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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바쁜 황녀님-124화 (124/124)

?제124화. 9장. 오늘도 바쁜 황녀님 (2)

두 사람이 화해를 했을 때 내가 괜히 존재감을 드러냈다가 다시 기분 나쁜 일들이 떠오른 올리비아가 다시 화를 낸 적이 있었다. 그 후부터는 화해 모드에 돌입했다 싶으면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돌아갔다.

문을 나서기 직전에 루이스와 잠깐 눈이 마주쳤다. 루이스가 살짝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서 눈이 부실 정도였다. 나도 루이스를 향해 화답하듯이 활짝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리고 문이 스르르 닫혔다.

“공작가로 돌아가자.”

“네, 마님.”

이제 당분간은 황궁에서 편지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잊을 만하면 연락이 오겠지. 언제나 다양한 이유로 싸우지만, 결국엔 두 사람이 싸우는 이유는 하나였다.

‘사랑싸움인 거지.’

나는 두 사람을 떠올리며 피식, 미소가 새어 나왔다.

* *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에밀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다.

“도착했습니다.”

에밀이 나를 깨웠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차 안에서 깜박 잠든 것이었나 보다. 내가 일어나자 마차 밖에서 문이 열렸다.

“오셨습니까.”

“…공작님?”

당연히 앨버트가 문을 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차 문을 잡고 있는 사람은 헤레이스였다. 앨버트는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헤레이스가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내리세요.”

아직 잠에서 덜 깬 내가 눈만 깜박거리며 마차에서 내리지 않자, 헤레이스가 내 손을 살짝 감싸더니 자신의 손등 위에 올렸다.

“아직 저녁 전입니까.”

“네.”

“바로 식당으로 가죠.”

내가 마차에서 내리자 헤레이스는 자연스럽게 내 손을 다시 한번 감쌌다. 그리고 자신의 팔 사이에 넣었다. 자연스럽게 팔짱을 낀 채 식당으로 향했다.

‘잊고 있었다…….’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황궁에서 루이스와 올리비아에게 양쪽으로 이리저리 치이다 보니 정신이 없었던 것도 있지만, 방금 전 나를 마중 나온 헤레이스의 모습이 너무 말끔해서 그만 깜박했다. 외출하기 전 하얀 가루에 범벅인 채 앞치마를 매고 있던 헤레이스의 흉측하고 기괴한 몰골을.

“이게…뭐죠…?”

테이블에는 정체불명의 뭔가가 있었다. 헤레이스는 이 와중에 뿌듯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이번에 새로 나온 신메뉴라고 해서 배워 왔습니다.”

그가 말한 신메뉴는 수도에서 유명한 식당이자 황궁 주방사 출신이 운영하는 식당의 신메뉴를 일컫는 것이었다. 나와 돈독한 관계인 주방장이 운영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냥 거기서 사 오지.’

왜 괜히 직접 만들겠다고 이러는 걸까. 이럴 때마다 헤레이스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게 뭐죠!”

“벼, 별거 아닙니다.”

헤레이스가 자신의 팔을 뒤로 감쳤다. 딱 봐도 뻔했다. 기름에 튄 화상 자국이다. 아무리 해도 늘지 않는 요리를 하겠다고 주방에서 정신없이 움직이다가 뜨거운 것에 덴 것이 분명하다.

내가 헤레이스의 팔을 잡은 채 시녀에게 말했다.

“치료 먼저 해요.”

시녀는 곧 주치의를 데리러 갔다. 그런데 헤레이스가 자꾸만 팔을 빼내려고 한다. 살짝 짜증이 난 내가 미간을 좁힌 채 그를 바라보자, 곧바로 어깨가 살짝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식기 전에 먹어야 합니다.”

“어차피 맛도 없…! 는…….”

헤레이스의 고집스러운 말에 울컥해서 나도 모르게 본심이 튀어나와 버렸다. 그 순간 헤레이스의 고개가 아래로 축 쳐졌다.

