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화. 13장. 돌아온 황녀 (2)
헤레이스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내가 듣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래도 기다릴 겁니다.”
헤레이스는 그 말을 지키려는 것처럼 그 어떤 만남도 스캔들도 없었다. 오로지 가문의 일에 열중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대로 돌아섰다. 헤레이스의 말에 미련 따위 남기지 않기 위해서.
“정말 신경 안 쓰여?”
올리비아가 물었지만,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응. 전혀.”
그리고 보란 듯이 외면했다.
헤레이스는 계속 나에게 알리고 싶어 했다. 여전히 자신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언제까지나 기다릴 것이라고. 하지만 그럴 거라면 굳이 이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와 헤레이스의 관계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끝났다.
연회는 점점 묘한 분위기가 되어 갔다. 나와 헤레이스가 함께 있는 것부터 시작해서 영애들이 헤레이스에게 아무리 다가가도 그가 한결같이 나를 기다린다며 모두 거절하는 것까지. 이 상황이 몇 번 반복되다 보니 어느새 연회는 썰렁해졌다.
‘괜히 왔나.’
그래도 한 번은 연회에 참석해서 얼굴을 비쳐야 해서 온 것인데. 아무래도 이번 연회는 망한 것 같았다.
‘뭐, 어쩔 수 없지.’
이혼을 할 때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쯤은 어느 정도 각오한 것이었으니까. 나는 적당히 있다가 돌아가기로 했다.
그때였다. 역시나 눈치 없고 철없고 생각 없는 영애가 내게 다가왔다. 과거에는 그레이스 곁에서 수발을 들던 또 다른 백작가의 헤이즐 영애였다. 헤이즐 영애가 예를 갖춰 인사했다.
“황녀 전하를 이곳에서 뵐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오랜만이네요.”
과연 그녀가 뭐라고 말을 시작할까 기대하며 기다렸다. 주위에서 이쪽으로 신경이 곤두서 있는 게 느껴졌다. 그녀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황녀 전하. 오랜만에 뵈어서 그런지 더 아름다워지셨습니다.”
그녀는 일단 한껏 낮은 자세를 취하며 접근해 오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슬쩍 미소를 흘렸다. 그러다 그녀의 뒤에 있는 올리비아와 눈이 마주쳤다. 올리비아가 눈에 불을 켜며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내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올리비아가 멈칫했다. 내가 단호한 얼굴로 올리비아를 보자, 그녀가 마지못해 멈춰 섰다. 그리고 멀찍이 떨어져 있는 거리를 유지한 채 헤이즐이 내게 무슨 짓이라도 하지 않을까 지켜봤다.
아무래도 헤레이스 때문에 사람들에게 보이는 내 이미지가 굉장히 약해져 있나 보다. 고작 이 정도도 내가 어쩌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다니.
나는 다시 헤이즐 영애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왠지 즐거워 보였다. 나는 우선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좀 더 받아 주기로 했다. 그녀는 곧 미끼를 덥석 물 것 같았다
“헤이즐 영애도 보기 좋네요.”
“제가 감히 황녀 전하와 견줄 수 있나요. 황녀 전하. 그래도 최근에 힘드시……,”
“헤이즐.”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리고 있는데, 그녀의 말을 가로막으며 대화에 끼어든 사람이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 케인 백작이었다.
“…아버지?”
갑자기 나타난 케인 백작의 존재에 당황한 것은 내가 아니라 헤이즐이었다. 백작은 어디서 달려오기라도 한 것처럼 호흡이 불안정하고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냐.”
“…황녀 전하와 인사를…….”
하지만 케인 백작은 헤이즐의 대답 따위 기다리지도 않은 채, 그녀의 팔목을 붙잡고 끌고 가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찾는다. 어서 가자.”
연회에서 백작 부인이 헤이즐을 찾는다니. 어떻게 봐도 거짓말이었다. 케인 백작의 부인은 저쪽에서 이 상황을 알지도 못하는 것처럼 웃으며 신나게 대화 중이었다.
하지만 케인 백작은 이미 헤이즐을 데리고 연회장 밖으로 사라져 버린 후였다. 주위에 몇몇이 헛기침을 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헤이즐 영애 이후에는 아무도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렇게 수많은 초대장을 보낸 사람들이 인제 와서 아무 관심이 없다니 이상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왔는데 아무 반응도 없으니, 오히려 맥이 빠졌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을 때까지도 내게 와서 이혼에 대해 묻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올리비아를 불렀다.
“올리비아.”
이곳에 더 있어 봤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일찍 돌아가고 싶었다.
“나 먼저 갈……,”
“어디 가게?”
나는 하던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내 말을 가로막은 상대방의 그림자가 내 머리 위로 짙게 꼈다. 돌아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루이스였다. 내가 휙 돌아보자 루이스가 나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기분 좋은 얼굴로 올라간 입꼬리가 시원해 보였다. 그게 순간 얄미웠다. 나도 모르게 루이스를 노려보았다.
‘지금까지 보이지도 않았으면서. 갑자기 나타나서 여유로운 얼굴로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니. 너무하잖아!’
