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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바쁜 황녀님-118화 (118/124)

?제118화. 15장. 아직 끝나지 않았다 (6)

“살면서 언젠가는 용서해 줄 수 있을 때까지…잘하겠습니다.”

헤레이스는 한마디 할 때마다 정성스럽게 말했다. 그의 진심을 어떻게 해서든지 내게 전달하기 위해서. 그리고 충분히 전달되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의식을 차리자마자 내게 이런 말을 하는지.

나는 말했다.

“일단 몸부터 괜찮아지세요.”

그리고 미소를 살짝 머금은 채 헤레이스를 바라보았다. 최대한 그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말을 덧붙였다.

“그때까지는 여기 있을 테니까.”

내 말에 헤레이스의 눈이 커졌다. 내 말을 믿을 수 없는지 눈을 깜박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다시 한번 말해 달라는 것 같았다.

“공작님께서 괜찮아질 때까지는 떠나지 않겠습니다.”

내 말에 헤레이스가 안정을 찾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한순간, 그는 여전히 불안한 듯 눈동자가 일렁였다. 헤레이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괜찮아지면…그때는요…?”

그는 여전히 불안해하고 있었다. 나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땐 공작님께서 어떻게 하시느냐에 달렸지요.”

그제야 헤레이스의 살짝 커진 눈을 반으로 접으며 안심하듯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이제 이 손 좀 놓으세요.”

헤레이스가 여전히 잡고 있는 내 손을 가리켰다. 이제는 정말로 의사를 불러와야 했다.

“의사는 불러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헤레이스는 그제야 내 손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가려고 할 때였다. 헤레이스는 작지만 분명하게 내게 말했다.

“…빨리 돌아오세요.”

하지만 방문을 나설 때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걸린 것은 사실이었다.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던 헤레이스가 깨어났다.

* * *

헤레이스는 긴 꿈을 꾸고 있었다. 과거의 어느 지점인 것 같은데, 헤레이스는 알지 못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여기가 어디지.’

헤레이스는 한참을 길을 헤맸다. 그리고 겨우 알아차렸다. 이곳이 어디인지.

헤레이스는 없었던 에일린의 시간이었다. 결혼생활 내내 그녀를 무시하고 언제나 그녀에게 돌아섰기에 자신은 보지 못했던 그녀가 경험하고 흘려보낸 시간들. 그는 그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에일린은 언제나 울고 있었다. 헤레이스 앞에서는 웃으며 강한 척하다가도 돌아서기만 하면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것을 그는 알지 못했었다. 에일린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차피 도와줄 수 없기에 해결해 줄 수도 없다는 생각에 그녀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었다.

헤레이스는 깨달았다. 에일린은 자신을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는 것을.

‘미안해…….’

이곳은 현실이 아니었다. 헤레이스는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헤레이스의 목소리는 그의 생각 안에서만 흐를 뿐, 에일린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결국, 자신의 진심 중 어떤 것도 에일린에게 전하지 못했다.

이대로 여기에 있는 것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자신은 알지 못했던, 그리고 상상하지도 못했던 고통을 느끼며 반성하는 것이 나을지도. 헤레이스는 이곳을 벗어나기를 포기했다.

이곳에 있는 시간은 점점 익숙해졌지만, 에일린이 느끼는 고통을 바라보는 것은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과거의 자신에게 달려가 한 소리 하고 싶었다. 자신을 나무라고 윽박질러서 에일린을 달래도록 하고 싶었다.

‘하지만 할 수 없지.’

헤레이스는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얼마인지 알지 못하는 시간을 계속 흘려보내고 있을 때였다. 가끔씩 환청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무슨 말인지 정확히 들리지 않았다. 한 글자, 가끔은 한 단어 정도만 들리는 것이 전부였다.

어차피 이곳은 온전한 세계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상한 환청이 좀 들리는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씩 그 말을 자세히 들으려고 애쓰기 시작한 것은, 환청의 목소리가 어쩐지 낯익었기 때문이다.

‘에일린인가…?’

그녀의 목소리였다. 눈앞에서 매일 보는 에일린이 아닌, 진짜 에일린의 목소리였다. 그때부터였다. 헤레이스는 환청같이 들리는 목소리를 제대로 듣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했다. 하지만 고작해야 몇몇 단어를 듣는 것이 전부였다.

그때였다. 이번에는 이전과는 다르게 좀 더 선명하게 문장 전체가 들렸다.

‘이번에는 정말로 같이 살아요.’

헤레이스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에일린은 분명 자신에게 함께 살자고 얘기하고 있었다.

이것이 환청이 아니라면, 에일린이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면. 그에 대답하고 싶었다. 이곳을 벗어나서 에일린에게 자신이 잘 알지도 못했던 그녀의 고통에 대해 사죄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에게 다시 한번 매달리고 싶었다.

