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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만큼 벌었다
부끄러움 많은 고기를 먹어왔습니다.
소설 인간실격의 주인공은 이런 마음으로 토로한 것이 아니었을까.
지금껏 내가 먹은 고기는 고기가 아니었다.
나는 지금까지 단백질 덩어리를 고기라 합리화하며 먹어왔던 것이다.
그런 마음이 들 정도로 내가 지금 먹고 있는 이 부위는 장난 아니게 맛있다.
업진살~ 살살 녹는다!
업진살을 먹어본 사람이라면 공감을 할 수밖에 없다.
지금껏 내가 먹어왔던 어느 고기와도 차별을 불허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고기의 맛에 차별을 두지 않았다.
어차피 그냥 단백질과 소스 맛 아닌가?
비싼 생선은 덜 비리면서 부드럽게 넘어가기라도 하지.
고기는 고작해야 소고기와 돼지고기 정도의 차이밖에 몰랐다.
뷥스나 아웃빽같은 스테이크집을 갔을 때 들은 생각이 있다.
대체 이 돈을 주고 삼겹살을 먹지, 왜 스테이크를 사 먹을까?
그렇게 나는 부끄러움 많은 고기를 먹어왔다.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맛있었다.
회장아재가 사준 업진살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나에게 미식이라는 삶의 기쁨이 하나 늘었다.
그리고 내가 앞으로 고기를 먹을 때마다 비교를 하게 만든 원망감.
희비가 교차했다.
"진짜 맛있네요!"
"팍팍 무라! 형님이 쏜다 아이가."
회장아재 덕에 업진살을, 그것도 한우를 배터지게 먹고 있다.
쌀밥따위 시키지도 않았다.
최고급 소고기만으로 배를 채우는 중이다.
앞으로 남은 평생 목구멍 기름칠을 하지 않아도 윤기가 좌르르르 흐를 것 같다.
굽기도 전부터 여간내기가 아니라는 걸 눈치챌 수 있는 환상적인 마블링.
뜨거운 철판에 살짝 겉만 구워 입에 넣으면 살살 녹는다.
업진 살살 녹는다!
씹을 때마다 육즙이 흘러 넘친다.
이렇게 맛있는 고기는 난생 처음 먹어본다.
그것도 아껴 먹을 필요없이 마구마구 먹어도 된다니!
남이 사주는 밥이 두 배는 맛있는 법이라지만.
남이 사주는 고기는 열 배 이상은 맛있다.
"정말 건물주일 줄은 몰랐어요, 형님."
파프리카TV에서 별풍선을 엄청나게 쏘는 사람들을 속칭 강남 건물주라 부른다.
그런데 회장형님은 정말로 건물주였다.
물론 강남은 아니고 부산쪽이라고 한다.
하지만 건물주라는 사실 자체가 어마어마하다.
이런 분이 내 방송 팬클럽 회장님이라니 믿기지가 않을 지경이다.
"행님이 싸업 좀 맛깔나게 한다 아이가? 마, 오늘은 싸람 같눼에?"
방송할 땐 왜 그렇게 후줄근하게 입었냐며 타박을 준다.
너무 찌질하게 사는 것 같아서 별풍선을 쏴준 감도 있단다.
정말 대놓고, 솔직하게 말씀하셨다.
부산 싸나이 다우시다.
"사실 여기 오는 길에 친구가 맞춰 줬어요 전 패션 센스가 영 꽝이라."
"와? 담에는 금마도 데꼬 온나."
고마운 건 사실이지만 길고양이는 데리고 오는 건 내키지 않는다.
잘못하다간 회장형님과 연을 끊어야 될지도 모른다.
대체 무슨 일을 벌일지 예측도 불가능하고 말릴 수도 없다.
고기 사준다는 말에 배를 쫄쫄 굶고 온 만큼부담이 갈 정도로 많이 먹었다.
하지만 회장아재는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얼굴이다.
오히려 잘 먹어주니 기분 좋다고, 다음에 또 사주겠다고 약속까지 하셨다.
흔쾌히 계산을 마친 후 일이 급하다며 바람같이 사라지셨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 사람이 있을 줄이야.
맛밤게임단의 그 디스 좋아하는 감독 자식과는 다른 세상의 사람이다.
세상이라는 거 의외로 살 만한지도 모르겠다.
'뭐 그 자식이 없었으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수 있겠지만.'
담배 심부름을 시키지 않았다면 공교롭게도 지금의 나는 없다.
물론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말이다.
언젠가 다시 만날 일이 생긴다면 죗값을 10%정도는 디시해줄 마음은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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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하지도 않던 멋부리기에 쇼핑까지 해버렸다.
