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화. 15장. 아직 끝나지 않았다 (5)
공작가는 깊은 슬픔에 빠져 있었다. 순간 그 분위기에 헤레이스가 이미 죽은 것인가 덜컥 겁이 났을 정도였다.
헤레이스는 공작가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루이스가 황궁 주치의까지 보내 주었다. 하지만 헤레이스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생각보다 검이 깊숙하게 들어가서 내상이 컸다. 헤레이스는 아직도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숨은 붙어 있다고 했지만, 눈앞에 보이는 헤레이스는 마치 산송장 같았다. 시녀가 들어와서 헤레이스의 상처에 다시 약을 바르고 있었다. 분명 굉장히 아플 텐데도 헤레이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가 하지.”
“네…?”
“당분간 내가 여기서 머물면서 돕도록 하지.”
나는 시녀에게서 약을 받아 헤레이스의 몸에 직접 발랐다. 그러면서 듣지도 못할 헤레이스에게 말했다.
“제가 공작님의 곁에서 일어나실 때까지 돌보겠습니다.”
혹시라도 그가 조금이라도 미동이 보이기를 바라면서.
나는 헤레이스가 일어날 때까지 그의 곁에 있기로 했다. 일종의 죄책감이었다. 그가 지금의 부상을 입은 이유가 마음에 걸려서.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루이스를 지켜 달라는 이전의 내 약속을 아직까지도 지키는 중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기사단장이 되어 그의 곁을 지켰다. 하지만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헤레이스를 돌아보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틈을 보였다가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전혀 미련도 아무것도 없다고 하면 거짓이었다. 한때, 내가 모든 것을 다 받칠 만큼 좋아했던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미 보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헤레이스의 상태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정신을 차려 보면 헤레이스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고 있을 것만 같았다.
황궁 주치의는 이틀에 한 번씩 공작가에 왔다. 그의 상태를 확인하고 새로운 약을 처방했다. 오늘따라 황궁 주치의의 얼굴이 어두웠다. 어쩐지 그의 입에서 긍정적인 말이 나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황궁 주치의가 힘겹게 입술을 벌렸다.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주치의의 판단은 비극적이었다. 헤레이스가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상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진단이었다. 마지막을 준비하라는 뜻이었다.
마치 시간이 나를 농락하는 것 같았다. 결국, 이번에 죽는 사람은 헤레이스였나.
나는 여전히 의식이 없는 채 눈을 감고 있는 헤레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미 죽은 사람처럼. 그래서 주치의의 말은 더욱 오싹하게 느껴졌다.
‘어쩔 수 없는 건가.’
아무리 남이 되었다고 해서 헤레이스의 죽음에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주치의는 이제 더 이상의 치료는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대로 숨이 멈출 때까지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인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의식이 없는 헤레이스의 곁을 지키는 것뿐이었다. 그의 옆에서 가만히 있다 보면, 죽은 것 같은 그가 갑자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헤레이스의 옆에서 나도 모르게 잠들었을 때, 심지어 나는 그가 깨어나는 꿈을 꾼 적도 있었다. 그때는 꿈인 줄 모르고 깜짝 놀라며 좋아했는데 그 순간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눈앞에 여전히 미동 하나 없이 누워 있는 헤레이스가 보였다.
“제발 눈을 뜨세요.”
그런다고 돌아오는 대답이 있을 리가 없는데. 나는 어쩐지 포기할 수가 없었다. 자꾸만 미련이라는 것이 생겨서 나를 괴롭혔다.
“잠깐이라도 쉬세요.”
에밀이 내게 쉬는 것을 조언하며 말렸지만, 어차피 쉬려고 침대에 누워도 잠을 자지 못했다. 결국, 다시 이곳으로 올 것이 뻔했다.
헤레이스가 죽는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아직 그를 완전한 남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항상 어긋나는 걸까.’
후회가 밀려왔다. 그를 볼 때마다 회귀 전의 기억이 동시에 떠올랐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잊는 것이 도저히 되지 않았다. 아무리 회귀 전과 지금이 달라졌다고 해도, 회귀 전에 헤레이스에게 사정이 있었다고 해도, 내가 겪은 것들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헤레이스.”
“…….”
“제발 살아 줘요.”
듣지도 못하는 사람 앞에서 나는 매일 밤 말을 걸었다. 그의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나는 무의미할지라도 멈출 수 없었다.
“나는 당신이 다시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
“부디…….”
나는 그 앞에서 수만 번을 기도했다. 매일 침대 머리맡에서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했다. 대답 없는 상대를 향해 메아리처럼 말을 걸었다. 마치 상대가 대답을 하고 대화가 이어지는 것처럼.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고 미친 사람이라고 본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었다.
