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화. 14장.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고 있었다 (8)
잠시 동안의 침묵. 갑자기 올리비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얼굴을 앞으로 길게 뽑았다. 그 앞에는 루이스가 있었다.
올리비아는 루이스를 빤히, 이러다 눈빛만으로도 뚫어질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노골적으로 쳐다보았다.
“폐하, 저를 동반자로 생각해 주세요.”
“…동반자?”
뜬금없는 말이었다. 취해서 아무 말이나 하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취했어도 올리비아의 눈빛과 목소리만큼은 흔들림 없이 올곧았다. 그게 그녀의 진심이라는 것을 다른 의미로 증명했다.
“예, 폐하. 폐하가 가시는 길에 언제나 든든한 조력자가 되고 싶습니다.”
올리비아는 루이스를 좋아했다. 사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도 되지 않을 만큼 오래전부터였다. 아무도 몰래 황후가 되어 루이스의 곁에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했었다. 그런 날이면 달아오른 얼굴이 가라앉지 않아 이불 밖으로 나오지 못하곤 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올리비아는 깨달았다. 자신은 절대 황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루이스는 절대 황후를 두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올리비아는 결심했다. 루이스의 정치적 동반자가 되기로.
루이스는 정신을 차리고 나면 기억하지도 못할 고백을 하고 쓰러진 올리비아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루이스는 올리비아의 고백을 받아 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씁쓸했다.
* * *
사람들은 어째서 지난날의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기억하고 있으면서 모른 척하는 것일까.
루이스의 평판이 좋아지고 그를 흠모하는 영애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사람들이 루이스를 다시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좋은 현상에도 부작용은 나타나는 법이었다. 지금까지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귀족들이 하나둘씩 루이스에게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회귀 전에도 그랬고 이전까지 그래왔듯, 귀족들은 루이스에게 결혼을 종용하지 않았다. 원래라면 오래도록 공석인 황후의 자리를 걱정해서 결혼을 압박하는 것이 당연했다. 황후의 자리가 탐탁지 않다면, 후궁이라도 들이는 게 맞는 일이었다. 하지만 귀족들은 그와 관련한 말은 일절 하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함부로 그 말을 꺼냈다가 자신의 여식을 내놓으라고 할까 봐였다. 그들이 자신의 여식을 아끼고 그녀들의 결혼생활을 우려해서 그 말을 두려워한 것은 아니었다. 루이스의 전적으로 볼 때, 괜히 가족으로 엮이게 되면 황후나 후궁이 되어 갖게 되는 입지보다 루이스에게 눈에 잘못 들어 가문 자체가 위험에 빠질 확률이 더 높았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고 판단한 거겠지.’
최근 들어 루이스는 단 한 번도 폭주하지 않았다. 그는 나른한 모습으로 모두를 방심하게 만들었다가 전조 현상 없이 갑자기 폭주한 전력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위험이 많이 사라졌다. 그건 귀족들뿐만 아니라 내가 보기에도 그랬다.
게다가 자신들의 여식이 과거와는 다르게 루이스와 결혼하기 바란다는 것이 가장 큰 변화였을 것이다.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황후의 자리는 매력적이었으니까. 게다가 자신의 여식이 그것을 원한다면, 그들은 계산 끝에 한번 해 볼 만한 도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아무리 달라졌다고 해도 귀족들의 압박에 흔들려 결혼할 루이스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심기를 건드리면 모를까.
이번 회의에 귀족들이 내게 참석을 요청한 것은 아마 결혼에 관한 안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결혼에 가장 큰 의지가 있는 사람이 나라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었으니까. 정치적인 대립을 떠나 이번 사안에 관해서만큼은 자신들의 방패 역할을 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겠지.
“…결혼이라.”
루이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왠지 불안해졌다. 루이스가 흔쾌히 대답했다.
“어디 한번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까.”
입술에는 웃음기마저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귀족들은 눈치채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루이스의 웃음은 음흉함으로 가득했다.
불안하다. 불안해. 나는 다른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아주 작게 고개를 저었다.
루이스의 불길한 기운은 나에게만 느껴졌는지, 루이스의 긍정적인 생각이라는 말에 귀족들은 이미 황후 책봉이 결정되기라도 한 것 마냥 들떠 보였다.
회의가 끝나기 전, 루이스는 인심 쓴다는 듯이 “생각하는 영애가 있으면 추천해 보든가.”라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꺼냈다.
귀족들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괜찮은 영애가 있는지. 그 영애가 혹시 자신의 여식이지는 않을지.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 * *
올리비아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다르지 않은 게 당연하긴 하지만, 오늘 회의에서 나왔던 내용을 올리비아가 모를 리 없었다. 시선을 두지 않으려고 해도 나는 어느새 올리비아의 안색을 살피게 되었다.
