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화. 12장. 하지만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4)
그의 얼굴이 체념으로 변한 것이 보였지만, 나는 그를 달래 줄 수 없었다. 다만 그가 이혼에 동의해 주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가 끝까지 거부했다면, 그때는 루이스의 힘을 등에 업고 억지로 해야 했으니까.
헤레이스는 이혼 합의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고, 모든 것이 끝났다.
* * *
나와 헤레이스가 서로 이혼에 합의하고, 나는 루이스를 찾아갔다. 내가 찾아가자 루이스는 이미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혼하기로 했어요.”
“그렇게 정했군.”
루이스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듯이.
“이혼할 거면 차라리 빨리 황궁으로 오는 게 낫겠지.”
“네. 그러려고 해요.”
루이스가 말했다.
“일단 몸부터 오고, 나머지는 사람을 보내 정리하도록 해라.”
“아뇨.”
“빨리 정리하겠다며.”
“그렇게 할 생각이지만 이혼 절차는 제대로 밟겠습니다.”
제대로 된 결혼식은 하지 않았지만, 마지막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제대로 하고 싶었다. 혹시 모를 미련이나 후회가 남지 않도록.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해.”
루이스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오로지 내 선택에 맡기겠다는 듯이. 그런 루이스에게 고마웠다.
“대신.”
“…?”
“황궁으로 올 때는 모두 털어 내고 와라.”
“…네. 꼭 전부 털어 내고 올게요.”
나는 몇 번이고 다짐했다. 헤레이스와 이혼하고 모든 것을 정리하고 황궁으로 돌아올 때는 회귀 전에 있었던 일, 지금까지 의심하고 불안해한 모든 것들을 털어 내고 돌아오겠다고.
공작가로 돌아온 후부터는 이혼 절차를 준비했다. 하지만 사실 별다른 것은 없었다. 결혼 신고서는 이혼을 신고하면서 곧 폐기될 예정이었다. 이혼을 할 때 가문의 재산을 분할하는 과정이 있었지만, 그것은 넘어갔다. 재산 분할은 의미가 없으니까.
결혼 당사자가 합의한 이혼은 허무할 정도로 간단했다. 우리의 이혼 소식이 퍼지면 그때부터 여러 파장이 생기기는 하겠지만, 그것은 이후의 문제였다.
오히려 생각보다 난관에 봉착한 것은, 그동안 공작가에 살면서 만들어진 나의 공간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언제 떠날지 모른다고 생각해 내 물건을 만들지 않는다고 했는데, 어느새 내 물건이 여기저기 한가득이었다. 여러 가지 사연이 있는 물건들이 곳곳에 보였다.
에밀이 드레스룸을 정리하다가 물었다.
“드레스들은 모두 가져가실 건가요.”
“아니, 전부 놓고 갈…….”
나는 말을 하다가 멈칫, 했다. 드레스 룸에서 레이스가 순간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헤레이스와 함께 외출했던 날, 세실의 의상실에서 주문했던 그 드레스와 레이스였다.
“일단 다른 것부터 정리해 줘.”
나는 결국 순서를 미룰 수밖에 없었다. 버리라는 대답도 가지고 가겠다는 대답도 후회를 남길 것 같아서.
“이건 어떻게 할까요.”
이번에 에밀이 물은 것은 그동안 내가 즐겨 마시던 꽃차에 넣는 말린 꽃이었다. 원래라면 고민 없이 놓고 가겠지만, 에밀은 굳이 물어보았고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게.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는 결국 대답할 수 없었다. 짐을 정리하는 것은 생각보다 꽤 험난한 과정이었다. 정리를 할 때마다 물건에 있는 사연이 떠올랐으니까. 회귀 전에는 없었던 나와 헤레이스 사이에 일들이 쌓여서 어느새 추억이 되어 버렸나 보다.
그래도 정리를 하고, 공작가를 떠날 준비는 막힘없이 진행되었다. 하나씩 정리할 것이 줄어들 때마다 이혼한다는 사실이 피부에 와닿았다. 이제 정말 곧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 * *
그러던 중, 올리비아가 찾아왔다. 이혼 소식을 듣고 걱정돼서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나를 보고 언제나 달려오던 올리비아가 이번만큼은 곤란한 얼굴을 하고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것을 보니 더더욱 확실했다.
내가 먼저 올리비아에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으니까 말해도 돼.”
그제야 올리비아는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던 입술을 뗐다.
“정말 괜찮아?”
“응. 이게 최선이야.”
올리비아는 반역이 일어난 후에 대략적인 전말에 대해 알고 있었다. 나와 헤레이스, 루이스가 회귀를 했다는 것만 빼고, 헤레이스와 루이스가 반역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손을 잡은 것을. 그리고 거기에는 뉴튼 백작가의 도움 역시도 있었다.
“갑자기 이렇게 돼서…….”
올리비아는 차마 끝까지 말을 이어 가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이혼 소식에 놀라서 자신이 말실수를 할까 조심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나는 올리비아를 향해 확고하게 말했다. 내 진심을 담아서.
