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화. 17장. 결혼 (2)
헤레이스가 내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에일린, 무슨 생각을 합니까.”
오늘까지 계속 공작가에 있는 것은 모두 헤레이스가 부린 꾀(?) 때문이었다. 나는 헤레이스를 노려보았다.
헤레이스가 내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습니까.”
자신이 나를 계속 붙잡아놓은 것 때문에 신경이 쓰이긴 한 것 같았다.
하아, 어쩌겠어. 헤레이스가 나를 보내지 않으려고 일부러 이랬다는 것을 알면서 결국 뿌리치지 못한 것도 나였다. 나는 결국 체념하듯 말했다.
“…알겠습니다.”
“……?”
“여기 있을게요.”
나는 결혼 전까지 공작가에 머물기로 했다. 헤레이스의 눈이 커지면서 어느새 내 얼굴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정말입니까.”
“네.”
내 확실한 대답에 헤레이스가 눈을 반짝 빛내기 시작했다. 뭐지, 왜 갑자기 또 불안하지.
내 대답에 마치 헤레이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이제 그 저택은 필요 없을 테니, 필요한 것들을 가져오고 나머지는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마치 내가 이 말을 하면 어떻게 행동할지, 그래서 내가 돌아갈 곳도 없게 만들려고 하는 것 같았다. 헤레이스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이제 저와 결혼할 거니, 그 저택을 쓸 일이 없지 않습니까. 바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
“한동안 결혼 준비로 정신이 없을 테니, 차라리 같이 지내는 것이 더 좋을 겁니다.”
마치 이 순간만을 위해서 생각해 놓은 말인 것처럼 막힘없이 술술 나왔다.
헤레이스는 바로 옆에 있는 에밀에게 하녀들을 데리고 가서 저택에 중요한 물건만 가져오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그렇게 지시하고 있는 헤레이스의 모습이 어쩐지 신나 보였다.
그래, 사람들의 시선 따위. 그들이 무슨 목적으로 어떤 말을 속닥일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괜히 그런 것들을 신경 쓰느라 겨우 다시 함께하게 된 헤레이스와 함께 시간을 지내지 못하는 것이 더 손해였다.
헤레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런 헤레이스에 활짝 웃어 보였다.
18장. 첫날밤 (1)
이제 오늘 밤만 지나면 나와 헤레이스의 두 번째 결혼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만큼은 일찍 주무시라며 에밀을 비롯한 시녀들이 모두 물러났다. 물론 그 전에 피부에 좋다는 각종 팩과 오일을 온몸에 바른 것은 기본이었다.
나 역시 일찍 침대에 누워 잠을 자려고 하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나는 상체를 일으키며 문을 바라보았다.
“에일린,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헤레이스였다. 이 시간에 찾아오다니, 설마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들어오세요.”
내 대답에 헤레이스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하지만 헤레이스는 문 앞에서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딱히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 온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사실, 헤레이스가 무슨 일이 있어서 찾아온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나도 방금 전까지 침대에 누운 채 눈만 말똥하게 뜨고 있었으니까. 잠이 오지 않았다.
결혼식이라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리고 불안해졌다.
잘할 수 있을까. 나는 과거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고 이번에는 기필코 헤레이스와 함께하고 싶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생각의 꼬리를 물고 헤레이스를 생각하고 있었다.
‘헤레이스는 자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 헤레이스가 찾아왔다. 분명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다가 여기까지 온 것이겠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두 번째라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처음이건 두 번째건. 상대가 똑같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보다.
아니, 분명 그 상대가 헤레이스니까 이렇게 긴장되는 것이겠지.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헤레이스와 이렇게 함께 있게 될지는 전혀 상상도 못 했는데. 결국 나는 또다시 헤레이스와의 미래를 꿈꾸며 결혼을 한다.
내가 헤레이스를 빤히 바라보자, 그가 마주하듯 내 눈동자에 자신으로 가득 차도록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헤레이스가 속삭이듯 제안했다.
“잠이 안 오면 제가 재워 드릴까요.”
그러고는 내 손을 살포시 잡았다. 손에 전해지는 온기가 따뜻했다.
“내일은 하루 종일 고단할 겁니다. 인제 그만 눈을 감으세요.”
어느새 스르르 눈꺼풀이 감겼다. 옆에서 자장가처럼 헤레이스가 뭔가를 말하는 게 얼핏 들렸다. 하지만 이미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해 그가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 지까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 * *
결혼식은 정말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루이스까지 합세해 버린 바람에 내 예상보다 더 크고 화려하게.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공작가의 결혼이 아닌 황가의 결혼으로 대우받은 덕분이었다.
마치 올리비아가 결혼할 때가 떠오르는 상황이었다. 제국민들까지 성대한 결혼식을 구경하로 거리로 몰려들었다. 황궁 앞에는 내가 지나갈 때 뿌리기 위해 화동들이 꽃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결혼식을 위해 준비를 돕던 에밀이 복잡한 얼굴을 하고 나를 축하해 줬다.
“축하드립니다.”
그동안의 고생과 감격, 그리고 걱정이 섞여 있는 얼굴이었다.
“에밀.”