곧 주치의가 와서 간단한 약을 처방해 주었다. 약을 발라 주다 보니 헤레이스의 팔 곳곳에 작지만 붉은 점처럼 여전히 자국이 남아 있는 것들이 보였다. 괜한 고집을 부리면서 툭하면 주방에 들어가 요리를 하면서 생긴 상처들이었다. 전쟁터에서 생긴 상처도 아니고 주방에서 생긴 상처라니. 뭔가 우스꽝스러웠다.

“저는 이게 더 영광스럽습니다.”

“네??”

“부인을 위해 노력하다가 생긴 영광의 상처입니다. 그 어떤 상처보다 자랑스러운 거죠.”

헤레이스는 정말로 뿌듯하다는 듯이 턱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방금 전까지 연고를 바르던 헤레이스의 팔을 탁하고 쳤다.

“부인…?!”

“아…….”

헤레이스의 당당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얼굴을 보니 나도 모르게 손이 먼저 나갔다. 입안에서 자꾸 뭔가가 나오려고 근질거렸다. 결국, 삼키지 못하고 튀어나왔다.

“잘하겠다고 쓸데없는 것 좀 하지 마세요.”

아차, 말을 내뱉자마자 바로 입을 가렸지만, 한번 내뱉은 말은 도로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이미 헤레이스는 듣고 말았다. 그의 얼굴이 나락에 빠진 것처럼 급속하게 어두워졌다.

“쓸데없는 거라니….”

“…….”

“제가 이걸 만들겠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헤레이스의 도전은 여전히 이어졌다. 내가 만족하는 모습을 보면 기운을 내서 더 열심히 하고, 내가 불만을 터트리기라도 하면 이번 실수를 만회하겠다며 밤을 새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보고 헤레이스를 말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다가 즐거워 보이기까지 하니까.’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헤레이스는 나를 만족시키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된 것처럼 열심히 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기라도 하면 나보다 더 크게 좋아했다. 마치 하늘이라도 날 것처럼 기뻐했다.

솔직히 헤레이스가 내게 해 주는 것보다 그런 헤레이스의 모습을 보는 것이 더 즐거웠다. 물론, 그 사실을 헤레이스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지금도 가끔씩 회귀 전의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그럴 때면 여전히 불안하고 무서울 때가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르다.

루이스는 여전히 살아 있고, 심지어 사랑하는 올리비아의 존재와 모든 것을 다 줄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아이들까지 있다. 루이스는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혀 거리끼지 않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헤레이스는 과거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그 행위 역시 거침없었다. 내가 용서해 주는 날이 오지 않더라도 상관없다며 포기하지 않는 헤레이스를 보면, 결국 과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은 나 혼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과거를 조금씩은 뒤로 할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헤레이스를 의심하지 않고 온전히 마주할 수 있었고, 지금은 더 이상 헤레이스를 원망하지 않는다.

물론, 그것 역시도 아직 헤레이스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계속할 겁니다. 부인이 말하는 쓸데없는 짓!”

헤레이스는 언제 위축되었냐는 듯이 나를 빤히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참. 부인이 황궁에 간 사이에 황궁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내가 황궁에 간 사이. 공작가에 따로 연락을 했다고?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적중시키듯이 헤레이스가 말했다.

“황자 전하와 황녀 전하를 며칠간 맡긴다고 하시더군요. 두 분이서 잠시 휴양을 다녀오겠다고.”

이것 봐. 결국, 두 사람 화해도 내가 나서서 돕고 두 사람의 즐거운 시간을 위해서 나보고 희생하라는 거잖아!

“저희도 언젠가 그런 아이를…….”

“황자 전하와 황녀 전하는 공작님이 돌보세요.”

“네??”

“그럼 제가 굉장히 기쁠 듯하네요.”

헤레이스에게 매섭게 통보한 뒤, 그러고 나는 그대로 돌아섰다.

‘아, 몰라. 안 해! 너희들끼리 알아서 해!’

하지만 나는 또 열심히 에너지 넘치는 황자 전하와 황녀 전하에게 들들 볶이면서 돌보겠지.

하아…여전한 제국의 황녀인 나는 오늘도 바쁘다.

-<오늘도 바쁜 황녀님>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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