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화. 14장.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고 있었다 (9)
“올리비아, 오늘 내게 볼 일이 있나?”
이곳은 황녀궁이었다. 올리비아는 나를 찾아와 함께 있었던 것이고, 루이스 역시 이곳에 찾아온 것이었다. 그러니 올리비아가 볼일이 있다면, 그것은 루이스가 아니라 나인 게 자연스러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루이스는 자신에게 볼일이 있는지 물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을 올리비아는 단번에 알아들었다.
“아뇨. 없습니다.”
“그렇군.”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올리비아는 나와 루이스에게 인사를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황녀궁을 떠났다. 루이스는 볼 일이 없으면 자리를 비워 달라는 것을 올리비아에게 말한 것이었다.
루이스와 나는 안으로 들어왔다. 문 앞에서 주위에 지키는 이들 역시 다섯 걸음 떨어지게 했다.
“에일린, 이건 경고다.”
“…….”
“나는 황후를 맞이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이번 귀족들의 사달에 어쩌다 보니 엮여 버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이런 일을 하게 하는데 내가 빌미를 내준 것은 사실이었다.
회귀 전에도 지금도, 나는 루이스의 곁을 지킬 황후에 걸맞은 영애를 찾으려 노력했었다. 그게 이번 티파티로 인해 기폭제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사실 귀족들을 응원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루이스에게 황후는 필요했다. 그 상대가 올리비아가 되어 준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나는 단둘이 있다는 것을 빌미로, 황제에게 청하는 것이 아닌 동생이 오라버니를 걱정해서 부탁하는 마음을 담았다.
“오라버니, 그것만은 다시 한번 생각해 주세요.”
하지만 루이스는 강경했다.
“아무리 너라도 더 이상 하면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오전 회의에서 루이스의 행동은 귀족들을 농간함과 동시에 나에게 경고한 것이었다.
루이스가 황후를 맞이하지 않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나는 그의 곁에 누군가가 있기를 바랐다. 그러니 나중에 정말로 루이스가 분노하더라도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루이스가 안 될 것 같으면 올리비아를 만나 보자.
* * *
나는 올리비아의 마음을 슬쩍 떠보기 위해서 뉴튼 백작가를 찾아갔다. 황궁으로 돌아오고 나서 사적인 외출은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백작가의 분위기가 어수선해 보였다. 어딘가 들떠 보이기도 하고. 무슨 일이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올리비아의 방에 들어갔을 때였다.
올리비아는 하얀 봉투에 들어가 있는 뭔가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눈에 익은 봉투였다.
‘저게 뭐였지?’
생각났다! 올리비아의 손에 있는 봉투는 청혼서를 보관할 때 쓰는 것이었다. 올리비아에게 누군가 청혼한 것이다!
올리비아는 청혼서를 대충 서랍에 넣었다. 혹시 다른 게 아닐까 하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나는 올리비아에게 물었다.
“그게 뭐야?”
“별거 아냐. 그냥…청혼서.”
하지만 대답은 역시나였다. 올리비아는 대수롭지 않은 듯이 말했지만, 올리비아와 루이스를 이어 주려고 찾아온 나에게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뭐? 결혼?”
“결혼이 아니라 그냥 청혼서가 온 거뿐이야.”
올리비아에게 청혼서가 왔다.
“받아들일 거야?”
“글쎄.”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올리비아는 비혼주의자였다. 그렇기에 회귀 전에도 끝내 결혼하지 않았다. 그런 올리비아에게서 “글쎄.”라는 애매모호한 대답이 나오다니. 그것은 곧 수락하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뜻이었다.
초조해진 나는 올리비아를 재촉하듯 물었다.
“왜?”
“어머니께서 너무 완강하셔서…더 이상 거절하기가 힘들어.”
역시, 그럼 그렇지. 실망으로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하지만 청혼을 한 곳은…외국이잖아.”
게다가 올리비아에게 청혼한 곳은 타국의 명문가였다.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나라였고, 가문 역시 그 나라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뛰어난 가문이었다. 결혼 상대만으로 봤을 때는 나쁘지 않은 곳이었지만, 그래도 외국이었다. 올리비아가 그곳으로 떠나게 되면 이제 자주 보지도 못하게 된다.
‘올리비아. 너는 오라버니를 좋아하잖아.’
나는 그녀가 루이스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내가 보기엔 분명 루이스도 올리비아를 좋아했다. 두 사람이 서로 마음을 확인하고 잘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건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건 올리비아와 그녀의 가문에서 결정할 일이었다. 고작 친구에 불과한 내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결국, 나는 더 이상 설득하지 못하고 황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대로 루이스에게 가서 지금의 상황을 모두 전했다. 하지만 루이스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올리비아가 이대로 결혼해도 괜찮은 거예요?”
“애초에 내가 괜찮아야 하는 건가.”
단호한 부정이었다.
루이스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이에 올리비아의 결혼 이야기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 * *
올리비아가 청혼을 수락했다는 소문이 확산되었다.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하던 올리비아의 존재감 때문에 그녀의 결혼은 더욱 화제가 되었다.