“네, 아기씨.”
“앞으로도 잘 부탁해.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에밀밖에 없다는 거 알지?”
“흐흡…….”
에밀이 나를 꼭 안았다. 나도 그녀의 등을 끌어안았다. 그런데 감정이 북받쳤는지 에밀의 어깨가 떨렸다. 분명 울음소리를 꾹 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에밀의 등을 말없이 토닥였다.
올리비아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축하해 주었다.
“에일린, 축하해. 분명 잘 살 거야.”
“고마워.”
걱정도 근심도 없는 오로지 순수한 축하 인사였다. 나는 기쁘게 받아들였다.
“잘 살아라.”
루이스의 말은 어쩐지 헤레이스에게 보내는 선전포고처럼 들렸다. 헤레이스 역시 그렇게 받아들였는지 의미심장하게 루이스를 마주 보았다.
“잘 살 겁니다.”
내가 한 말이 아니었다. 헤레이스가 루이스를 향해 한 말이었다. 어쩐지 둘의 신경전은 끝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두 사람 사이에 겨우 끼어들었다.
“걱정 마세요. 잘 살게요.”
그리고 루이스가 걱정하지 않도록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린 채 웃었다.
어쨌거나 결혼식은 성대하게 사람들의 축하 속에서 치러졌다. 그 속에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 누구도 감히 대놓고 결혼을 비꼬거나 조롱할 수 없었다. 결국, 지금 결혼식에 불만이 있는 귀족들은 억지 미소를 한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결혼식도 어느새 막바지에 이르렀다. 영원을 약속하는 마지막 서약이 남아 있었다. 나는 헤레이스를 남편으로 맞아. 헤레이스는 나를 아내로 맞아.
“…기쁘거나 슬프거나, 좋을 때나 힘들 때나 한결같이 아끼고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네. 혹은 아니오. 대답은 둘 중 하나였다.
물론, 결혼식장에서 ‘아니요.’라고 외칠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당장 반대편에 있는 문으로 달려가 도망쳐야 하겠지만. 나는 짧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네, 맹세합니다.”
주례사의 시선이 헤레이스를 향해 이동했다. 헤레이스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맹세합니다. 죽을 때까지 부인을 사랑하고 지키고…당신만을 바라볼 것을 제 목숨을 바쳐 맹세합니다.”
헤레이스는 맹세를 하는 동안 내게서 단 한 순간도 눈을 떼지 않았다. 오직 나를 바라보며 그는 마지막 서약을 마쳤다. 헤레이스는 오직 내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 영혼까지 바칠 것을 맹세합니다.”
살짝 고개를 숙여 내 귓가에 속삭이는 그 말은 오로지 나에게만 하는 맹세였다.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헤레이스의 얼굴이 화색이 돌며 웃음이 얼굴 가득 번졌다.
* * *
결혼식이 끝났다. 하지만 전부 끝나려면 아직 해야 할 일이 하나 남아 있었다.
헤레이스가 들어왔다. 그가 나를 불렀다.
“부인.”
어쩐지 목소리가 낯간지러웠다. 헤레이스도 어색한지 다가오지 못한 채 멀찍이 떨어진 그대로 있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건가요.”
“하하…….”
헤레이스는 멋쩍어하면서 한 발짝 다가왔다. 하지만 그 이상 다가오지도 못했다. 설마 이런 식으로 계속 실랑이를 벌이는 건 아니겠지? 순간 그런 불안함이 감돌았다.
헤레이스가 말했다.
“믿기지가 않아서요.”
그는 정말 얼떨떨한 듯해 보였다.
“어쩐지 지금 이 상황이 꿈인 것만 같아서 무섭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릴 것만 같다고 말했다. 지금 이 순간들이 피부에 와 닿지 않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차마 기대조차 하지 못했던 일들이었다. 이게 모두 꿈이었다고 해도 어쩐지 ‘그럼. 그렇지.’라고 생각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이쪽이지.’
분명 지금 이 상황은 꿈도 착각도 아니었다. 그저 믿기지 않아서 두려운 것뿐이었다. 나는 헤레이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문제는 따로 있는 것 같았다. 헤레이스는 내게 다가올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나는 눈을 살짝 흘기며 헤레이스에게 말했다.
“어쩐지 오늘 밤은 틀린 것 같네요.”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헤레이스가 되물었다.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나는 좀 더 직접적으로 말했다.
“오늘은 아무것도 못 하겠어요.”
그러자 내 말에 헤레이스가 울컥하며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깜짝 놀란 것은 나였다. 나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보았다. 헤레이스가 심각한 얼굴을 한 채 외쳤다.
“이게 어떤 밤인데…! 무조건 할 겁니다!”
헤레이스는 마치 절박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웃긴 것은 절박한 얼굴과 목소리와는 다르게 몸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헤레이스를 조금 놀려 볼까 하는 생각에 다시 한번 물었다.
“어떤 밤인데요?”
그러자 마치 불이라도 난 것처럼 헤레이스의 얼굴이 화르륵 붉어졌다. 그 모습이 어쩐지 귀여운 것도 같았다. 나는 입을 가린 채 쿡쿡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