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화. 12장. 하지만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5)
내 말에 헤레이스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하지만 곧 다시 나를 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헤레이스의 입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그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기분이 상한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그가 미소를 짓자, 당황한 것은 나였다. 대체 왜 웃는 거지? 그의 얼굴을 살피고 있다 보니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의 눈꼬리가 아래로 늘어졌다. 그는 이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저는 부인이 좋습니다.”
갑작스러운 고백이었다. 헤레이스는 뻔뻔하게 말했다.
‘지금 이게 무슨.’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뭔가 쿵, 하고 떨어졌다. 그런데 이것은 설렘이 아니었다. 분노도 아니었다. 당황스러움이었다. 지금까지 우리 두 사람 간에 흐르던 팽팽한 긴장감이 허무하게 툭 끊어졌다.
“저희는 이미 이혼했어요.”
헤레이스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게 묘하게 나를 압박했다.
“하지만, 이혼은 해도 제가 부인을 좋아하는 건 변함없을 겁니다.”
“…….”
“조심히 가세요.”
그의 말과 웃음은 다음을 기약하고 있었다. 왜 이혼하는데 그는 미래를 얘기하고. 그러면서 웃고 있는 거지?
“재밌네요.”
내 말에 헤레이스가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나를 보았다.
“결혼할 때는 싫다는 공작님한테 제가 끈질기게 매달렸는데, 이혼할 때는 그 반대가 됐네요.”
하지만 그것 역시 이제 끝이었다. 이제 헤레이스와 나는 남보다 더 못한 사이고, 우연히 스친 인연보다 더 먼 관계가 됐다.
나는 마차를 탔다. 마차는 망설임 없이 황궁으로 향했다.
13장. 돌아온 황녀 (1)
황녀 에일린이 황궁으로 돌아왔다.
이 소식에 제국이 또 한 번 발칵 뒤집혔다. 어쩐지 최근 들어 제국을 시끄럽게 하는 소문은 전부 나와 연관되어 있는 것 같았다.
제국에서 이혼은 불명예스러운 것이었다. 그게 황녀라고 해서 해당 되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과거에도 타국 왕비로 결혼을 했던 황녀가 이혼을 하고 돌아온 후, 사람들의 시선에 숨어 살다시피 했던 것이 기록에도 남아 있었다.
사실 이혼을 결정했을 때, 어느 정도의 결심은 했었다. 한동안 사람들의 안 좋은 시선과 말이 따라다닐 것이다. 그건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니, 도망갈 생각 따위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나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황궁에서만큼은 만나는 모든 사람이 축복해 주었다. 가장 먼저 축복해 준 것은 나와 함께 황궁으로 돌아온 에밀이었다.
“어서 오세요. 아기씨.”
또한, 그녀를 비롯한 나를 모시던 시녀들이 모두 내게 축복과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황궁으로 돌아오니 모든 게 좋았다. 그래. 다 좋았다. 다 좋은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황궁에 돌아온 후부터 아직까지 루이스를 한 번도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바빠서 그런 거겠지.’라고 생각했다. 조금 지나서는 ‘서로 시간이 안 맞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건 아니잖아!”
좀 너무한 거 아닌가. 언제는 그런 감동적인 편지까지 보냈으면서 오랜만에 돌아온 누이에게 얼굴 한번 보여 주지도 않다니.
내가 찾아갈 때면 루이스는 때마침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내가 황궁으로 돌아온 지가 언제인데 아직까지도 만나지 못하다니. 이제는 나를 피하고 있다는 확신마저 들었다.
문제는 하나 더 있었다.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던 후폭풍이 내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건 내가 아무리 황녀라고 해서 전부 피해 갈 수는 없었다.
말 많고 호기심 많은 모기 같은 귀족들을 상대해야만 했다. 역시나 그들은 쓸데없는 이유로 과할 정도로 화려한 연회를 주최했다. 조금이라도 더 화려하게 포장해서 내 눈에 띄려고 하는 거겠지. 그들이 보낸 모든 초대장이 내 앞으로 와 있었다.
“후…….”
웬만해서는 참석하고 싶지 않은데. 그러면 내가 참석할 때까지 이 짓이 계속될 것이다. 그러면 거절하느라 괜히 머리만 아프고, 참석은 참석대로 해야 한다.
적당한 곳으로 골라 가야지. 연회 초대장을 훑어보는데,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올리비아…?”
수많은 초대장 속에 올리비아의 초대장이 있었다. 그녀의 초대장을 살피려고 할 때였다. 이번에는 초대장이 아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파티에 와.”
올리비아가 찾아왔다. 그 뒤에는 문을 닫고 있는 에밀이 보였다.
“제발 시녀들이 먼저 고할 틈은 주고 들어와.”
“미안, 내 이름이 들려서.”
“하여간.”
못 말리는 올리비아를 보며 피식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건데도 올리비아는 한결같았다. 그래서 더 반가웠다. 올리비아가 말을 이었다.
“내가 주최하는 연회에 와. 그게 가장 나을 거야.”
내 상황을 모두 알고 있었는지 올리비아가 이미 발 빠르게 움직인 것이었다.
