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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치고사
'즐겜, 진짜 하고 싶었지.'
솔직히 그간 답답했다.
파프리카의 인기BJ가 됐을 때 한 번.
그리고 LCL에서 활약하며 일약 깜짝스타가 됐을 때 또 한 번 느꼈다.
유명해졌다는 사실 자체는 기분 좋은 일이지만, 그 만큼이나 나를 옭아매는 족쇄가 두터워 졌다.
엄밀히 따지자면 눈초리일까.
반듯하고 좋은 모습만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때문에 오직 효율이 좋은 챔피언들만 골라서 플레이해야 했다.
내가 모든 챔피언을 마스터급으로 다루게 된 이유.
비단 챔프폭을 늘리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는데.
나는 로드 오브 로드라는 게임 자체에 애정이 있다.
여러 챔피언을 하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게임을 잘해졌고 늘어난 실력을 바탕으로 프로게이머를 꿈꾸게 됐다.
결과적으로 5년간 연습생에 머물었다는 슬픈 과거가 존재하지만 내가 모든 챔피언들을 좋아한다는 건 진짜다.
롤에는 사실 효율은 좋지 않아 사용하기 힘든 챔피언들이 많다.
어느 정도냐면 게임사가 아예 포기한 챔프들도 여럿 보인다.
그 중에는 아예 리메이크가 되어 사라지는 것들도 존재한다.
그렇기에 사라지기 전에 반드시 다시 해보고 싶다.
예를 들자면 럼주를 유독 좋아하시는 귤선장님도 꼭 한 번 해보고 싶다.
그것도 조금 진지하게!
물론 프로게이머로서 빨리 성공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급할수록 돌아가라 했던가.
가끔은 기분전환도 필요한 법인 데다, 서두르지 않고 멈춰 섰을 때만 보이는 것도 있는 법이다.
내가 알고 있는 꿀챔프들을 제외하고도.
직접 해보면 달리 보이는 것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타임끝이 하던 미포정글.
아무리 트롤같아 보여도 그랜드 마스터에서 사용될 정도면 은근히 괜찮은 면이 존재하다는 뜻이다.
사기챔프라고까지는 볼 수 없겠지만, 미포정글을 제외해도 분명 괜찮은 챔프가 한두 개는 존재할 터.
CLC와의 계약 덕에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했으니 조금은 천천히 올라가도 괜찮을 것이다.
마음같아서는 빡겜을 돌려서 수직상승하고 싶지만, 결정적으로 언어의 장벽이 나를 막는다.
어떻게 넘을까,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디 높은.
공부때문에 받을 스트레스 게임까지 일이라 생각하며 한다면 내 정신이 못 버틴다.
'그래도 로드 오브 로드 음성은 알아들을 만하던데.'
소환자의 전장에서 간간이 울려 퍼지는 여성 성우의 목소리는 이제 익숙할 정도다.
영어 대사도 다 기억했다.
특히나 An Ally has been slain.
아군이 당했습니다는 들을 때마다 소름이 돋는다.
성우의 목소리가 구슬퍼서 한 번, 그리고 갱킹까지 가줬는데 솔킬을 따이는 아군에게 한 번 더.
하지만 호텔에 도착하는 동안 들었던 현지인들의 대화는 바로 옆에서 듣고 있어도 무슨 말을 하는지, 한 마디도 못 알아듣겠다.
감도 안 잡히는 언어의 장벽을 넘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져 온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역시 떠넘기기.
'골치 아픈 공부는 내일의 나에게 맡기자.'
노력해줘, 내일의 나!
오늘의 나는 배치고사 10연승을 한 것만으로도 기특하다.
영어로 된 채팅과 음성을 들으면서 배치고사를 끝까지 치루니 어지러울 지경이다.
'밥 먹고 한숨 푹 자야지.'
비행기 안에서 충분한 숙면을 취했기에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졸음이 밀려온다.
고작 게임 10판했다고 체력이 떨어질 내가 아닌데.
이런 걸 보고 시차적응이라고 하는 것 같다.
현재 한국 시간은 완전 새벽이니 그럴 만도 하지만.
'식당이 2층이라고 그랬나.'
상혁씨에게 직접 안내까지 받은지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았 건만 기억이 가물가물.
직접 가봐야 떠오를 듯 하다.
