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화. 14장.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고 있었다 (12)
루이스는 결혼을 하더니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 내가 있으면 나를 방해꾼처럼 여겼다. 결혼하더니 달라졌어.
“서러워.”
내가 말하자 에밀이 피식, 웃음이 터졌다. 곧 웃음을 참으려는 모습이 보였지만, 이미 얼굴 전체에 웃음이 가득했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에밀이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원래 다 그런 겁니다.”
두 사람은 지나치게 잘 맞았다. 루이스가 이제는 나에 대한 관심이나 걱정이 많이 없어진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그래도 이건 좀 서운했다.
* * *
황궁을 나와 잠시 외출했다. 최근 사고 싶은 것이 있어서 황궁 밖에 종종 외출하곤 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낯익은 목소리였다.
“에일린.”
나를 부른 것은 헤레이스였다.
헤레이스는 이혼하고 난 후에도 계속해서 나를 찾아왔다. 직접 찾아오면 내가 만나주지 않자 그는 어느 순간부터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꾸몄다.
헤레이스가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이미 다 알고 온 것이면서.
“어디 가는 길이었습니까.”
그는 내가 참석하는 연회와 황궁 행사에 모두 참석했다. 다른 귀족들의 시선 따위는 신경도 안 쓰는지, 상황에 상관없이 내게 다가왔다.
이미 이혼한 헤레이스가 여전히 나에게 구애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제국민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헤레이스가 내게 다가오는 모습을 봐도 사람들은 이제 그러려니 하고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의 그런 반응이 더 불편했다. 어느 순간부터 내 곁에는 언제나 헤레이스가 있는 것이 당연하게 된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것은 오히려 나와 헤레이스가 부부였을 때보다 더 강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늘은 헤레이스 공작님이 안 계시네요.”
혼자 있는 나를 본 어느 귀부인이 건넨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관리하느라 애써야만 했다. 사람들이 이혼한 나와 헤레이스가 함께 있는 모습을 지극히 자연스럽게 여기는 것을 넘어 혼자 있을 때 오히려 의아해하며 묻기 시작한 것이다.
이대로 있다가는 헤레이스의 페이스에 완전히 휘말릴 것 같았다. 그래서 어김없이 찾아온 헤레이스를 향해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더 이상 이러지 마세요.”
헤레이스는 모를 리 없으면서도 모른 척 내게 물었다.
“어떤 걸 말입니까.”
헤레이스는 지치지 않는다는 듯 물러나지 않았고, 나도 그에게 지지 않기 위해 다시 정확하게 말했다.
“일부러 찾아오는 것은 물론이고…정말 우연이더라도 아는 체 하지 말아주세요.”
나와 헤레이스는 이제 남보다도 못한 사이었다.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못 본 척하는 게 예의인 관계였다. 하지만 도저히 그게 안 됐다.
내 말을 듣고는 한동안 나를 빤히 바라보던 헤레이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일부러 그대가 있는 곳에 찾아오는 건데, 모른 척할 수 없죠.”
역시 내 말에 단호하게 거절했다.
“대신…그대는 저를 모른 체하세요.”
나는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앞으론 그럴 겁니다.”
내 대답에 헤레이스가 나를 보며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뭔가 즐겁다는 듯이. 헤레이스가 내 눈썹을 가리키며 말했다.
“눈썹이 올라갔어요.”
“네…?”
“지금 보니…이건 폐하를 닮았군요.”
순간 ‘아차.’ 싶었다. 가끔 마음에 들지 않거나 하면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은 나와 루이스의 버릇이었다. 다만, 나는 그 버릇을 고치기 위해 일부러 하지 않곤 했는데…방금 전에 나와 버리고 말았다.
헤레이스는 내 눈썹을 가리킨 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를 무시하는 건 부인의 자유이듯.”
“……?”
“그대를 보면 아는 체하고 싶은 건 저의 자유입니다.”
헤레이스는 전혀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앞으로도 계속할 거라는 뜻이었다.
헤레이스는 어쩐지 점점 더 뻔뻔해지는 것 같았다. 내가 냉정한 말을 해도 어떤 모진 말을 해도 굴하지 않았다. 생글거리는 얼굴을 유지했다.
“그대도 포기하지 않고 결국 저와 결혼했는데.”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내가 그를 짝사랑해서 결국 결혼까지 했던 것을 얘기하는 것이었다. 헤레이스는 여전히 뻔뻔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저도 못 할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를 노려보자, 헤레이스는 여전히 웃으며 나를 보았다. 순간 모든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마음대로 하세요.”
나는 헤레이스를 무시하고 지나쳤다.
헤레이스의 말에 순간 맥이 빠졌다. 상대하면 할수록 내가 말리는 기분이었다. 내가 헤레이스에게 했던 행동이 내게 다시 돌아오는 거라니. 그때의 나를 떠올린다면 분명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꽤 오랫동안…….
‘아냐, 그래도 언젠가는 포기하겠지.’
그때까지 나도 계속 무시하자. 누가 끝까지 버티는지.
* * *
오늘은 루이스가 없을 시간을 골라 올리비아를 만나러 황후궁에 갔다. 게다가 이번에는 일 때문이었다.
“폐하 안 오시지?”
