으로서 헤레이스의 곁에 있을 이유가.

“이제 정리하고 싶어요.”

루이스는 내 말을 듣더니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나가려는 것인지 문 쪽으로 향했다.

루이스는 무심하게 말했다. 자신이 상관할 문제가 아니라는 듯이.

“네가 원하는 대로 해.”

그 모습에 나는 처음에 당황했지만, 곧 입꼬리를 올렸다. 오로지 내 선택을 존중해 주려는 것이다. 루이스는 그러고 직접 문을 열었다.

내가 루이스가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데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고.”

만약 내 생각대로 이혼이 잘 풀리지 않으면 도와주겠다는 뜻이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이혼이 되도록. 나는 거절하지 않고 활짝 웃으며 답했다.

“정말 필요하면 그때 얘기할게요.”

만약 헤레이스가 끝까지 이혼을 거부한다면, 나는 억지로라도 할 생각이었으니까. 만에 하나, 정말로 루이스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었다.

* * *

헤레이스가 찾아왔다.

그는 지난 며칠 동안 공작가 안에서 두문불출하다시피 했다. 짧은 시간 동은 그의 몸 상태가 나빠졌는지, 의사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나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헤레이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철저하게 외면하면서 그가 찾아와 대답을 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오늘 헤레이스는 이혼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충분히 생각했나요.”

헤레이스가 힘없이 대답했다.

“…네.”

그는 며칠 동안 제대로 먹은 것이 없는 듯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얼굴에 광대가 패여서 뼈가 드러났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눈 밑이 파여 어두웠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가고 몸만 겨우 움직이는 사람 같았다.

“그럼 이혼에 합의해 주세요.”

나는 루이스에게 이혼합의서를 내밀었다. 헤레이스는 종이를 물끄러미 보더니 종이를 내 앞으로 다시 밀었다.

“무슨 뜻이죠?”

설마 아직도 못하겠다고 하는 건가. 그렇다면 이젠 정말로 이혼을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어두운 얼굴로 입술을 떼려고 할 때였다.

헤레이스가 푸석하게 갈라진 입술을 힘겹게 열었다.

“제가 무슨 짓을 해도…정말로 안 되나요?”

“…….”

헤레이스는 자존심도 모두 버리고 내게 말했다.

“저에게 벌을 준다고 생각하고 곁에 두세요. 지난번처럼 에일린…그대가 시키는 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무슨 짓이라도 하겠다고. 그의 말은 틀림없는 진심일 것이다. 그는 정말로 어떤 수모를 당하더라도 참을 것이다.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만큼 헤레이스의 마음이 어떤 건지도 모르지 않는다. 내가 황녀라고 해도, 과거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해도, 헤레이스가 내 앞에서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엎드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다고 바뀌는 것은 없었다. 내가 그와 이혼하려는 것은 단순히 그를 용서할 수 없어서만은 아니니까.

“저는 더 이상 공작님을 사랑하지 않아요.”

내 말에 헤레이스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떨렸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앞으로도 그렇게 될 수 없어요.”

내가 오로지 헤레이스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그와 결혼하려 했으니, 그 감정이 완전히 사라진 이상 결혼은 유지될 수 없었다.

헤레이스가 힘겹게 말했다. 여전히 간절한 눈으로 나를 보면서.

“…괜찮…습니다. 함께 지내다 보면 언젠간 그 마음 역시도 다시 변할 겁니다.”

그건 그의 희망 사항이었다. 이루어지지 않을 망상. 하지만 헤레이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앞으로 어떤 말을 해도 그는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그렇게 되게 하겠습니다.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는 공작님과 함께 있으면…….”

내 말에 헤레이스가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희망을 안고.

“회귀 전에 있었던 일들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을 거예요.”

하지만 내가 할 말은 결코 그가 원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진짜 나의 진심이었다.

“그렇게 또 과거에 벗어나지 못하겠죠.”

내 말에 헤레이스의 눈이 커졌다. 마치 그대로 굳어 버릴 것처럼 위태로운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는 인제 그만 모두 떨쳐내고 싶습니다.”

헤레이스의 아랫입술이 떨렸다.

“그 무엇에도 얽매이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나를 가장 얽매이게 하는 것은 결국 헤레이스였다. 그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는 회귀 전의 일을 잊을 수 없게 만들었고, 회귀 후에도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앞으로도 나는 그와 함께 있는 한 그 무엇 하나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여전히 수많은 트라우마를 끌어안은 채로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 없이.

“공작님이 하는 말들, 모르지 않아요.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는 것도. 오라버니가 독에 중독이 되어 어차피 살 수 없었던 것도. 저를 살리려고 했던 것도. 저와의 오 년 동안 결혼생활에서 단 한 번도 나를 돌아보지 않았던 것도…진심이 아니라는 것도…알아요.”

하나씩 나열할 때마다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점점 가슴 언저리에서부터 목 위로 뭔가가 올라왔다.

“회귀 전에 당신이 한 모든 게…사실은 그런 게 아니었다고 해도…!”

“…에일린…….”

말을 이어 갈수록 점점 목소리가 커졌다. 내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헤레이스가 나를 조심스럽게 불렀지만, 그런 것 따위 들리지도 않을 만큼 흥분했다.

“그때 그 모든 게 진심이 아니었어도! …내가 겪은 감정들은 모두 진짜니까.”

나는 결국 무너졌다.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고 지난 시간 동안 쌓아 온 것들을 터트렸다.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얼굴이 일그러졌다. 화가 난 건지 괴로운 건지 슬픈 건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괜찮아지지 않아요.”

눈물이 쏟아졌다. 도저히 괜찮아질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괜찮았던 적이 없었다. 아니, 때때론 더 화가 났다. 그날의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으니까.

“이젠 없어진 일이라고 해도…저한텐 모두 남아 있어요.”

아직도 모든 것이 생생했다. 당장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처럼.

“그때 느껴야만 했던 배신감, 상처, 고통…죄책감…모두…어느 것 하나 지워지지 않아요.”

나는 지금까지 쌓아 놓고 있던 것들을 모두 풀어놓았다. 감정의 찌꺼기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쏟아 내려는 것처럼.

“저는…잊을 수가 없어요.”

생각해 보면 아이러니했다.

과거에 공작가에 납치당해 감금되어 있는 동안 생긴 폐소공포증은 결국 헤레이스 덕분에 괜찮아졌었다. 그 후에 다시 발작하듯 증상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헤레이스 덕분에 과거 안 좋았던 일을 이겨 낼 수 있었다. 그래서 헤레이스를 좋아하게 됐다. 그와 함께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반대였다. 헤레이스가 있는 한, 나는 과거의 일 중 그 무엇 하나도 극복할 수 없었다. 계속 끌어안고 살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더 이상 나는 그와 그 무엇도 함께할 수 없었다.

헤레이스는 허탈한 듯이 중얼거렸다.

“…제 잘못에 대한 대가군요.”

내게 한 말이 아닌 스스로에게 하는 혼잣말. 그는 피식,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의 행동이 모두 느리게 보였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나를 보고 천천히 입을 떼는 과정들 모두.

그는 나를 향해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체념한 듯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이혼하겠습니다.”

결국, 그는 이혼에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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