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화. 14장.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고 있었다 (7)
황녀궁에서 쉬고 있는데 율레스 재상이 찾아왔다. 갑작스러운 방문이었다.
“율레스 재상께서 찾아왔습니다.”
“재상께서…?”
그와 나는 교류가 있는 편도 아니었다. 율레스 재상이 나를 직접적으로 찾아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 시점에서 그가 일부러 찾아왔다는 것은 아무래도 하나밖에 없었다.
“들어오시라고 해.”
“네.”
율레스 재상이 들어왔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어서 오세요.”
그는 언제나처럼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얼굴 밑으로 누구보다도 깊고 날카로운 통찰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일상적인 대화가 시작되었다. 잘 지내는지, 늙어서 그런지 요즘 거동이 불편하다는 얘기 등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러다 잠깐의 침묵이 둘 사이에 흘렀다. 그 침묵이 어색함으로 흘러가기 직전, 율레스 재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최근 폐하께서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그동안 재상께서 고생하신 것을 폐하께서도 알아주셔야 할 텐데요.”
“허허. 그런 건 바라지도 않습니다. 다만, 덕분에 이 늙은이가 좀 편해지긴 했습니다.”
“다행이네요.”
드디어 나를 찾아온 목적을 꺼낼 줄 알았는데. 율레스 재상은 여전히 여유로운 모습으로 화제를 꺼낼 듯 말 듯했다.
“황녀 전하.”
역시, 이제 본론을 말할 생각인가 보다. 율레스 재상의 얼굴은 정중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폐하의 변화를 반기는 사람이 있는 만큼, 우려하는 사람들도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아니, 들이켰다. 하지만 찻잔을 내려놓는 모습만큼은 누구보다도 자연스럽게 내려놓았다. 입술을 자연스럽게 말아 올렸다.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거부감이 있으니까요.”
율레스 재상이 차분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 말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받아쳤다.
“사람들이 거부 반응을 보이는 것에는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닙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율레스 재상은 지금 내게 경고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내 물음에 율레스 재상이 얕게 숨을 골랐다.
“폐하께서 변하시기 시작한 시점에 대해 사람들이 우려하고 있습니다.”
“…….”
“그동안 강력한 황권으로 모든 것을 잡고 있던 폐하이십니다. 다른 이들은 그것을 반기지 않았지만, 또한 쉽게 무너지는 것을 원하지도 않지요.”
“…그렇군요.”
율레스 재상은 최근 들어 루이스의 행보에 내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걱정했다. 그것으로 인해 루이스가 달라진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것이 계속된다면 결과를 떠나서 사람들의 눈에 좋지 않을 거라는 뜻이었다.
“건방지다고 여겨져도 부디 귀담아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무슨 걱정을 하시는지 충분히 알아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율레스 재상이 입술 끝을 살짝 당겼다. 안도하며 미소를 짓지만,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않는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율레스 재상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내가 입술을 크게 말아 올렸다.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웃었다. 미소를 절제하고 있는 그와 대조적인 웃음이었다.
“하지만…재상께선 폐하를 아직 모르시나 봅니다.”
루이스가 내 의도를 모르고. 내 부탁을 그저 아끼는 여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들어줬을 리 없었다. 그것은 루이스라는 사람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의 착각이었다.
“폐하께서는 원치 않으시는 일은 절대 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것엔 예외가 존재하죠.”
그 예외가 나라는 뜻이었다. 나는 율레스 재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 잘못된 생각이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게 말했다.
“그게 누구의 부탁일지라도 예외는 없습니다.”
또한 사실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심지어 과거에 내가 헤레이스를 위한 부탁을 했을 때마저도 루이스는 스스로의 판단과 의지로 움직였다.
“저는 핑계일 뿐, 모든 것은 폐하께서 원하시는 의도가 있으시기에 하시는 일입니다.”
“…….”
“저는 그저 그럴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할 뿐이지요.”
“계기…말씀입니까.”
율레스 재상이 내 말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그 말을 곱씹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네. 그러니 그 점에 관해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다면 그 의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제가 아니라 폐하께 여쭤야지요.”
“…….”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의 폐하는 전과 다르시니까요.”
율레스 재상이 돌아갔다.
일단 그에게 안심을 주기는 했지만, 확실히 장기적으로 내다봤을 때 나라는 존재는 루이스에게 장애가 될 것이다. 황궁에 있으면서 황제에게 영향을 미치는 인물. 귀족들에게 위기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내가 앞으로 계속 뭔가를 하려고 할 때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겠지.
그래서 더더욱, 그의 곁에 황후가 필요했다. 황후라고 해서 그런 소문에 무조건 자유롭지는 않겠지만 황후와 황녀는 엄연히 달랐다. 황후는 제국의 안주인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해 온 역할을 해야 하는 당연한 존재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의 곁에 황후가 꼭 필요했다.