“지겨운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오는 내 친구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즐거우니까.”
“그래. 돌아온 황녀가 처음으로 참석하는 연회의 주인공이 될 영광을 주지.”
“황공하옵니다. 전하.”
내 장난기 가득한 말에 올리비아가 맞장구를 쳤다. 결국, 웃음이 터졌다.
확실히 가야 한다면 올리비아가 주최하는 연회가 좋았다. 그녀만큼 믿을 수 있는 영애가 없었다. 그녀가 주최하는 연회라면, 곤란한 상황에서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참. 문제는 연회가 내일이야.”
“그걸 왜 이제야 말해!”
올리비아가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초대장 보냈으니까 당연히 확인한 줄 알았거든.”
“뭐?!”
“그래도 내일 꼭 와.”
내게 초대장이 어마어마하게 오고 있다는 것도, 그걸 일일이 확인하지 않는다는 것도, 올리비아가 모르지 않았다.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오늘에야 찾아와서 말한 것이다.
‘내일 가 보면 알겠지.’
내가 결국 헛웃음을 지었다. 올리비아의 말대로 연회는 바로 내일, 뉴튼 백작가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니까.
* * *
뉴튼 백작가에서 주최하는 연회에 참석했다.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출발하기 전 루이스를 찾아가 봤지만, 오늘도 역시 그를 만나지 못했다. 게다가 어제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오늘따라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다. 컨디션이 나쁘니 왠지 몸은 삐걱거리고 갑자기 긴장이 됐다.
그래도 일단 얼굴 근육을 최대한 당겨서 활짝 웃었다. 이러다 얼굴에 경련이 일어나겠다 싶을 만큼. 오늘 이 모습 그대로 유지해야 할 텐데. 왠지 걱정됐다.
뉴튼 백작가의 연회에서 올리비아는 단연 독보적인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올리비아가 예를 갖춰서 인사했다.
“자리를 빛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이런 자리일수록 가장 빛났다. 가면을 쓴 것처럼 완벽하게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올리비아가 황후가 되면 잘 어울릴 텐데.’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는 자세. 모두의 앞에서 가장 빛나는 태도. 강단 있는 성격에 제국 내 황제에게 기죽지 않는 유일한 사람. 모든 조건에 들어맞는다.
‘하지만 그림의 떡이니까.’
올리비아는 결혼하지 않는다. 올리비아는 나의 절대적인 친구였다. 그러니 그녀가 원하지 않는다면 강요할 수 없었다.
올리비아가 내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 나만 믿어.”
내가 미소를 짓자, 올리비아가 눈을 찡긋거렸다.
“너도 걱정하지 마. 나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
내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자, 올리비아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했다. 그녀는 연회의 주인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
홀 안을 둘러보는데, 왠지 분위기가 묘했다. 연회는 보통 시끌벅적했다. 그런데 지금 홀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오늘따라 조용했다.
‘뭐지, 왜 이렇게 조용하지?’
주위를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뭐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내 주위를 맴돌면서 다가오지는 않는달까.
내가 오는 이 시간을 오매불망 기다렸을 사람들이 왜 저러는 거지? 알 수 없는 긴장감만 맴돌고 있었다. 그때였다.
“헤레이스 공작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문지기의 보고와 함께 헤레이스가 들어왔다. 순간 장내가 술렁였다. 이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나와 헤레이스가 한 공간에 있게 되었다.
나는 최대한 그와 마주치지 말자고 생각했지만, 정작 헤레이스는 나를 발견하더니 망설임 없이 다가왔다. 내가 그를 피할 틈도 없이 곧바로.
“에일린.”
헤레이스는 자연스럽게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여긴 어쩐 일입니까.”
“그대가 연회에 참석한다고 해서요.”
내가 연회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올리비아를 흘깃 바라보았다. 혹시 올리비아가 숨긴 게 이거였나.
하지만 올리비아도 헤레이스의 등장에 깜짝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도 몰랐던 것처럼.
“이제 그대를 보려면 이런 곳밖에 없지 않습니까.”
헤레이스는 노골적으로 나를 보러 왔다며 말했다. 전혀 숨길 생각이 없다는 듯이.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나는 그런 헤레이스를 무시하고 그대로 돌아섰다. 나와 헤레이스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다른 사람들의 시선 역시 짙어졌다.
연회가 진행될수록 영애들이 헤레이스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나와 이혼한 후, 헤레이스에게 접근하는 영애들이 많아졌다.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반역 사건으로 공작가와 헤레이스 모두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반역을 막은 일등 공신에, 이제는 사업이 모두 자리를 잡아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무너질 것 같았던 가문이 단순히 재기한 것뿐 아니라 제국 최고의 가문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나와 이혼으로 인해 혼자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헤레이스에게 이혼 여부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혼자라는 사실에 기회라고 여기며 접근할 뿐.
“공작님.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거예요?”
하지만 그런 영애들을 헤레이스는 언제나 정중하게 거절했다. 단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겠다는 듯이. 헤레이스는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항상 똑같은 말을 했다. 그 말이 내 귀에 들어오지 않을 리가 없었다.
“저는 에일린을 기다릴 겁니다. 받아 주지 않는다고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