나는 5층에 있는 내 객실에서 나가 계단 쪽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타도 되는 일이지만, 운동 겸해서 천천히.
한동안 이 호텔에서 살게 될 것같으니 내부구조에 익숙해져서 나쁠 건 없다.
2층에서 식당을 찾는 건 의외로 어렵지 않았다.
상혁씨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사실 기억은 잘 안났다.
하지만 사람들이 향하는 방향으로 발길을 옮기니 간단한 일.
뭐, 진짜 문제는 따로 있지만서도.
'키카드를 보여주면 된다고 했지?'
얼굴도장을 찍으라느니.
대화도 한 번씩 시도를 해보라느니.
내 영어교육을 맡은 상혁씨의 주의가 얼픽 기억도 나지만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게 전부다.
"히얼!"
식당의 카운터에 있는 여직원에게 한 마디 외침과 함께 건네는 키카드.
혹시 못 알아 들으면 어떡할까.
노심초사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Thank you~."
내가 영어를 못한다는 사실을 캐치했는지.
여직원은 키카드를 확인하고 미소와 함께 나도 알아들을만한 간단한 인사로 화답해온다.
친절도 하여라.
억지 미소 한 번 지어 화답해주고.
여직원에게 다시 키카드를 건네받은 나는 식당 내부로 들어갔다.
꽉 찰 정도는 아니지만 두런두런 테이블에 모여 식사를 즐기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여기에 모여 있는 모두가 외국인이라고 생각하니 긴장이 된다.
현재 시간은 로스앤젤레스의 시간으로 낮 12시.
점심시간이니 만큼 사람 북적이는 거야 당연한 노릇이지만.
'눈치 볼 것 따위 없겠지.'
어차피 남남인데 신경써서 무엇하랴.
나는 내 인생 행복의 반이상을 차지하는 식사가 잘 갖춰져 있나 눈을 돌렸다.
상혁씨에게 안내를 받을 때도 느꼈던 사실이지만 이곳 시설이 제법 괜찮다.
식당 중앙에 일렬로 정렬 돼 있는 샐러드바.
가지런히 쌓여 있는 고기류까지.
부페식으로 마음껏 퍼먹으면 되는 듯 하다.
매끼 이곳에서 신세를 진다고 생각하니 호화스럽게 느껴지지만 중요한 것 맛이다.
내가 입맛이 까탈스럽지는 않아도 느끼한 건 못 참는다.
'어, 이거 한국음식 아니야?'
이 호텔의 오너가 한국인이라고 했던가.
딱 봐도 입맛에 안 맞아 보이는 음식들도 존재하지만 익숙한 음식들도 제법 보인다.
탕수육, 비스무리하게 보이는 튀김도 있고.
영어 팻말로 soy sauce 어쩌고 써있는 장조림같은 음식도 있다.
한국 음식 중에서 가장 인기가 많다는 불고기까지!
더군다나 한국인들을 위해 신경을 썻는지 김치 또한 존재한다.
완전 한국음식은 아니고 나름대로 미국인들의 입맛에도 맞게 어레인지 된 것 같지만 그게 또 나쁘지 않다.
'지금 보니 한국인들도 꽤 섞여 있네.'
고향의 음식과 함께 하는 여유로운 식사 시간.
자리에서 천천히 식사를 하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동양인으로 보이는 사람들 중 한국인이라 생각되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여행을 온 건지, 아니면 나같은 장기투숙 손님인지.
간간히 들려오는 목소리에선 한국어로 생각되는 음성도 섞여있다.
나는 CLC에서 그냥 신경을 써줘서 이곳에 왔지만, 이 호텔 자체가 한국 관광객들에게 제법 알려진 곳일 지도 모르겠다.
'밥먹을 친구 한 명 있으면 딱 좋은데.'
언제까지 혼자 밥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나랑 비슷한 사정을 가진 사람 한둘 있으면 미국 생활도 할만해질 것 같다.
지금은 눈꺼풀이 무거운 와중인지라 말걸을 정신이 아니지만.
천천히, 시간을 두고 마음이 통하는 친구 한 명 사귀어도 되는 일이다.
이국 생활을 같이 헤쳐나갈 마음이 파트너.
여자로 한 명 있으면 좋겠지만 당연히 없겠지.
