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3화. 18장. 첫날밤 (2)
그때였다. 헤레이스의 눈빛이 돌변하더니, 갑자기 뚜벅뚜벅 내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한참을 문 근처에서 있던 아까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더니 헤레이스가 조심스럽게 팔을 뻗었다. 내 얼굴에 닿을 듯 닿지 않는 팔은 떨고 있는 건지 눈앞에서 흔들렸다. 답답해서 못 버티겠다 싶을 때, 헤레이스의 손이 내 얼굴에 닿았다. 그의 얼굴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저와 부인의 첫날밤입니다.”
헤레이스가 말 한마디 할 때마다 그가 내뱉는 호흡과 숨결이 전부 느껴졌다. 그는 여전히 얼굴을 밀착한 채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헤레이스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는 채로 고개를 살짝 옆으로 꺾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얼굴을 더욱 가깝게 다가왔다. 내 입술 위로 헤레이스의 입술이 맞닿았다.
하지만 진지하면서도 숨 막히는 분위기는 거기까지였다. 헤레이스는 팔을 아래로 내려 내 허리를 감았다. 거기까지는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허리에 둘렀던 팔을 조금씩 올리려 할 때였다. 그의 손길을 기다렸는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살짝 고개를 숙여 보니, 그의 팔이 허공에서 헤매고 있었다. 나를 안고 있는 팔과 다른 쪽 팔이 꼬인 것이었다.
“푸훗.”
결국, 어설픈 행동 때문에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 공간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까웠던 몸 역시 뒤로 물러났다.
어쩐지 중간에 멈추니 더 어색했다. 내가 먼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까지 오는데 힘드네요.”
여러 의미가 포함된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문 앞에서 내 옆까지 오는 데 한참 걸린 헤레이스를 향해 하는 말이었다.
“예전 생각이 나는군요.”
나도 헤레이스도 너무 어색했다. 회귀 전에도 부부였고, 회귀한 후에도 나름 부부생활을 유지했었는데. 지금 우리 두 사람의 행동은 모든 것이 처음인 것만 같았다. 어색하고 뻘쭘하고 낯간지럽고.
“푸훗.”
열심히 참고 있던 웃음이 다시 한번 터져 나왔다. 나와 헤레이스 모두 긴장한 것이 티가 났다. 그래서 웃음이 터졌다.
이게 뭐하는 걸까. 그래도 이런 첫날밤도 괜찮지 않을까. 제대로 된 첫날밤이라고도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미소를 지었을 때였다. 헤레이스가 내 눈을 바라보며 불렀다.
“부인.”
“네.”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헤레이스는 결연한 얼굴로 내게 맹세했다. 나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자, 헤레이스가 나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부인…?”
그러면서 나의 안색을 살피며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피식,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고 헤레이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앞으로 잘해요. 저한테.”
헤레이스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네!”
왠지 그 모습을 보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일반적인 첫날밤은 아닐지 몰라도, 분명 과거와는 전혀 다른 우리 둘만의 첫날밤이었다.
‘뭐, 이런 것도 나쁘지 않지.’
어느새 밤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 * *
결혼식이 끝나고 참석했던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떠났다. 루이스와 올리비아도 마차를 탄 채 황궁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올리비아가 루이스의 곁에 앉으며 말했다.
“폐하. 서운하십니까.”
루이스는 평소와 별다르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올리비아만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그의 얼굴에 드리운 쓸쓸함을.
“서운하긴 무슨.”
루이스는 퉁명스럽게 답했지만, 이미 그의 얼굴은 무너져 있었다. 올리비아는 삐져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너무 서운해하지는 마세요. 폐하께는 제가 있지 않습니까.”
“당연한 소릴.”
루이스가 올리비아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는 올리비아와 황자가 있었다. 회귀 전에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관계였다. 이것은 기적이었다.
‘그러니 부디…….’
루이스는 올리비아의 손을 꼭 붙잡았다. 올리비아의 손을 잡은 힘은 강했지만 아프지 않았고, 단단했지만 따뜻했다.
올리비아가 자유로운 나머지 손을 루이스의 손등 위에 올려놓았다.
‘에일린에게도 기적 같은 일들만 있기를.’
루이스는 진심으로 바랐다. 자신이 하루하루 느끼는 이 충만한 감정을 에일린도 누릴 수 있기를.
9장. 오늘도 바쁜 황녀님 (1)
해피엔딩. 아직 모든 게 끝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런 단어를 써도 되지 않을까. 자신했다.
하지만 나의 행복한 착각은 이른 오전부터 연달아 오는 서신을 확인하고 깨지고야 말았다.
“역시 아닐지도.”
역시 내 인생은 아직 해피엔딩이 아니야.
“에밀.”
“네. 마님.”
에밀은 이제 나에게 더 이상 아기씨라가 부르지 않았다. 그녀는 어느새 자신의 품에서 나를 떠나보내기로 했는지, 한발 뒤로 물러난 채 예를 갖추곤 했다.
“지금 바로 황궁에 갈 거야.”
“설마 했는데, 역시인 건가요.”
