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뻗치는 망신살
'대회는 잘 풀리는데 이상하게 현실 일은 수월하지가 않네.'
싸가지 없고 메로나를 유난히 좋아하는 그녀.
예은과의 연락이 닿지 않는다.
아니, 어제 나갔던 탄천로의 조깅에서 뒷모습을 본 것 같기도 한데.
후드티를 입고 있는 작은 몸집의 처자, 피곤해 보이는 듯한 뒷모습.
단박에 알아 보고 쫓아갔다.
분명 그녀다.
그런데 내가 다가가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천적에 쫓기는 사슴처럼 재빠르게 도망갔다!
'내가 걔를 무서워했으면 무서워했지, 솔직히 걔가 나를 보고 도망갈 일은 상상이 안되는데….'
뒤를 돌아보지 않았던 것도 그렇고 나때문에 도망갔다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혹시나해서 카똑을 보내봤지만.
'심지어 읽씹도 아니고….'
이 싸가지녀가 읽씹하는 걸 한두 번 본 게 아니니 그러려니 한다.
하지만 이번엔 읽씹이 아니라 아예 읽지를 않았다.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걸까.
차라리 눈에 띄지라도 않았으면 걱정이라도 안 할텐데.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제 곧 LCL의 8강 무대가 시작된다.
로드 오브 로드 챌린저스 리그가 괜히 8강부터 시작이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다.
오프게임넷과 파프리카TV등 인터넷 동시중계의 시청자수가 16강의 배이상 늘어난다.
더욱이 이번 대회는 스프링시즌때보다 롤유저수도 늘었고 LCL 참가팀의 퀄리티도 높아져 롤챔스급 이목을 모으고 있다고.
물론 준비는 충분히 끝마쳤다고 자부하지만 경기를 치뤄보면 변수가 생길 수도 있는 노릇이다.
잠깐 딴 생각 하다 실수라도 해버리면 큰 일로 번질 수 있기에 진지한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한다.
예은의 일은 잠시 잊고 경기에 집중을.
-올마스터님, 아직 한 명 안왔습니다.
이제 곧 1시간도 안되어 8강의 첫 경기가 시작된다.
최소한 2시간 전에는 만나서 점검을 하기로 약속한 우리팀이다.
주장으로서 연락을 해야 할까.
근데 이 녀석의 카똑 번호는 나도 모르는데.
다른 팀원들 중에는 연락닿을 사람이 있을리가 없다.
그래도 혹시나해서 인간조아라님께 말을 여쭈려던 찰나.
제 이름부르기 무섭게 리뮤 녀석이 접속했다.
-나 왔어..요.
보이스 채팅으로 들려오는 어색한 존댓말.
얼마나 익숙하지 않은 건지 아직도 '요' 자 붙이는 게 한참은 늦는다.
내가 리뮤와 친하기는 해도 한 마디 해야 하는 상황이다.
나만 기다리는 거면 그러려니 봐줄 수도 있겠지만, 다른 세 팀원들의 시간을 허비하게 만든 꼴이니까.
팀의 주장으로서, 그리고 리뮤와 친하기때문이라도 가만 넘어가서는 안된다.
'그래도 일단 참아야지.'
괜한 불화의 불씨를 만들엇다가는 서로 자존심에 균열이 갈 수도 있다.
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똥강아지같은 녀석이 갑자기 발작이라도 일으킨다면 난 도저히 말릴 자신이 없다.
풀더라도 8강이 끝나고서 천천히.
리뮤 녀석의 속사정도 들어보며 시간을 투자하는 편이 안정적이다.
다행히 팀원들 하나하나가 이해심이 깊은 사람들인지라 당장 불만을 토로해오지 않았다.
'그래도 구하는 편이 날 지도 모르겠는데….'
세상엔 만에 하나라는 게 있는 법이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대체로 적중한다는 속담이 걸린다.
예비 멤버를 하나 영입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
그러고 보면 LCL 참가때문에 리뮤 녀석을 찾았을 때도 꽤 오랜 시간 게임에 접속하지 않았다.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기에.
인맥넓은 인간조아라님께 말해서 준비를 해둬야겠다.
-그럼 시간 관계상 간단하게 컴퓨터 상대로 A.I전 하면서 손가락만 풉시다.