16장. 프러포즈 (1)

헤레이스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주치의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공작가의 주치의, 황궁 주치의 두 사람의 진료가 이어졌다. 두 사람은 신중하게 헤레이스의 상태를 진찰했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헤레이스의 상태를 몇 번이고 재확인하며 한참을 살펴보았다. 그러더니 서로 내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의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나는 초조해졌다. 어째서 바로 얘기해 주지 않고 서로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거지? 혹시 안 좋은 건가. 결국, 참지 못한 나는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대답을 재촉했다.

“어떻게 된 건가. 공작님의 상태는 괜찮은 거겠지…?”

두 명의 주치의가 서로 시선을 주고받더니, 공작가의 주치의가 먼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건…믿기 어려운 일이군요.”

그런데 주치의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감탄인지 한탄인지 알 수 없는 한숨이 섞여 있었다. 믿기 어려운 일이라니. 나는 괜한 불안감에 긴장을 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혹시 문제라도 있는 건가.”

“아뇨. 문제는 없습니다. 장기 손상이 워낙 심하셔서 회복이 불가능할 줄 알았는데…공작님께서 의식을 찾으신 건 사실 대단한 일입니다.”

주치의들이 심각한 모습을 한 것은 헤레이스가 의식을 차린 것을 보고 놀란 것 때문이었다.

‘다행이다…….’

그제야 긴장으로 몸이 딱딱하게 굳어 있던 온몸에 힘이 빠졌다.

“그래도 치명적인 부상이기 때문에 상처가 완벽하게 회복되는 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래도 낫긴 하는 것이지.”

“확답을 드리기는 어렵지만…이렇게 깨어나신 것을 보면 회복 역시도 해내실 것 같습니다.”

주치의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주치의는 확답할 수 없다고 했지만, 그 미소가 내게는 확답처럼 보였다.

“…고맙네.”

나는 그제야 주치의들을 향해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헤레이스가 눈을 감고 있는 동안, 부정적인 진단밖에 듣지 못했었다. 공작가의 주치의, 황궁 주치의뿐만이 아니었다. 혹시나 하는 가능성에 실력이 있다고 하는 의사들은 모두 찾았었다. 하지만 그들의 대답은 한결같이 깨어나는 것은 힘들 것 같다는 대답이었다. 그 말을 믿지 않으려고 했지만, 마음 한 편이 계속 초조해졌었다. 그런데 이제 한고비를 겨우 넘긴 것이다.

헤레이스가 깨어났다. 드디어.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것 같았다.

“저어……. 황녀 전하.”

그런데 황궁 주치의가 나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마치 기뻐하고 있는 내게 말하는 것이 망설여지는 듯 주저하면서. 나는 그에게 말해도 괜찮다는 신호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황궁 주치의가 내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회복이 된다고 해도……. 이전처럼 무리한 움직임은 힘드실 수 있습니다.”

“무리한 움직임…?”

“아마 검을 잡으시는 것은…….”

황궁 주치의는 나와 헤레이스의 눈치가 보였는지 말끝을 흐렸다. 아무래도 그의 말뜻은 일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정도까지는 회복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의 움직임, 특히 검을 휘두르는 등의 기사로서 갖춰야 하는 것들은 더 이상 무리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건 생명과는 상관없지만, 귀족으로서, 한 가문의 가주로서 자존감이 걸려 있는 문제였다. 내가 함부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 역시 아니기에, 나는 헤레이스의 얼굴을 살폈다. 혹시 그가 좌절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

하지만 그는 전혀 충격받지 않은 듯 덤덤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괜찮네.”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아니 오히려 관심 없다는 듯이 답하며 미소를 지었다. 고작 그런 것으로 눈치를 봤냐고 놀리는 것처럼.

“그게 전부인가.”

“…네. 한동안 약을 드셔야 하는데, 그것은 밖에 있는 시녀에게 따로 일러두겠습니다.”

“수고했네.”

헤레이스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주치의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멀뚱하게 서 있던 주치의들은 헤레이스의 시선에 깜짝 놀라더니 서둘러 진찰 가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럼 저는 물러가 보겠습니다.”

“혹시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불러 주십시오. 그럼 이만…….”

주치의들은 인사를 하자마자 쏜살같이 방을 나섰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웃음이 나올 뻔했다. 헤레이스가 주치의를 보던 시선의 의미를 알 것 같아서.

“회복하는 데 오래 걸린다는군요.”

“그래도 다행입니다.”

“…….”

“…?”

“으읏…….”

헤레이스가 갑자기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갑자기 배를 움켜쥐며 고통스러워했다.

“괜찮으세요?”

방금 전까지 괜찮은 것 같았는데 왜 그러지? 다시 주치의를 불러야 하나? 나는 당황해서 그의 상태를 살폈다.

“갑자기 통증이……윽…….”

“다시 주치의를 부를 게요…!”

주치의가 돌아간 지 얼마 안 됐으니 멀리 가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서둘러 방을 나서서 시녀를 부르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헤레이스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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