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화. 14장.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고 있었다 (1)
나들이가 한창이었다. 루이스와 올리비아는 나무 밑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나는 공원 한편에 피어 있는 들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보고 에밀과 함께 그곳에서 들꽃을 꺾었다.
“어떻게 만드는 거라고?”
“여기 이 줄기 부분을 엮어서 서로 연결하면 됩니다.”
우리는 들꽃을 엮어서 팔찌를 만들기 시작했다.
꽃으로 만든 팔찌는 제국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꽃으로 엮은 팔찌를 선물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일종의 행위였다. 그래서 제국의 웬만한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꽃으로 팔찌나 반지를 잘 만들었다.
그런데 아무리 시도를 해도 에밀은 쉽게 만드는데 나는 계속 엉키기만 했다.
“앗.”
줄기에 있는 뾰족한 부분에 찔리기나 하고. 손에 상처가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었다. 그 모습을 한심하게 보던 에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기씨.”
“…….”
“그냥 제가 해 드리면 안 될까요.”
끈질기다 싶을 정도로 인내심을 가지고 알려 주던 에밀도 이제는 안 되겠는지, 내 손에 있는 들꽃을 가져갔다.
겨우 머리 화환 모양을 다 만들었다. 루이스와 올리비아에게 가려고 돌아서는데, 자세히 보니 루이스는 낮잠을 자고 있는지 나무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루이스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는데 가까워지니 루이스에게 가려져 보이지 않던 올리비아가 보였다. 정확히는 올리비아의 얼굴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역시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는 올리비아의 얼굴이 앞으로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으며 앞으로 넘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깜박 잠이 든 것 같았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500년이 넘었다고 하는 오래된 나무는 큰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 아래 낮잠을 자고 있는 루이스와 올리비아의 모습은 평화로워 보였다.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저러다 넘어지겠네.”
하지만 올리비아는 곧 앞으로 넘어질 것 같았다. 그래 봤자 잔디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얼굴에 풀이 묻고 옷이 더러워질 것이다.
내가 서둘러 가서 올리비아의 고개를 잡아 주려고 할 때였다. 계속 눈을 감고 있어서 당연히 잠들어 있는 줄 알았던 루이스가 앞으로 왼손을 뻗어 넘어지려고 하는 올리비아의 이마를 살짝 잡아 주었다. 그러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오른손으로 올리비아의 머리를 살짝 오른쪽으로 밀었다. 올리비아의 오른쪽에는 루이스의 어깨가 있었다.
이게 뭐지? 루이스가 올리비아를 배려해 주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당황했다.
내가 어릴 때부터 올리비아와 함께였다. 그러다 보니 올리비아와 루이스의 사이 역시 친밀했다. 그러니 루이스가 올리비아를 신경 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왠지 다가가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인데.’
나는 왠지 두 사람이 있는 곳에 다가가지 못하고 멀찌감치 떨어져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다가가서 두 사람을 깨우거나 아니면 옆에 앉아서 쉬면 되는 일인데. 지금 나무 밑에 가면 두 사람을 방해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결국, 나는 에밀과 함께 두 사람이 있는 나무와는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루이스와 올리비아는 그렇게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도중에 비가 와서 급하게 돌아갈 때까지.
‘설마…?’
지금 내 머릿속에 스쳐 간 생각은 분명 망상이다.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고 지나칠 수는 없었다.
* * *
나무 아래에는 올리비아와 루이스가 단둘이 있었다. 올리비아는 자신의 이마를 받쳐 주고 있는 손을 붙잡아 그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으며 자신 쪽으로 잡아당겼다. 맹세컨대 잠결에 벌어진 일이었다. 도대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올리비아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잠결에 이마에 닿은 뭔가가 굉장히 기분 좋다는 것 외엔.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잡아당긴 것의 정체를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잠결이어도 순간적으로 온몸을 덮친 이질감에 이게 현실이라는 사실을 알 수밖에 없었다.
왠지 불안한 기분에 손끝이 떨렸다. 올리비아는 여전히 잠든 척하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반대편 손으로 떨리는 손을 붙잡았다. 자신이 잡아당긴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할 자신이 들지 않아서 최선을 다해 억지로 눈을 감고 있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고 있지만…일말의 희망을 붙잡은 채.
“…지금 뭐 하는 거지.”
하지만 역시나 루이스였다. 루이스의 목소리가 올리비아의 귓가에 울렸다.
올리비아가 조심스럽게 살짝 눈을 떴다. 긴장해서 주위를 신경 쓸 수 없었다. 오로지 자신을 보고 있는 시선을 눈치 보며 확인할 뿐이었다.