내 물음에 올리비아가 웃음을 터트리며 답했다.
“응. 이 시간엔 한 번도 오신 적 없어.”
“오늘은 후궁이 있는 곳을 없애는 것 때문에 왔어.”
루이스가 후궁이 있는 곳을 없애버리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떻게 할지는 정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올리비아가 후궁이 있는 곳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내게 물어봤다. 오늘은 그 논의를 위해 간 것이었다.
“앞으론 황후인 네가 관리할 거지만, 그 전에 폐하께서 없애겠다고 하시니까.”
“근데 후궁을 다 없앨 수 있는 거야?”
“하시겠다고 하면 가능은 하지만, 궁 자체를 없애는 건 비효율적이야. 지금 당장은 필요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후궁을 다시 쓸 테니까.”
루이스가 쓰지 않더라도, 그 후대로 넘어가다 보면 다시 후궁의 존재는 필요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궁 자체를 없애 버리게 된다면 그것을 나중에는 새로 지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후궁의 규모를 축소하되, 축소한 후궁 역시도 타국에서 사절단이 오거나 손님이 올 때 쓰는 궁으로 용도를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아.”
이미 올리비아에 오기 전에 각 궁을 관리하던 시녀들과 논의를 하고 온 것이었다. 나는 그 내용을 모두 종합해서 정리한 것을 올리비아에게 얘기했다.
올리비아 역시도 후궁의 일부를 없애고 나머지는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에 동의했다. 세부적인 사항까지 정리하려고 하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존재가 찾아왔다.
“…또 있구나.”
루이스가 나를 보더니 실망한 얼굴로 말했다. 분명 이 시간에는 오지 않는다고 했는데, 마치 내가 있는 것을 알고 오는 것처럼 딱 맞춰서 왔다.
“일부러 피해서 왔더니…….”
루이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니었구나. 정반대였다. 아마 루이스도 내가 없는 시간을 골라서 지금 온 것 같았다. 그런데 하필 서로가 서로를 피하다가 마주친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대놓고 실망한 얼굴이라니. 내가 부루퉁해서 말했다.
“폐하, 이렇게 나오시면 저도 곤란합니다.”
괜히 심술이 나서 한 말이었다.
“제가 누군지 잊고 계신 것 같은데.”
내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훽 돌려 올리비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올리비아가 깜짝 놀라는 것이 보였다. 내가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제가 이래 봬도 시누이에요. 제가 마음만 먹으면 중간에 훼방을 놓기도 하고, 폐하 몰래 구박할 수도 있어요!”
나는 이래 봬도 시누이였다. 앞으로 나를 더 구박하면 두 사람 사이를 방해하겠다는 선전포고였다. 사실, 말만 할 뿐이지 정말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혹시나 루이스가 넘어갈까 하는 기대감을 걸었다. 하지만 루이스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비웃었다.
어째서인지 올리비아가 황궁에 들어오자 나의 일상이 팍팍해졌다. 심지어 루이스가 나를 구박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전부터 나를 구박하는 게 그의 취미 생활이긴 했지만.
루이스가 올리비아에게 말했다.
“만약 에일린이 무슨 짓을 하면 바로 내게 말해.”
순간 나는 벙하고 입만 벌린 채 두 사람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에일린, 근데 넌 언제까지 황궁에 있을 거냐.”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이 말은 좀 충격받았다. 내가 황궁에 있는 것 자체가 방해라는 것일까. 예전에 루이스가 내게 황궁에서 평생 살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 놓고는 인제 와서 내가 있는 게 귀찮아진 것이다.
“폐하, 그만하세요!”
“곧…나가겠습니다.”
내 말에 올리비아가 당황하며 말렸다.
“에일린! 아냐. 그럴 필요 없어. 내가 네 덕분에 황궁 생활이 얼마나 편한데. 지금은 폐하께서 실수하신 거야.”
하지만 사실 루이스의 말이 맞았다. 기본적으로 황제가 아닌 황족이 황궁에서 오래 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보통 결혼을 하면 출궁하고, 결혼을 하지 않더라도 나이가 차면 출궁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렇기에 황족에게 황궁은 어린 시절 잠시 머물다 떠나는 곳이지 진정한 의미에 집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황궁을 너무 집처럼 편하게 생각한 것이다.
나는 화가 난 채 황후궁을 빠져나왔다. 안에서 올리비아가 루이스에게 화내는 목소리가 들렸다. 사실, 루이스의 말에 화가 많이 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루이스가 올리비아에게 호되게 혼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루이스의 말이 맞았다. 황궁은 분명 나의 집이지만, 영원한 집은 아니었다. 언젠가 반드시 이곳을 떠나서 고향이 그리울 때 떠올리는 장소여야 했다.
반역이 끝나고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 오랜 시간 동안 비어 있던 황후궁에도 이젠 올리비아가 있었다. 내가 이곳에서 할 일은 없었다.
오히려 내가 황궁에 오래 머무를수록 정치적인 분쟁에 휘말릴 원인을 제공할 수도 있었다. 아무리 나와 올리비아의 관계가 돈독하다고 하더라도 누군가가 우리 두 사람 사이를 이간질시키며 이득을 취하려는 자가 나올 테니까.
이제 내가 황궁에서 퇴장할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