게다가 분당부터 서울까지 왕복을 하고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곤하지 않다?
내 피부는 더 없이 뽀송뽀송 윤기가 좌르르르 흐른다.
짐작 가는 바는 역시 업진살.
입 안에서 살살 녹는 업진살의 권능이다.
무시 못할 돈의 힘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솔직히 조금은 피곤하지만 나태하게 있을 수는 없지.'
약간의 피로와 포만감이 육체에 귀차니즘을 선사한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방심하면 안된다.
방심은, 나태는 정신을 좀먹는 법이다.
한 번 시작하게 된 이후 매일매일 빠지지 않았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이행한다.
여섯 시가 되자마자 탄천로를 따라 조깅길을 나섰다.
길고양이와의 약속도 있으니 빼먹기도 곤란하다.
평소보다 느린 페이스로 땀을 흘렸다.
타박.
타박.
업진살 때문에 잊고 있던 피로감이 뒤늦게 찾아온다.
마음 같아서는 여기서 그만두고 싶지만 이미 절반 정도 와버렸다.
어쩔 수 없이 군대에서 노가다하는 심정으로 다리를 놀렸다.
짜증과 서러움이 복받침에도 몸을 움직여주던 무심의 경지.
생각을 버리자 피로도 덜 느껴지는 기분이다.
역시 운동도 노가다도 아무 생각없이 하면 할 만하다.
그렇게 생각없이 뛰다가 무심코 지나칠 뻔했다.
까톡 소리가 울리지 않았다면 정말 그렇게 됐을 것이다.
-메로나는?
오늘 낮 일의 보상으로 메로나를 사주기로 했다.
하지만 메로나는 아이스크림이다.
언제 만날지도 모르는데 사왔다간 당연히 녹는다.
-미침?
메로나 하나 사왔다고 미쳤다는 소리까지 들어야 하나.
그리고 안 어울리게 채팅체 좀 안 썼으면 싶다.
일단 고마웠던 건 사실이니 회유하기로 마음 먹었다.
"메로나는 잘 녹잖아. 가자, 사줄 테니까."
탄천로의 조깅길.
그 위에는 상점들과 확원들로 즐비하다.
아이스크림 살 곳 한두 곳이 없을 리가 없다.
고개를 올려보자 마침 편의점 하나가 눈에 띄었다.
만약 있다면 메로나가 아니라 메론 아이스크림을 사줘도 된다.
오늘 만큼은 흔쾌히 해줄 기분이다.
안타깝게도 아이스크림 전문점은 없었지만 말이다.
딸랑~♬
편의점의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더 걸어서 아이스크림 전문점을 가자고 했지만 싫단다.
어째선지 몰라도 메로나만을 고집한다.
부담되는 거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 막무가내다.
다다다닥!
내가 착각했다.
얘 원래 좀 정상이 아니었지.
두 팔 벌려 가득 안은 메로나들을 계산대에 쏟아 내렸다.
질보다 양을 원하는 타입인 듯하다.
"그렇게 많이 사다간 가는 길에 녹지 않을까?"
설득해 보려 해도 묵묵부답이다.
알바생이 보고 있어서인지 까톡으로 대답도 하지 않는다.
대신에 나를 빤히 쳐다본다.
'얼굴은.. 확실히 반반하네.'
남자든 여자든 머리빨이 차지하는 비율을 상당하다.
길고양이는 후드티를 뒤집어 쓰고 있어 헤어 스타일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피부만 드러난 맨얼굴이 순간 눈길을 사로 잡을 정도로 아기자기하다.
결국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는 심정으로 열 개가 넘는 메로나를 계산한 나는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ㅂㅂ
메로나 봉지를 받아 들더니 그제서야 까톡을 친다.
이 녀석 생긴 건 이래도 인터넷 폐인인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채팅체를 상당히 잘 쓴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간다.
적어도 하나는 줄 거라 생각했는데 시원섭섭하다.
영 모양새는 안 살지만 알아서 챙길 걸 그랬나.
'뭐, 하루이틀도 일도 아니고.'
원러 저런 애다.
그러려니 하고 돌아서려던 찰나.
길고양이가 봉지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졌다.
퍼억!
순간 자세가 무너져 받지 못했다.
메로나로 명치를 맞고 말았다.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다만 메로나가 반쯤 뭉개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중고등학생 때 혹시 야구부라도 한 걸까.
투구폼도 제법이고 투구력도 장난이 아니다.
메로나가 아니라 공이었다면 데굴데굴 굴렀을 수준이다.
'먹기야 할 테지만 참 희한한 여자야.'