스킬샷의 범위나 사거리라는 게 감에 의존해서 쓰는 경우가 많은 만큼, 대회 시작 전에 손을 푸는 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다고 일반게임이나 팀랭크를 하다간 운나쁘게 멘탈 상할 경우가 있어, 칼폭풍 협곡에서 많이 한다.
하지만 오늘은 리뮤때문에 시간을 잡아먹어 A.I전으로 대체했다.
시원하게 고급 A.I를 몰살시키며 손을 풀자 남은 시간은 30분.
때마침 우리를 부르는 대회 진행자의 의도대로 대기실에 들어가 상대팀을 기다렸다.
우리팀보다 5분 정도 늦게 한 명 한 명 들어오는 대망신의 팀.
원래 대기실에서 만나면 인사를 가볍게 주고 받는 게 예의지만 채팅창에는 한 줄도 올라오지 않는다.
'분위기가 싸~ 하군.'
서로가 이미 알고 있다.
양팀 주장의 사이가 안 좋다는 사실을.
물론 잘못을 한 건 내 쪽이 아니지만, 사람이 사람 미워하는데는 원래 이유가 필요없는 법이다.
애초에 나를 LCL에서 짓뭉개기위해 자기 인맥을 불러 팀을 조직했을 대망신.
대기실에서의 태도도 그렇고 확실하다 단정지을 만하다.
그쪽이 그렇게 나온다면 나라고 곱게 봐줄 성 싶나.
─오프게임넷의 게임 진행자 김대한입니다. 양팀 준비가 확인되었으니 바로 게임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언제나처럼 승부의 시작은 밴픽싸움부터.
상대팀의 밴을 쭉 살펴보니 노골적이다.
물론 예상했던 바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탤런까지 밴을 하다니.'
우리팀이 32강에서 한 게임을 눈여겨봤다는 의미다.
탤런에 이어 말카림과 파사딘까지.
이정도까지 한다면 더 볼 것도 없다.
르풀랑을 픽하겠다는 선포나 다름없다.
-저희팀 밴카드 하나 남았는데 르풀랑 죽여야 하지 않을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현 시점의 르풀랑은 Q선마를 하고 죽음의 불타는 손길이라는 아이템을 간다.
통칭 죽불손, 이 아이템은 사용시 적 최대체력이 비례한 데미지와 함께 대상이 입는 마법피해의 양을 증가시킨다.
AP누커라면 더 없이 원할 수밖에 없는 코어템.
르풀랑이 이 아템을 완성하면 타겟팅 스킬들인 QR발화로 적 딜러 한 명을 확실하게 순살시킬 수 있어 위협적이다.
하지만.
'그걸 가게 되면 마나관리가 힘든 데다가, 무엇보다 죽음의 불타는 손길을 쓸 수 있는 건 르풀랑만이 아니란 말이지.'
내가 첫 번째 세트에서 꺼내기로 마음먹은 챔프.
대회게임에서는 나오지 않는 챔프지만 솔랭에서는 간간히 나온다.
죽음의 불타는 손길이 상당히 잘 어울리기로.
잘 픽되지 않는 만큼 알려지진 않았지만 르풀랑을 상대로 상당히 좋다.
르풀랑의 두 가지 단점.
상대를 솔킬따지 않으면 유통기한이 찾아온다는 것과 라인클리어의 부재.
AP아이템만 올려도 몸이 단단해지는 마법같은 탱킹과 입이 떡 벌어지는 라인클리어가 있는 그 챔프로 카운터치기에 알맞다.
더욱이 르풀랑은 라인전 강하기로 손에 꼽는 챔프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선택한 챔프는 1,2위를 다툰다.
그럼에도 안 쓰이는 이유.
여느 비주류 챔프가 그렇듯, 낮은 구간에서는 꾸역꾸역 쓰는 장인들이 존재하지만 마스터 티어대에서는 볼 수가 없다.
르풀랑 이상으로 유통기한이 심하다는, 라인전의 장점을 상쇄하고도 남을 뼈아픈 단점이 있기에.
내가 심해양학을 할 때 맛들려 사용하다가 점수가 올라가니 버린데는 이유가 있다.
그러나 르풀랑을 상대로는 이만한 챔프가 없다고 나는 단언한다.
대부분의 챔프가 르풀랑의 QR견제에 몸서리치다가 발목 한 번 삐끗하면 발화에 킬각을 내주게 된다.
실력이 있는 자라고 실수를 안하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이 챔프를 할 때는 그럴 걱정이 전혀 없다.