내 마음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루이스가 내 얼굴을 빤히 보더니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내 얼굴을 덮칠 것처럼 짙은 그림자를 만들며 점점 더 가까워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피할 틈을 주지 않고 다가온 손은 내 얼굴을 덮치더니 양 볼을 꾹- 눌렀다.
“얼굴 펴.”
“이어 우어 아어여.”
이거부터 놔 달라고 발버둥 쳤지만, 소용없었다. 입술만 더 튀어나올 뿐이었다. 여전히 내 양 볼을 누른 채 루이스가 말을 이어 나갔다.
“그동안 바빴어. 앞으로는 괜한 말로 신경 거슬리게 하는 놈들은 없을 거다.”
“으에 무으 마이에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정체불명의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루이스는 내 말을 정확하게 이해했다.
“괜한 일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니까.”
“?”
“이제 이런 데 안 와도 된다는 거다.”
‘이런 데’는 연회를 말하는 것이었다.
루이스는 할 말을 다하자마자 내 양 볼을 가지고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세게 눌렀다가 양손으로 볼을 쭉 잡아당겼다가를 반복하며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큭큭…….’ 하는 웃음소리가 귀에 정확하게 꽂혔다.
“……오아어오.”
“뭐라고?”
지금까지 괴상한 내 말을 이해하던 루이스가 이번에는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일부러 못 알아듣는 척하는 거 아냐?’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고분고분하게 다시 말했다.
“오아아오오!”
내가 계속 정체를 알 수 없는 말을 하자, 루이스가 내 양 볼을 해방시켜 줬다.
“다시 말해 봐.”
아무래도 일부러 이러는 것 같다. 이미 두 번이나 말했는데 말하지 말까. 루이스를 보면서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순순히 다시 말해 주었다.
“고마워요.”
무슨 수를 쓴 건지는 모르지만, 그동안 루이스가 보이지 않은 결과가 곧 이 연회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게 관심을 기울이지만 접근하지 않고 눈치만 보고 있는 귀족들. 그들의 이상한 태도와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나의 이혼에 대해 언급하지 않도록, 그래서 내가 괜한 상처를 받지 않도록 하느라 그동안 보이지 않은 것이다.
이번에는 루이스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루이스가 피식, 웃고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며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리고 활짝 웃어 주었다.
“어서 와라.”
주위에 있던 귀족들의 탄성이 들렸다. 루이스의 이런 미소는 정말이지 보기 힘든 보물 같은 거니까. 그들이 놀라면서도 감탄하는 것은 당연했다.
“다녀왔어요.”
나는 그대로 루이스의 품에 안겼다. 귀족들의 시선이 조금 신경 쓰이긴 했지만, 지금은 반가움이 더 컸다. 오늘은 이제껏 참석했던 그 어떤 연회보다 가장 행복했다.
모든 것이 끝나고 사실 허전한 마음이 생겼었다. 하지만 루이스와 올리비아의 따뜻한 환영 덕분에 정말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마음을 졸이며 걱정했던 문제들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끝났다는 사실이 믿어졌다.
회귀 전에는 내가 억지로 이어진 관계였다. 회귀한 뒤에도 헤레이스와 결혼한 상황이었다. 결국, 회귀해서 과거로 돌아왔는데도 불구하고 그와의 인연인지 악연인지 알 수 없는 관계는 위태롭게 유지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로 나와 헤레이스 사이에 있는 모든 관계가 끊어졌다. 더 이상 그와 엮일 일은 없을 것이다.
* * *
이번에는 황궁으로 돌아온 기념으로 루이스와 올리비아와 함께 나들이를 가기로 했다. 에밀과 나는 주말 나들이를 위해 꼼꼼하게 준비했다. 개인적으로는 루이스와 올리비아를 위해서 직접 나들이 도시락을 쌀 계획이었다.
하지만 내가 확인하고 준비해야 할 건 그런 사소한 문제뿐만이 아니었다. 우선 나들이 계획 전반에 대해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은 시종장이었다. 루이스를 언제나 곁에서 지켜보고 그의 명령을 전달하는 존재. 내가 찾은 이유를 짐작하는지, 시종장은 침착했다.
“찾으셨습니까.”
“나들이 계획은 어느 정도 잘 되고 있는가.”
“신경 써 주신 덕분에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습니다.”
인사치레는 이 정도면 됐지. 나는 더 이상 질질 끌지 않고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그래서.”
시종장의 얼굴을 쑥 훑어보며 다음 말을 이어 갔다.
“나들이 장소는 어디로 생각하고 있지?”
“멀지 않은 곳에 호숫가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근처에 공원도 있어서 나들이를 하시기에 불편함이 없을 것입니다.”
시종장이 얘기하는 곳이 어디인지 안다. 그곳은 분명 나들이를 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다만, 일반 사람들에게 그렇다는 말이었다.
루이스가 가기에 그곳은 위험했다. 사방이 뚫려 있어서 보안을 유지하기에도, 호위를 하기에도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곳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었다. 아름다운 경치에 공원에 있으면 호수가 보이고 호숫가에 있으면 아름답게 조성된 공원이 보였다.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가족들의 나들이 장소로도 사랑받는 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