“올리비아. 이혼은…나를 위해서 하는 거야.”
이번만큼은 루이스도 헤레이스도 아닌, 나를 위해서 한 선택이었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그러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후련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정말 괜찮아.”
그제야 올리비아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응. 그래 보인다.”
나도 활짝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걱정되면…내가 황궁에 돌아가면 꼭 놀러 와.”
올리비아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매일 놀러 갈게.”
황궁으로 돌아가면 한동안 시끄러울 것이다.
반역이 실패로 끝난 것에 일등 공신은 헤레이스였다. 그로 인해 황가와 공작가의 미묘했던 관계가 다시 없을 끈끈한 우호 관계가 되었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 황녀인 나와 헤레이스의 이혼이라니.
혹시 황가와 공작가에 균열이 벌어진 것은 아닐지 걱정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이고, 이를 멋대로 상상해서 부풀리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한동안은 행동 하나하나 모두 조심해야 했다. 황궁으로 돌아간 후, 내가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올리비아가 전부일 것이다. 나는 올리비아를 향해 씨익, 웃었다.
“고마워.”
* * *
이혼을 결정하고 황궁으로 떠나기 위해 준비를 하는 동안, 헤레이스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언제나처럼 웃는 얼굴로 나를 대하고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언제나와 같은 일상이었다. 그래서 한순간이나마 이혼해서 모든 것이 끝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말 정도로.
그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나는 화들짝 놀라고는 했다.
하지만 시간은 꾸준히 흘렀고, 어느새 내가 공작가를 떠나기 전 마지막 밤이었다. 나는 잠을 자고 있었다. 정확히는…잠들기 위해 눈을 감고 있었다.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붙잡으면서.
‘역시…잠이 안 오네.’
마지막 날이어서 그런가. 그래도 회귀 전에 5년, 그리고 회귀 후에 보낸 시간들까지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그런 곳을 완전히 떠나는 마지막 밤이 아무렇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 나는 눈을 뜨지도 일어나지도 않았다. 그래서 방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는 소리도 내게 다가오는 작은 발소리도 모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계속 자고 있는 척을 했다. 여기서 일어나서 어떤 얼굴을 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으니까.
“에일린….”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속삭이듯이 들렸다. 헤레이스의 목소리였다. 나는 순간 움찔했지만,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있었다. 그때 헤레이스가 나지막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잘 자네요. 앞으로도 괴로워하지 말고 편하게 자야 합니다.”
헤레이스는 익숙하게 말을 이어 갔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처럼 혼잣말처럼 내게 계속 말을 걸고 있었다.
‘그때마다 헤레이스였던 건가.’
뒤늦게 깨달았다. 이전에 몇 번이나 꿈결에 옆에서 내가 자고 있는 걸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자고 일어나면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지독한 천둥 번개에 잠들기 전에 고생을 한 날에도. 회귀 전에 내가 지독한 감기에 걸렸다가 낫게 된 날에도.
‘당연히 에밀이라고 생각했었는데…헤레이스였었구나.’
헤레이스는 침대 맡에 앉아서 내게 계속 속삭였다. 마치 자장가처럼. 하지만 내가 듣고 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라도 내가 깰까 봐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벌써…내일입니다.”
순간 헤레이스가 내 손을 잡는 게 느껴졌다. 나는 혹시라도 몸이 굳을까 봐 조심했다.
“아직도 붙잡고 싶지만…가지 않았으면 하지만…….”
헤레이스는 잠시 말이 없었다. 순간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왠지 지금 눈을 뜨면 그대로 눈이 마주칠 것 같아서.
“에일린…많이 그리울 겁니다.”
내 손을 붙잡고 있는 그의 손 위에 뭔가가 닿는 게 느껴졌다. 그의 얼굴 같은데, 그게 이마인지 입술인지 알 수 없었다.
천천히 헤레이스의 얼굴이 떨어지고, 그가 내 손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한참이나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보지 않아도 그 시선만큼은 분명히 알 것 같았다. 아마 이전에도 몇 번이나 이랬었던 것 같았다.
나는 이전에는 한 번도 듣지 못했던 그의 속내를 잠든 척 가만히 들었다.
헤레이스의 존재 때문에 잠들지 못할 줄 알았는데…정신을 차려 보니 아침이 되어 있었다. 다시 이어지기 시작한 그의 혼잣말을 듣다가 어느새 잠들어 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내가 공작가를 떠나고 황궁으로 향하는 날이었다.
나는 이른 아침에 출발하기로 했다. 대부분의 짐은 버리고 중요한 것들만 챙겼다. 황궁 마차가 도착하고 떠나려고 하는데,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헤레이스가 내가 가는 길을 마중하기 위해 나왔다.
“조심히 가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마차를 타려고 하는데, 헤레이스가 갑자기 붙잡았다.
“부인.”
내가 돌아서 헤레이스를 보았다. 떠나기 전, 그에게 꼭 해야 하는 말이었다. 더 이상 그가 착각하지 않도록.
“저는 더 이상 공작님의 부인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