“에밀. 차 좀 더 줄래?”
“뜨거운 물을 가져오겠습니다.”
율레스 재상이 돌아간 후에도 나는 쉽게 자리를 뜰 수 없었다. 결국, 에밀이 가져와 준 뜨거운 차를 마시며 생각에 빠졌다.
루이스가 이번 일을 하는 것은 아마도 어린 소년, 소녀들을 착취하고 그것을 이용해 부를 축적하는 귀족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한 것일 것이다. 그것을 핑계로 내 꼬임에 넘어간 척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아마…불법으로 노예를 사용하는 가문이 걸린다면.’
그들이 불법으로 착취하고 있는 노예와 노예가 아닌데도 노예 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을 모두 빼앗아 버리겠지. 그런 식으로 귀족들이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 것을 결코 가만 보지 않을 루이스였다.
‘오라버니의 진짜 목적을 올리비아도 짐작하고 있겠지.’
나 역시 루이스의 속내를 눈치챌 수 있었던 계기가 올리비아와 루이스의 대화를 들으면서였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 보니, 루이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갑자기 몸이 부르르 떨렸다. 마치 오한이 도는 것 같았다.
* * *
에일린이 율레스 재상과 만나고 있을 때, 올리비아는 루이스를 독대하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아직 나이가 어린 소년이나 소녀들의 노동을 막는 것은 무리일 것 같습니다. 강제적으로 막으려고 하면 할수록 당장 먹고 사는 게 다급한 집안은 더욱 안 좋은 조건에서라도 일을 시키려 할 것입니다.”
“그래서 방법은?”
“차라리 직접 그들을 고용하는 것입니다.”
루이스는 올리비아의 말을 차분하게 들었다. 다른 귀족들과 회의를 하거나 독대를 할 때는 절대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대신 근무 조건을 엄격하게 정하는 것입니다. 급여를 다른 곳에 비해 높게 책정하되, 악용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관리하는 것입니다.”
“…….”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돈을 많이 주는 곳에서 일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일하기 위해서라도 저희가 정하는 방식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지금 이 사업으로 부릴 아이들이 몇이나 되지? 그 아이들 외에 다른 아이들은 그대로이지 않나. 결국엔 우물 안에 갇혀 있는 규칙이 될 텐데.”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 뒤에 어찌 될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
“단지 운이 좋은 소수의 아이만이 이전과는 달리 조금은 나은 조건에서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전부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이라도 뭔가가 달라지겠지요.”
올리비아의 말은 막힘없이 이어져 나갔다.
“처음으로 쾌적한 상황에서 일한 아이들은 새로운 꿈을 가지게 될지 모릅니다. 일 외에 다른 것을 찾고 상상조차 하지 못한 꿈을 꾸기 시작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아이가 생겨서 자리를 잡고 다른 아이들이 우러러보게 되면, 그 아이들이 먼저 앞서 걸어간 아이의 길을 좇아가겠지요. 그렇게 조금씩이지만 뭔가가 바뀔지도 모릅니다.”
“…….”
“그럴 가능성만으로도 해 볼만 하다고 여기지 않으십니까.”
그렇게 말하는 올리비아는 올곧았다. 루이스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이상적이라고 해야 할지.
올리비아의 말에는 틀린 게 없었다. 모두 맞는 말이었고, 희망이 가득한 말이었다. 하지만 망상에 가까운 말이기도 했다. 그게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언제가 될지 기약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대부분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게 현실이었다.
하지만 올리비아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결국, 루이스의 입술이 오른쪽으로 길게 올라갔다. 누가 보면 비웃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올리비아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기분 좋게 시원하게 올라가는 미소였다. 그것은 허락을 뜻하기도 했다.
그와 관련된 추가 보고까지 마친 후였다. 돌아가려고 하는 올리비아에게 루이스가 차나 한잔 마시고 가라고 했다. 그런데 테이블 위에 차려진 것은 차가 아니라 술이었다.
“맛은 차랑 비슷한 편이다.”
올리비아와 눈이 마주친 루이스가 그러면서 홀짝, 술을 들이켰다. 마치 물이라도 마시는 것 같았다.
술과 루이스를 번갈아 보던 올리비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단단히 각오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흘깃 바라본 루이스가 피식, 미소를 지었다.
한 잔이 두 잔 되고, 세 잔이 열 잔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루이스는 한 잔도 마시지 않은 사람처럼 멀쩡했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아니었다. 얼굴이 잘 익은 과일처럼 붉었고, 팔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채 손바닥으로 얼굴을 지탱했다. 가끔씩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소리가 새어 나오기도 했다.
쿵-! 결국, 엄청난 소리를 내며 올리비아의 얼굴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