“응. 역시야.”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었다. 에밀 역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황궁으로 갈 채비를 했다.
준비를 마치자마자 황궁으로 향하려고 할 때였다.
“외출합니까.”
“네. 잠시 황궁에 좀…공작님. 지금 무슨…….”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에밀 역시 못 볼 꼴을 봤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저녁까지는 돌아오세요. 기다리겠습니다.”
“네…….”
어쩐지 기다리고 있는 것이 헤레이스 하나가 아닐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에밀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녀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헤레이스의 몰골을 설명하자면 대략 이러했다.
하얀색 가루가 덕지덕지 묻은 얼굴과 팔. 시녀들이 입는 하얀 천을 허리에 꽉 묶은 모습. 주방에 있다가 내가 외출한다는 소식에 달려 나온 것이 분명했다.
뭐라도 한마디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입을 떼려고 할 때였다. 헤실헤실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지금 얘기를 꺼내면 잠깐 안에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황궁이 먼저다. 황궁부터 다녀오고 나서 차분하게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얘기하자.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오세요.”
헤레이스가 활짝 웃으며 대문 앞까지 마중을 나왔다. 나는 준비되어 있던 마차를 타고 빠른 속도로 황궁으로 향했다.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갈림길 앞에서 멈춰 섰다. 에밀이 나에게 물었다.
“어디 먼저 가시겠습니까.”
“…황후궁으로 가자.”
나와 에밀은 황후궁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나를 발견한 시녀들의 얼굴이 반색이 되는 것이 종종 보였다.
황후궁에 도착하자마자 시녀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어 주었다. 올리비아는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나는 바로 다가가서 우선 예를 갖춰 인사했다.
“황후 마마를 뵙습니다.”
올리비아가 양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나를 반겼다.
“에일린!”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바로 앞자리에 끌어 앉혔다.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쌓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또 무슨 일이야.”
“나 이혼할 거야.”
이제는 놀라기도 지쳤다. 내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올리비아는 울컥했는지 버럭 소리를 지르며 강조했다.
“이번엔 진짜 이혼할 거야!”
그러면서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진심인지 열렬하게 어필했다.
올리비아와 루이스가 싸울 때마다 공작가에는 두 통의 편지가 오곤 했다. 당연하게도 올리비아와 루이스가 각자 자신의 억울함을 성토하는 내용으로 한가득이었다. 그리고 편지 말미에는 꼭 이 한마디가 덧붙여져 있었다.
[나 이혼할래!]
처음 이 편지를 접했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루이스의 편지도 확인하지 못하고 바로 황궁으로 달려왔었다.
루이스의 편지는 처음부터 온갖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올리비아와 다른 점은 편지 말미에 적힌 내용이었다.
[황후 좀 잘 달래 봐.]
결국엔, 아무리 심각하게 싸워도 루이스는 올리비아의 눈치를 보며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 타이밍을 쟀다. 그 미끼로 툭하면 나를 이용하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제국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서 내가 오늘도 바쁘게 황궁으로 달려와 황후 마마를 달래는 수밖에.
“진정하고 차분하게 얘기해 보세요.”
“그니까 폐하께서…!”
올리비아는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줄줄이 이어 나갔다. 숨이 차지 않을까 걱정되는데도 불구하고 올리비아는 멈추지 않았다.
사실, 두 사람의 싸움이 심각해질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이제 곧 올 텐데, 내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올리비아가 여전히 불퉁하게 나온 입술로 시녀에게 명령했다.
“지금은 손님이 계셔서 뵙기 힘들 것 같다고 전해라.”
하지만 올리비아의 말이 무색하게 곧 문이 스르르 열렸다.
올리비아의 눈이 날카로워지며 문 사이로 들어오는 사람을 노려보려고 할 때였다. 문은 열렸지만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마마마마!”
작은 물체가 와다다다-하며 달려와 올리비아의 품에 안겨 들었다.
“황자!”
올리비아가 당황하면서도 황자가 넘어지지 않게 감싸 안았다. 문을 열었을 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것은 황자가 우리가 바라보던 곳보다 더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다.
“황후.”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올리비아가 황자의 재롱을 보며 미소를 보이자, 조심스럽게 들어온 루이스가 부른 것이다. 루이스의 품에는 태어난 지 이제 1년이 조금 넘은 공주가 있었다. 공주는 루이스의 품이 편한 듯 미소를 머금은 채 잠들어 있었다.
올리비아가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고 단단히 각오한 듯 루이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지금 아이들을 데리고 무슨 짓인가요.”
두 사람이 싸울 때마다 루이스가 자주 쓰는 방법이 황자와 공주를 데리고 오는 것이었다. 아이들 앞에서 안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없는 올리비아가 하는 수 없이 용서하고 넘어가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조용한 눈짓으로 에밀을 불렀다.
‘에밀.’
나의 신호를 접수한 에밀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의자 끄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게 자리에서 일어나서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렇게 보니 루이스와 올리비아. 그리고 황자와 공주. 네 가족은 굉장히 잘 어울렸다. 그리고 나와는 다른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조용히 물러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