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5화. 15장. 아직 끝나지 않았다 (3)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지만, 헤레이스가 나타났다. 공작가 소속의 기사단을 이끈 채로. 그리고 그들은 하나둘씩 차근차근, 하지만 철저하게 적들을 무찔렀다.
“여긴 어떻게 온 거지?”
루이스의 물음에 헤레이스가 적의 목을 베면서 답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일단 부탁하지.”
“맡겨 주십시오.”
루이스와 헤레이스의 거리는 다시 멀어졌다. 양쪽에서 적을 무찌르며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읏…!”
“올리비아. 왜 그래!?”
올리비아가 갑자기 배를 움켜쥐며 고통스러워했다. 순간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인가 덜컥 겁이 났다.
“아니…약간 놀라서.”
“정말 괜찮아?”
“응. 이제 좀 괜찮아…….”
올리비아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아무래도 배에 진통이 있는 것 같았다.
‘어떡하지.’
하지만 산속에서 그것도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할 수 있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저 큰 문제는 아니기를 바라는 수밖에.
“황녀님, 이쪽으로 먼저 움직이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나와 올리비아를 지키고 있던 기사 중 한 명이 산 아래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우리 먼저 돌아갈 순 없어.”
올리비아는 루이스를 놔두고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을 강하게 내비쳤다.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올리비아의 몸으로 산을 내려가는 것은 무리였다.
“그게 아니라, 조금만 밑으로 내려가면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상황이 마무리될 때까지 계시는 게 어떠십니까.”
이렇게 사람들에게 노출된 상태로 있는 것이 오히려 루이스에게 더 안 좋을 수 있었다. 그 증거로 루이스는 전투를 벌이면서도 이쪽을 계속 확인하고 있었다.
“…그러자. 올리비아.”
나는 올리비아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올리비아 역시도 기사의 말에 흔들렸다. 내가 기사에게 말했다.
“길을 알려 주게. 따라갈 테니.”
지금 여기서 머뭇거릴 때가 아니었다. 지금 분위기라면 곧 상황이 마무리될 것이다. 그때까지 잠깐만 시간을 벌자.
“이쪽으로 오십시오.”
기사가 앞서 걸었다. 내가 먼저 따라가고 그 뒤를 올리비아가 따라왔다. 아니 따라오는 줄 알았다. 그런데 뒤를 돌아보니 올리비아가 배를 꽉 잡은 채 주저앉아 있었다.
“으읏…!!”
올리비아는 극심한 통증에 도저히 움직이지 못했다. 그저 입술을 깨문 채 참고 있었다. 하필 지금 이때…! 내가 다시 올리비아에게 다가가려고 할 때였다.
“올리비아…!”
루이스의 외마디 비명과 함께, 올리비아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본 적이 그녀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안 돼!”
내가 달려가려 했지만, 나는 이미 산 밑쪽으로 내려온 후였다. 올라가려고 해도 흙에 미끄러져서 마음만큼 빨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올리비아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절대 안 돼!’
그럼 나도 루이스도 견딜 수 없었다. 기어서라도 올리바아에게 다가가려고 할 때였다. 루이스가 어느새 날아오다시피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하지만 정반대 방향에서 달려오느라 적을 완전히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아, 안 돼….”
나는 순간 힘이 빠져 버리고 말았다. 평소의 루이스였다면 무턱대고 달려드는 적 따위 막는 건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위험에 처한 올리비아와 멀리 떨어져 있는 거리. 나는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폐하!!”
올리비아의 절규에 가까운 비명소리가 내 귀를 찔렀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나는 눈을 감고 있어도 지금 무슨 상황이 펼쳐져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루이스는 누가 봐도 자신의 몸으로 막을 생각이었으니까. 그래서 눈을 뜨기가 무서웠다.
‘분명 모든 게 다 끝났을 텐데…왜!!’
하필이면 내가 회귀했던 바로 그 5년의 경계인 지금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결국엔 그대로라는 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루이스를 살릴 수는 없다는 건가.
모든 것을 포기할 때였다.
“폐하…!! …괜찮으세요…?”
올리비아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소리와 함께 질끈 감은 눈을 뜨고 무슨 상황인지 확인했다. 그런데 내 눈에 보이는 상황은 좀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내가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헤레이스가 루이스를 껴안고 있었다. 루이스의 몸에 꽂힐 뻔한 검을 대신 막은 채. 검 끝이 헤레이스의 복부를 관통하고 있었다. 적이 그 검을 뽑아내는 순간, 헤레이스의 몸에서 피가 솟구쳤다. 끝을 모르고 나오는 피와 함께 헤레이스는 조금씩 무너졌다.
“어째서…?”
헤레이스는 루이스를 대신해서 자신의 몸으로 검을 막았다.
“헤레이스 공작, 그대가 어째서…….”
그의 몸에서 나오는 피가 점점 늘어났다. 마치 회귀 전에 보았던 루이스의 마지막 순간처럼. 손끝이 떨렸다. 회귀 후 지금껏 결과가 조금씩 달라져 온 것처럼 이번에는 루이스가 아니라 헤레이스가 죽을 것 같아서.