'내 팔자에 무슨 여자는 여자.'
그렇게 한 번 된 통 당해 놓고 정신을 못 차리다니.
한동안은 고독을 음미하며 지난 날의 나 자신을 반성하자.
배가 가득 찰 때까지 배터지게 밥을 먹으니 노곤하게 밀려오는 졸려움.
5층의 객실로 올라간 나는 쓰러지듯 잠에 빠졌다.
.
.
.
* * *
─아르바이트?
"네, 부탁드려요. 이모."
미국에서의 유학 생활.
공부도 착착 진행되고 있고.
딱히 불편한 것도 없지만 주말이 되니 느슨해지는 게 문제다.
같이 어학연수를 온 동기들은 어디 놀러가자고 성화.
하지만 난 이곳을 빨리 벗어나는 게 목표다.
유학생활을 즐기며 천천히 시간을 보내는 방법도 있겠지만 아까운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
하루라도 빨리 목표했던 점수에 도달해 다시 한국에 돌아갈 테다.
자습실에라도 들어가 가만히 공부하고 싶어도 떠드는 애들이 어쩜 이리 많은지.
유학 온 건지, 놀러 온 건지 모를 지경이다.
방에 들어가 공부를 할까도 싶었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혼자 있으면 손이 근질근질하다.
북미에도 로드 오브 로드 서버가 따로 있다고 하던데.
온갖 유혹이 나를 괴롭힌다.
그래서 시간도 잘 가고, 영어에도 도움이 되는 알바를 생각해냈다.
─괜찮겠어, 예은아? 호텔알바는 힘들 텐데.
이모는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 근방에 살고 계신다.
저번 주말에는 이모를 뵙는 걸로 시간을 떼웠지만, 다가오는 주말도 그래서야 볼 낯이 없다.
"잘할 수 있어요. 이곳 생활도 제법 익숙해졌는 걸요."
영어는 특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이 있다.
처음엔 본토 발음에 조금 놀라 어버버 했던 부끄러웠던 기억도 존재한다
그래도 이제는 충분히 일상적인 회화는 문제가 없다고 자부한다.
필요한 건 경험 뿐.
그 경험을 아르바이트를 통해 차근차근 쌓아나갈 계획이다.
─그래도 일단, 이모는 예은이가 걱정도 되고 으음, 어쩌면 좋을까.
부모님처럼 나를 속박하려 하시는 분은 아니지만 나에 대한 조금 걱정이 과하다.
혹시 이모가 허락을 안 해주면 어떻게 아르바이트를 구해야 할까.
방법을 생각하던 와중에, 한참을 고민하던 이모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호들갑을 떨어왔다.
─어머어머. 내 정신 좀 봐. 이모 친구가 근처에 호텔을 운영하거든? 거기로 괜찮을까?
한국사람이 운영하는 호텔이라니.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한국 사람들이 자주 찾아오는 호텔이란다.
한국 사람들 많으면 공부에도 방해되고 쓸데없이 한국말 쓰게 되는데.
다른 곳은 안되냐고 사정사정 해봐도 그곳 말고는 절대 안된다고 완강히 고개를 저으신다.
─내 딸같은 예은이를 어찌 모르는 사람들한테 보내니? 한 번 해보고, 마음에 안 들면 그만두면 되지. 그치?
미국 온지 얼마 안되는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LA의 치안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며.
내가 있는 곳은 어학연수에 온 학생들이 많아 치안이 괜찮아도, 조금만 벗어나면 무법지대가 따로 없다고 잔뜩 겁을 주신다.
이모가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분명 이유가 있겠지.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도 있긴 해도 나를 아껴주는 이모의 말씀이니 귀담아 들을 가치가 있다.
"저 한국 여행객 안내같은 건 질색인데…."
─예은아. 이모 알지? 능력있는 거 이모만 믿어!
아랫층에는 한국 여행객들이 자주 오지만, 현지인이나 다른 나라의 투숙객들을 배려해 5층 이상에서는 한국인을 안 받는다고.
있다고 해도 장기투숙으로 일 차원에서 머무는 사람들이라 미국생활에 익숙하니 불편한 일은 없을 거라는 이모의 설명.
지금까지 이모 말 들어서 손해 본 기억은 없지만 그래도, 경험삼아 한 번 그 호텔에 가보고 판단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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