꿈틀.
분명 움직였는데. 나는 놀란 눈을 주위를 돌아보았다. 혹시 나 말고 누군가 본 사람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방 안에는 애초에 나와 에밀밖에 없었다. 그리고 에밀은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내가 본 것이 맞는지 아니면 환상이었는지 ,확인해 줄 사람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 아주 미세하지만 헤레이스의 손가락이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분명 내 눈으로 본 것이었다. 아주 얇지만, 기적 같은 한 가닥의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헤레이스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여전히 살아 있음을 증명하듯 체온이 따뜻했다. 나는 양손으로 그의 손을 감쌌다. 그리고 다시 한번 바랐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하게.
“살아만 준다면.”
“…….”
“무엇이든 할게요.”
헤레이스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지 못할 것이 없었다. 나는 듣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무의미한 약속을 늘어놓았다.
“그러니까…살아만 주세요.”
눈을 뜨고 내 이름을 한 번만 불러 주세요. 나는 그렇게 그의 손을 붙잡고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하지만 내가 본 것이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점점 들었다. 헤레이스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을 본 지 벌써 며칠이 지났다. 하지만 그의 상태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다행인 것은 더 나빠지지 않았다는 점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여기서 포기하면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에. 나는 오기로라도 포기할 수 없었다.
오늘도 끈질기게 헤레이스에게 말을 걸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일어나면 뭐가 하고 싶어요?”
헤레이스는 무엇이 하고 싶을까.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돌아오지 않는 대답 대신, 나 혼자 상상했다. 그리고 그가 일어나면 이번에는 난 어떻게 하고 싶은 것일까.
어차피 듣지도 못하는 그에게 말했다.
“헤레이스…….”
“…….”
“이번에는 정말로 같이 살아요.”
이번에 그가 깨어나기만 한다면 다시 한번 함께하고 싶었다. 이번에 깨달았다. 그는 회귀 전에는 나를 외면했지만, 이번에는 그를 외면하는 내 주위를 한결같이 지켰다. 나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 나와의 약속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켰다. 여전히 그에 대한 불안함이 있다고 할지라도 다시 한번 이겨 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일어나 주기만 한다면, 이번에는 정말로 후회하지 않게 서로 노력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것도 전부 헤레이스가 일어났을 때 가능한 일이었다. 헤레이스의 손을 잡은 채 고개를 숙였다.
그때였다. 방 안에 헤레이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정말입니까.”
목이 많이 쉬고 갈라져서 또렷하지는 않지만, 분명한 그의 목소리였다.
나는 대답을 하지도, 고개를 들어서 그를 보지도 못했다. 너무 놀라고 믿기지가 않아서. 고개를 들었을 때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가 눈을 감고 있다면 이번에는 정말로 버티지 못할지도 모른다. 나는 결국 고개를 숙인 채 미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내가 잡고 있던 헤레이스의 손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게 움직였다. 그가 살짝 힘을 주어 내 손을 잡는 것이 느껴졌다.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나는 겨우 정신을 붙들고 고개를 들어 헤레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너질 뻔했다. 착각이 아니었다. 헤레이스는 분명하게 눈을 떠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헤, 헤레이스…?”
“네…….”
헤레이스는 힘겹지만 분명하게 대답했다. 입가에는 미소가 머물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전에 의사가 먼저다! 그의 상태를 정확히 확인해야 했다.
“당장 의사를 데려올게요…!”
나는 당장 달려가서 주치의를 데려오려고 했다. 그리고 황궁에도 연락을 해서 황궁 주치의에게도 당장 공작가로 오라고 해야 했다.
내가 방을 나서려고 할 때였다.
“가지…마세요….”
헤레이스가 나를 붙잡았다. 그가 애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의사…데려와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꼼짝을 할 수 없었다. 헤레이스가 내 손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이대로 여기에 계속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그를 설득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한 달이 넘도록 일어나지 못했어요. 의사를 불러와야 합니다.”
헤레이스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눈빛으로 강한 거부 의사를 밝혔다. 어쩐지 그가 계속 거부를 하자 이상한 불안감이 들었다.
‘안 되겠어. 단호하게 나가자.’
내가 결심할 때였다. 헤레이스는 여전히 의식이 몽롱한 채로 입술을 벌려 내게 뭔가를 말하려고 했다.
“에일린…….”
의식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헤레이스는 말하는 것이 힘겨워 보였다. 그럼에도 헤레이스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그의 말을 가만히 들었다.
“과거에 내가 한 잘못을 용서받지 못할 것을 압니다.”
“…….”
“그래도…노력하겠습니다.”
헤레이스의 시선이 나를 향해 올곧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그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