그래도 일단 메로나를 주기는 했으니 감사히 먹는다.
지체없이 봉지를 까서 뭉개진 부분부터 먼저 입에 넣었다.
다행히 아직 녹을 시간대는 아니라 나름대로 취식이 가능했다.
'아주 약간 정도는 상식이 있을지도.'
오늘의 일로 하나 깨달은 게 있다.
성격이 많이 삐뚤빼뚤한 거지 나름대로 인정은 있는 듯하다.
은근하게 귀여운 구석이 있을지 모르겠다.
아직까지는 당연 찾지 못했지만 가능성 정도는 보았다.
.
.
.
* * *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러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탈도 많고 봉변도 당하고 트러블도 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았다는 느낌이다.
방식은 많이 비틀어있지만 썸을 타는 걸지도 모른다.
정말 싫어했으면 무시를 했겠지.
단골 미용실에 데려가지도 않았을 거고.
애시당초 아는 척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마음 표현이 솔직하지 못한 고양이일 수도 있다.
'후후, 내가 또 한 소녀의 마음을 울려버렸군..'
남자들끼리 모여있을 때나 칠 법한 드립이 나온다.
당연히 농담이고 점점 알고 지낼수록 여자라기보단 친구라는 느낌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주 나쁜 녀석은 아닌 듯도 싶다.
'오늘 일과는 전부 끝냈고 샤워도 했으니 이제 생각을 정리해볼까.'
오늘을 기해 분기점이 나뉜다.
회장 아재를 반드시 만나려고 했던 데는 그러한 사정도 있다.
이제 더 이상 양학은 하지 않는다.
앞으로 필요한 최소한의 생활비는 벌었다.
방송을 간간히 이어나가기만 해도 충분할 테다.
적어도 굶고 살 염려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예 접기는 또 아쉽고..'
본래 적당히 벌고 깔끔하게 접으려했다.
그런데 상상 이상으로 방송이 흥해버렸다.
이제 양학 컨텐츠를 안 하는 만큼 시청자의 수는 적어질 것이다.
어쩌면 지금이 개인방송의 미련을 버리는 데에 가장 적절한 시기일 수도 있다.
'아니야.. 양학을 꼭 낮은 티어에서만 하란 법은 없잖아?'
발상의 전환이다.
양학을 반드시 낮은 티어에서만 해야 할까?
지금의 내 실력이라면 못할 것도 없다.
다이아 티어에서도 양학, 할 수 있다.
자세한 건 해봐야 알겠지만 가능성은 충분하다.
한동안 조금 더 방송을 이어나가도 될 것 같다.
심해가 아닌 천상계 양학을 컨셉으로 말이다.
그렇게 차근차근 위를 향해 올라간다.
'기다려라 마스터.. 그리고 그랜드 마스터.'
결코 만만한 길이 아니다.
현재 내 본 계정은 현재 다이아3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간간히 만만히 볼 수 없는 이들이 있다.
더욱 더 올라간다면 양학 한다는 기분으로 게임을 즐기기 힘들다.
가장 거슬리는 건 지난 번에 만난 르풀랑 자식.
대체 본 티어가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장난이 아니었다.
AP마검사와 르풀랑의 한타력 차이로 결국 이기긴 했다.
그러나 다음에 또 만난다면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
불리한 상황을 역전할 수 있었던 기반.
그 심리전을 기반으로 한 속임수는 두 번은 먹힐 리 없다.
실제로 한 번 당한 이후로 움직임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게임을 하면서 동시에 성장하고 있다.
그 정도의 센스라면 최소 그랜드 마스터임이 분명하다.
'그런 괴물들이 득실득실 한다 말이지.'
그랜드 마스터 한 명이 고작 그 정도의 실력이라면?
생각 이상으로 힘든 길이 되리란 전망이다.
지금 시대의 그랜드 마스터의 실력은 내가 생각한 이상일지 모른다.
솔직히 말해서 얕잡아 보고 있었다.
미래를 경험했으니 당연히 이길 거라 생각했다.
이제는 더 이상 방심없이 나의 실력을 갈고 닦을 것이다.
진심전력을 다해 올라간다.
그리고 쟁취해 낸다.
최정상, 그리고 영광스러운 프로게이머의 자리를 목표로 한다.
5년 간 씨불얼 게임단의 설거지 노릇이나 하며 숨을 죽여왔던 내가 말이다.
날개가 있되 날 수 없던 새가 도약한다.
처음으로 세상을 향해 그 날개를 펼친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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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재밌게 봐주시는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실망스럽지 않은 작품되지 않도록 노력할께요.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