르풀랑과 나.
서로가 똑같이 유통기한이 있는 챔프라면 라인전이 이길 수 있는 내 쪽이 남는 장사다.
게다가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
'크큭, 로밍좋기로 이만한 챔프가 없으니까.'
대망신 팀의 결정적인 약점을 후벼파고 후벼 판 다음 고춧가루와 굵은 소금을 뿌려서 박박 문지를 거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지옥을 맛보여주마.
.
.
.
* * *
톡.
톡.
톡.
이제 잠시 후면 올마스터 녀석과의 악연에 종지부를 찍을 경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이번 대회를 계기로 나 대망신은 로드 오브 로드 최고의 BJ 중 하나로 떠오를 것이다.
도진기라는 에이스 카드에 더불어 다른 팀원들의 실력들도 수준급.
잘 될 수밖에 없는 수준의 팀이라 의연하게 있고자 했지만 괜시리 마음이 조급해진다.
내가 직접 하는 게 아닌 타인에게 과정을 맡겨야 하기에.
그리고 그 타인이라 할 수 있는 도진기가 내 사람도 아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긴장해서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치고 있었다.
세상엔 혹시라는 게 있다.
그래서 나는 한 가지의 보험을 준비했다.
물론 내가 그 보험이 그릇된 일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두고 볼 수만은 없다.
최소한의 자존심.
무엇보다 도진기 녀석만 믿고 있어서는 안심이 안된다.
띠리링─!
기다렸던 전화.
드디어 울린다.
이번 대회를 확실하게 가져올 수 있는 한 수를 부탁했다.
-망신아, 일단 세팅은 해뒀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그마카림.
지난 번 올마스터 버그의심 사건때 같이 일을 벌였던 친구지만 이번 LCL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라인이 겹친다는 이유로.
결정적으로 우리팀의 상당 수가 내 인맥으로 불러 들어온 이들이기에 내가 움직이는 게 형평성에 맞았다.
어찌됐건 나는 이렇게 현장에서 도진기 자식한테 무시까지 받으면 뛰고 있는데 그마카림 녀석은 놀고 있는 셈이다.
친분을 제쳐 두고라도 그마카림은 내 부탁을 거부할 입장이 아니다.
때문에 한 주문.
"…할 수 있겠지?"
-아니, 야. 솔직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걸리면 어떻게 해..?
나중따위 걱정한다면 애초에 일을 벌이지도 못하는 법이다.
걸릴 일따위 만들지도 않을 거지만.
'완전 범죄.'
걸리지 않으면 범죄가 아니다.
그리고 누가 처음부터 쓴다고 했던가.
어디까지나.
"비장의 카드야. 도진기가 제대로 역할만 해준다면 쓸 일도 없어. 그러니까 일단 준비해놔."
-하아.. 너 믿고 진행해볼게. 근데 진짜 잘해야 한다?
누가 누구한테 걱정을 하고 있냐, 띨빵한 녀석.
내가 언제 실패한 적이 있어야지.
올마스터의 버그 사건을 일으킬 때도 녀석의 대처가 조금 빠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상당한 이득을 취하지 않았던가.
시청자 수라든지 수익이라든지 여러가지로.
-네 말이 맞다. 니가 하잔 대로 해서 손해본 적은 없었지, 나한테 맡겨둬.
이제야 말귀를 알아 듣는다.
멍청하고 소심한 것만 빼면 괜찮은 놈인데.
가끔 사람 답답하게 만드는 그마카림이다.
'성공만 한다면.'
해내겠다는 확답을 받은 나는 전화를 끊고 계획을 정리했다.
그마카림이 제대로 해준다면 설사 도진기가 제 역할을 못한다 하더라도 확실하게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
애초에 그럴 수밖에 없는 방법이다.
'가능하면 안 쓰는 편이 좋겠지만.'
만에 하나라는 경우때문에 조금 껄끄럽다.
걸리기라도 한다면 장난으로 끝날 짓은 아니니까.
그래도 일단.
'100% 이긴다는 게 중요하지.'
오늘 이 LCL에서 빌어먹을 올마스터 자식을 숙청한다.
파프리카TV에 발도 못 붙이게 할 것이다.
녀석과의 악연을 마무리 지을 시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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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부탁드려요!
부족한 작가를 위해서 쿠폰 보내주시는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개연성 많이 신경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