올리비아와 루이스는 기대 이상으로 잘 맞았다. 게다가 뉴튼 백작가의 사업은 순항 중이었다. 특히, 과거 루이스가 도와주었던 소녀의 소문 덕분에 사람들도 이번 사업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분명 루이스도 이전보다 올리비아에게 마음을 더 열게 되었다. 그건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다정한 연인보다는 합이 잘 맞는 비즈니스 파트너 같아 보였다. 실제로 두 사람은 서로를 믿는 동업자이기도 했지만.
그때, 하녀 한 명이 눈치를 보며 나를 불렀다.
“황녀 전하…….”
뭔가 곤란한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지.”
“선물이 들어왔는데 어찌할까요.”
순간 살짝 어처구니가 없었다. 선물이 오면 일단 옆방에 보관해 두었다가 나중에 알리면 되는 일이었다. 이렇게 어쩔 줄 몰라 하며 달려와 물어볼 일이 아니었다.
“그게…선물이 좀 많아서요….”
“…얼마나 많길래?”
“옆방에 다 들어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나와서 본 선물의 양은 하녀가 당황할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다. 그곳에는 이미 질린 얼굴을 한 에밀이 진두지휘하면서 정리하고 있었다.
“이건 옆방으로!”
“이건 어찌할까요?”
“그렇게 부피가 큰 건 일단 창고에 넣어 둬.”
“네. 알겠습니다.”
에밀의 지시하에 하녀들이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어느새 올리비아도 나와서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
“뇌물인가 보네.”
“?”
올리비아가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폐하의 하나뿐인 여동생에게 잘 보이기 위한 영애들의 노력이겠지.”
역시. 전부 알고 있었다. 루이스의 발언-내가 보기엔 충분히 악의적인 뜻이었지만-도 지금 이 선물의 정체도.
“이 선물은 여기에 둘까요?”
에밀이 신경질적인 말투로 물었다.
“이건 또 어디서 온 거지?”
선물을 가져온 자가 에밀의 기세에 눌려서 더듬거리며 대답하는 게 보였다. 그나저나 선물이 지나치게 많았다. 어느 정도 수습하지 않으면, 나중에 감당하기 힘들지도 모를 것 같았다.
“뭐가 많군.”
그때,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이 사단의 원흉인 루이스였다. 그는 내 궁전에 넘쳐나는 선물을 쭉 훑은 뒤 나를 보았다. 그리고 올리비아를 보았다.
“맘에 드는 거 있으면 가져가.”
올리비아에게 하는 말이었다.
순간 나는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나에게 온 선물을 무시하더라도, 이 선물이 누구 때문에 온 건데! 보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이 엄청난 선물들은 모두 루이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내게 보낸 영애들의 선물이었다. 근데 그걸 올리비아에게 마음에 들면 가져가라고 하다니. 정말 보자 보자 하니까!
내가 눈을 희번덕이며 루이스를 보는 순간, 씨익 루이스가 웃었다. 그대로 눈이 마주쳐 버렸다.
“어차피 보낸 거니 어떻게 쓰든 우리 마음이지. 안 그래?”
왜 갑자기 나타나서. 마음대로 ‘우리’가 된 걸까.
루이스의 뻔뻔한 표정, 여유로운 태도. 지금 이곳이 난장판(?)이라는 것을 알고 일부러 찾아온 것이다. 그게 분명했다.
올리비아가 불쑥 말했다.
“에일린, 여기 선물들 처리하는 게 고민되면 방금 좋은 생각이 났는데. 들어 볼래?”
“…?”
“이번에 자선 파티를 할 건데, 거기에 기부하는 게 어때?”
“기부?”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올리비아의 말에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거 괜찮군.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고.”
올리비아의 제안을 넙죽 받아들인 것은 내가 아니라 루이스였다.
올리비아가 말한 자선 파티란, 비정기적으로 열리는 귀족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실천이었다. 사실 보여 주기 식에 불과했지만. 그곳에 자신들이 선물한 물건들이 나와 있는 것을 보게 된다면, 그들이 어떤 얼굴을 할지 눈에 선했다.
확언할 수 있다. 루이스는 지금 이 상황을 모두 즐기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아뇨. 이건 모두 돌려보낼 겁니다.”
“?”
루이스가 시험하듯이 나를 떠보았다.
“어째서? 이렇게 많이 들어왔는데.”
올리비아 역시 돌려보낼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런 루이스를 보았다.
“어떤 선물도 받지 않을 겁니다. 에밀, 이 선물들 모두 밖으로 꺼내 줘.”
내 한마디에 하녀들이 경악하는 게 보였다. 겨우 옮긴 선물들이었다. 그것들을 다시 꺼내는 것은 처음 했던 것에 2배는 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에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하녀들을 다독이며 신속하게 짐을 다시 밖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루이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 저거다. 내가 선물들을 돌려보내는 건 루이스에게서 흔히 볼 수 없는 날 선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하겠지만. 올리비아마저도.
하지만 나는 분명히 느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화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