올리비아가 만약 결혼을 하게 되면 타국으로 떠나게 된다. 그러면 정말 돌이킬 수가 없게 되는 것인데도 루이스는 태연했다. 분명 루이스도 올리비아를 좋아하는 게 분명한데. 어째서 관심 없는 척 무시하는 거지? 루이스는 올리비아를 붙잡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청혼을 한 타국의 가문에서 올리비아를 너무 마음에 들어해서 일정을 앞당겨 며칠 후에 올리비아가 떠날 예정이라는 구체적인 소문까지 돌았다.
소문을 접할수록 초조한 사람은 나였다. 루이스와 올리비아가 잘되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에일린.”
나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나를 찾아온 사람은 헤레이스였다. 그는 이혼을 한 후부터는 종종 찾아왔다. 어느 순간부터는 내 이름을 부르기까지 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무엇을요.”
다짜고짜 도와주겠다니. 나는 여전히 인상을 풀지 않은 채 퉁명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헤레이스는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잊으셨습니까. 이전에도 제가 비슷한 일을 도왔던 적이 있는 거.”
“…….”
“폐하와 올리비아 영애가 잘되도록 제가 돕겠습니다.”
헤레이스가 그걸 어떻게 알지? 에밀밖에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에밀을 돌아보자 그녀 역시 놀란 듯해 보였다. 에밀이 헤레이스에게 말할 리 없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대를 지켜보다 보니 저절로 알게 되었습니다.”
헤레이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최근 나의 관심사는 오로지 올리비아와 루이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어떻게 도와줄 건가요.”
하지만 나는 결국 그의 제안을 뿌리칠 수 없었다. 분명 헤레이스가 나보다 더 잘할 것이다. 지금 당장은 루이스와 올리비아가 잘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헤레이스는 그다음이었다.
* * *
올리비아가 방금 전에 타국으로 가기 위해서 출발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곳은 올리비아에게 청혼을 보냈다는 바로 그 가문이 있는 나라였다.
나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루이스에게 달려갔다.
“올리비아가 좀 전에 출발했대요.”
“그래?”
루이스는 내 말을 흘려듣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그의 뒤를 쫓아다니면서 끈질기게 말했다.
“이제 정말 마지막 기회에요!”
하지만 루이스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속이 점점 타들어 갔다. 결국, 답답한 마음에 루이스에게 소리를 질렀다.
“왜 안 잡는 거예요!”
누가 두 사람 사이에 훼방을 놓는 것도 아닌데, 왜 루이스는 올리비아를 외면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올리비아를 이번에 놓치면 다시는 잡을 수 없어요. 심지어 외국으로 가는 거예요. 오라버니는 정말 괜찮은 거예요…?”
이젠 정말로 루이스가 올리비아에 대한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까지 태연할 수 없었다. 결국, 실망한 내가 루이스에게 모진 말들을 내뱉었다.
“저는 올리비아가 오라버니 옆에 있었으면 했어요. 서로 좋아하는 게 제 눈에는 보여서 더더욱 간절히 바랐어요.”
“…….”
“하지만 지금 오라버니 모습을 보니…이대로 외국으로 가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올리비아를 좋아해 주는 사람의 곁에 있는 게 더 행복하겠어요.”
하지만 여전히 루이스는 내게 등을 보인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지친 내가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루이스가 몸을 틀었다. 루이스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그의 행동은 반대였다. 갑자기 달려 나가더니, 그대로 말을 하나 잡아타서 달려갔다. 올리비아에게 가는 것이다.
나도 급하게 쫓아가려고 했지만, 마차로 가면 너무 늦는다. 내 승마 실력은 별로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루이스를 쫓아가는 것은 무리였다. 두 사람이 알아서 잘할 수 있을까. 걱정되기는 하지만 나는 이곳에서 기다리려고 할 때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헤레이스가 황궁 앞까지 와 있었다.
헤레이스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타세요. 제가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여기서 손을 잡으면 헤레이스에게 여지를 남기는 것이 될지도 몰랐다. 망설여졌다. 하지만 여기서 더 망설이면 루이스의 뒤를 쫓을 수 없었다.
일단 따라가자! 나는 그대로 헤레이스의 손을 잡았다. 헤레이스는 내 팔을 자신의 허리에 꽉 고정시킨 채 출발했다.
얼마나 달려왔을까. 빠른 속도로 달려오느라 몸이 쉬지 않고 덜컹거렸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지금 내 몸 상태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때였다. 눈앞에는 올리비아가 타고 있는 마차의 문이 열려 있었다. 루이스는 그 앞에 서 있었다. 올리비아는 마차 안에서 놀라서 크게 뜬 눈으로 루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이스가 올리비아를 불렀다.
“올리비아.”
“폐…하…? 여긴 어떻게…….”
올리비아가 깜짝 놀라며 마차에서 내렸다. 루이스는 여전히 올리비아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올리비아에게 무서운 목소리로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 곁에 있으면 불행한 일이 많을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