절대 눈을 마주치지 말자고 생각했지만, 이미 루이스가 올리비아를 빤히 보고 있었다.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올리비아가 깜짝 놀라 허둥거리며 일어났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올리비아는 가능하다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세상에서 없어지고 싶었다.
“그, 그게…….”
올리비아의 눈동자가 갈 길을 잃었다. 어떡하지,
“꾸, 꿈을 꿔서…! …꿈이 무슨 내용이냐면…그게…….”
올리비아는 눈에 띄게 당황해했다. 하지만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는지 계속 말을 더듬었다.
그때였다. 한줄기 구세주처럼 올리비아의 콧등 위로 빗방울이 톡, 떨어졌다.
“어…? 비가 오는 것 같은데…?”
올리비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분명 좀 전까지는 파란 하늘이었는데, 어느새 먹구름이 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결국, 한 방울씩 떨어지던 비가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했다.
에일린이 나무 아래로 달려오며 말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멀리 떨어진 채 지키고 있던 시종장이 달려와 말했다.
“어서 황궁으로 돌아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루이스가 올리비아를 지나치며 작게 속삭였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지.”
순간 올리비아는 그래도 굳어 버렸다. 나중이라니…언제지? 올리비아는 이미 앞서가고 있는 루이스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에일린이 올리비아를 보며 말했다.
“뭐해? 안 가고?”
모두 마차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데 올리비이만 멍한 얼굴을 하고 그대로였다.
“아…가야지.”
올리비아는 뒤늦게 마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나들이 도중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비 때문에 나들이는 급하게 마무리되었다.
‘살았다…….’
루이스가 나중이라는 얘기를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은 모면할 수 있었으니까. 올리비아는 황궁으로 돌아가면서 지금 이 순간에 내린 비에게 정말로 감사했다.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올리비아는 분명 그 상황에서 패닉이 와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 * *
나들이 후유증은 엄청났다. 갑자기 내리는 많은 양의 비 때문에 루이스를 제외한 나와 올리비아는 혹독한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예정보다 늦은 환궁에 율레스 재상의 분노는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피곤하다며 쉬겠다는 루이스를 겨우 설득해 집무실에 들여 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올리비아와 후원에서 산책 중이었다. 여느 날처럼 평범하게 걷고 있었는데 올리비아가 갑자기 진로를 이탈했다.
“올리비아, 어디가?”
“그, 그게 이번에는 이쪽으로 가는 게 어때? 여기 꽃들 좀 봐. 너무 예쁘다!”
“그거 잡초잖아.”
다른 꽃과 착각하기도 힘들 정도로 누가 봐도 잡초였다. 그걸 올리비아가 모를 리는 없었다.
“…그럼 어때! 예쁘기만 하면 되지!”
잡초라도 예쁘면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보통 황궁 후원에 잡초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이곳에 있다는 것은 이 길부터는 후원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 앞은 황궁 안에 있는 다듬어지지 않은 숲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눈으로도 뻔히 보이는데 올리비아는 무리한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설마…….’
방금 전까지 우리가 가던 방향을 향해 돌아보았다.
‘역시.’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한 나는 다시 올리비아를 봤다. 그녀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멈춰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 없이 자세를 유지하는 올리비아가 이토록 당황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대체 무슨 일이야.”
“어…? 뭐, 뭐가?”
“무슨 일이 있었는데 폐하를 피해?”
그곳에 있는 사람은 루이스였다.
“내가 언제!”
“아니야?”
“아니야!”
올리비아는 얼굴이 시뻘게진 채 열렬하게 부정했다. 오히려 그 당황한 모습이 올리비아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냈다.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군.”
갑자기 루이스가 뒤에서 나타났다. 부지불식간에 인기척도 없이 짠하고 나타나, 나는 물론이고 올리비아의 정신을 흔들었다. 그녀는 소리를 지를 뻔한 걸 자신의 입을 강하게 틀어막는 것으로 간신히 참았다.
“오랜만이군. 올리비아.”
“폐, 폐하를 뵙습니다.”
올리비아는 당황한 상태를 제대로 감추지도 못한 모습이었다.
“흐음…뵙긴 했는데 썩 기분 좋아 보이지는 않는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폐하를 뵙는 것은 언제나 영광된 일입니다.”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만,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올리비아가 최대한 자연스럽게 응하려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근데 왜 아까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도망쳤지?”
하지만 루이스가 계속 물고 늘어지자 마치 올리비아가 ‘끙’ 하고 골머리를 앓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이미 눈이 마주쳤는데 도망쳤다는 건가. 분명, 올리비아가 갑자기 루이스를 피하기 시작한 것은 나들이 이후였던 것 같은데. 그때부터 올리비아는 루이스를 묘하게 피하기 시작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하지만 올리비아의 태도로 보아서는 쉽게 말해 줄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