‘이런 걸 바란 건 아니었어.’
이렇게 죽기를 바란 것은 결코 아니었다. 헤레이스는 나를 한 번 보더니 루이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헤레이스가 중간에 가로막은 덕분에 루이스는 멀쩡했다. 물론 올리비아도.
그 모습을 본 헤레이스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다행이라는 듯이 기분 좋게. 당장 생사가 위태로울 만큼 많은 양의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의 미소라고 믿을 수 없는 그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행입니다. 무사하셔서…….”
“헤레이스…….”
놀란 것은 루이스도 마찬가지였다. 루이스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헤레이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헤레이스는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다.
“덕분에 약속을 지킬 수…….”
“약속…?”
헤레이스는 그대로 쓰러졌다. 루이스가 멀쩡한 것을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대체 지금 이 상황이 전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무슨 약속을 지켰다는 거지?’
헤레이스는 약속을 지켰다는 말을 끝으로 쓰러졌다. 하지만 그 약속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였다. 뒤에서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잠시 당황했던 루이스가 정신을 차린 듯이 다시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일단 지금 이게 무슨 일인지는…상황을 정리한 뒤에 알아보도록 하지.”
루이스가 검을 쥔 채 다시 전투에 참여했다. 이미 상황은 마무리 되어 가고 있었다. 거기에 분노한 루이스로 인해 상황은 손쉽게 정리되었다. 허무하다고 느낄 정도로. 루이스는 단 한 놈도 살리지 않을 것 같은 기세로 베어 나가다 마지막에 정신을 차린 듯이 말했다.
“다 죽이지는 말아라.”
루이스의 손에는 피로 물든 검이 들려 있었다.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면 상관없다. 목숨만 끊어지지 않게 해.”
“네!”
기사들은 루이스의 말을 철저하게 따랐다. 사로잡힌 자들은 목숨만 살려 놓고 말을 할 수 있는 상태였지만, 그 두 가지를 제외하면 어느 곳 하나 멀쩡하지 않았다.
“폐하…! 괜찮으세요!?”
올리비아가 루이스에게 달려와 물었다. 하지만 여전히 몸이 안 좋은지 한쪽 손으로는 배를 붙잡고 걸음걸이도 뒤뚱거리는 것처럼 걸었다.
올리비아는 자신이 아픈 것보다 루이스가 더 걱정되는지, 그의 몸에 상처가 있는지 확인하느라 정신없었다. 하지만 정작 괜찮은지 물어야 할 사람은 루이스가 아니라 올리비아였다.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으니까.
“…괜찮다. 그러니 네 몸부터…!”
루이스가 올리비아를 부축하며 말할 때였다. 역시나 올리비아는 루이스의 안전을 확인하자마자 겨우 버티고 있던 것이 한계가 왔는지 그대로 쓰러졌다. 바닥에 그대로 닿기 직전, 루이스가 올리비아를 붙잡아 품에 안았다.
“당장 황궁으로 돌아간다!”
“네!!”
급하게 말이 준비되고, 루이스가 올리비아를 품에 끌어안은 채 말에 올라탔다. 아침까지는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는데…결국, 올리비아의 휴식을 위한 외출이 결국엔 파국이 되어 끝났다.
“에일린.”
루이스가 나를 돌아보았다. 따라오지 않고 뭐하냐는 의미였다.
‘어떡하지. 어디로 가야 하지?’
어느 순간부터 헤레이스가 보이지 않았다. 곁에 있는 기사 중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니, 같이 왔던 공작가 소속의 기사들이 헤레이스를 데리고 돌아갔다고 했다. 아마 공작가로 갔을 것이다. 검이 복부를 관통했다. 분명 무사할 리 없었다.
“저는 나중에 가겠습니다.”
“…그래.”
내 말뜻을 알아차린 루이스가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먼저 출발했다.
우선 확인하자. 헤레이스가 살아 있는 모습을. 그리고 황궁으로 돌아가자. 나는 루이스와 올리비아와는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나는 공작가로 향하면서 마지막까지 현장에 남아 있던 공작가 소속의 기사에게 물었다. 공작가로 옮기기 전까지의 상태는 그나마 그가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목숨은…?”
왠지 그 말을 묻는데 목이 잠겼다. 살아 있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기사는 어두운 목소리로 답했다.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었다는 말이 아니라서.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단정적인 대답이 아니라서. 아직 가능성은 있는 거니까.
* * *
내가 공작가에 도착하자마자 소식을 접한 앨버트가 달려왔다. 나는 그에게 곧장 헤레이스의 상태를 물었다.
“공작님은?”
“지금 치료 중이십니다.”
“괜찮으신 건가.”
“…그것까진 아직…….”
앨버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헤레이스에 대해 물을 때마다 모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만큼 위독한 상황이라는 것이겠지. 앨버트가 힘겹게 말했다.
“피를…너무 많이 흘리셨습니다.”
그의 말에 내가 봤던 모습이 떠올랐다. 피가 쏟아져 나오던 참혹한 광경이. 마치 회귀 전에 루이스가 쏟아 내던 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