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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천상계로
한국에서 미국으로.
갑작스레 변해버린 환경.
그나마 친숙하다고 할 수 있는 게임을 하면서 한숨을 돌렸다.
하나하나 떠오르는 밀렸던 숙제들.
한국에서 떠나올 때 미처 정리하지 못한 것들이 있다.
솔직히 말해서 나로서는 미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가만히 잠수를 타는 게 편하다.
그냥 말없이 침묵하는 것이 어찌 보면 하나의 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된다.
사람으로서의 최소한의 도리.
입바른 소리가 아니다.
받은 만큼 돌려주지는 못할 지라도, 최소한 걱정을 시켜서는 안되는 노릇이다.
"예, 회장 형님…."
시간이 좀 많이 지나긴 했다.
LCL의 결승전이 끝나고서 부터 거의 2주.
변명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지만 나에게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내 파프리카TV 개인방송 최대의 후원자 회장형님.
그리고 사실 이 분이 없었더라면 내가 처음에 자리잡을 시간이 배이상 늦어졌을 것이다.
어쩌면 LCL이라는 기회도 잡지 못했을 수 있다.
지금의 내가 CLC와 계약해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은 큰 부분 형님의 덕이다.
인성적인 면에서 내가 올바른 사람은 절대 아니지만, 의리는 지키는 게 남자의 자존심이다.
언젠가 반드시 회장형님에게는 이야기를 꺼내고자 하긴 했지만 좀처럼 타이밍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 마음의 결심을 최대한 빨리 매듭 짓고자.
조금 더 나중에 이야기도 해도 되겠지 하며 자기합리화를 떠올리기 전에 곧장 형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으면 어떡할까.
고민도 했지만 다행이 전화 밸이 세 번 울리는 동시에 회장형님 쪽에서 반응이 있었다.
"예, 예. 그렇게.. 됐습니다."
솔직하게 말할까도 생각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딱히 숨기고자, 그리고 회장형님을 못 믿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회장형님은 좋은 사람이다.
그런데다 나를 상당히 아껴준다.
비유가 아닌 정말로.
친동생처럼 나를 여겨주시고 신경써주신다.
만약 내가 이런 외지에서 프로게이머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하면 형님이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단순하게 출세를 했다고 생각하실까.
내 마음 조금 편해지고자 사정을 터놓는 일은 하지 못한다.
회장형님도 내가 LCL 결승전에서 패배하고 말았다는 사실은 알고 계신다.
그런데 갑자기 내가 미국에서 프로게이머를 한다고 하면 좋은 쪽으로 해석하기 힘들다.
CLC 과연 어느 정도의 팀이신지도 모를 테고, 내가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아무리 설명을 한들 안 좋은 쪽으로 받아들이실 수 있다.
이기고 갔으면 모르되, 지고 가버렸으니까.
형님 입장에서는 분명 외지에서 힘들게 고생하고 있다고 생각하실 터다.
어른들이, 특히나 부모님이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이 으레 그렇다.
실제로 CLC와의 계약을 맺고서, 부모님에게 보고차 말씀을 드렸을 때 어찌나 걱정을 하시던지.
연락을 끊은 정도는 아니여도 나 하는 일에 크게 터치를 안 하시는 방관주의의 부모님조차 만류를 하셨다.
결코 인사치레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는 사실은 목소리에서 알 수 있었다.
괜찮다고, 대우도 엄청나게 좋고 무엇보다 내가 잘 할 수 있다고.
설명을 하는 것이 어찌나 힘들었는지, 한국에서의 생활 청산하는 것보다 부모님 설득하는 쪽에서 진땀을 뺐을 정도다.
그런데 형님이라면.
조금은 과하게, 가끔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판 남으로 지냈던 나를 친동생처럼 챙겨주는 형님은 더욱 과하게 걱정하실 게 분명하다.
그렇기에 선의의 거짓말로서.
나는 회장형님에게 유학을 가있다고 말씀을 드리기로 마음먹었다.
─마! 네 대갈빡에 꼬부랑 글자가 들어가겄나!
"아니, 형님! 저 못믿으십니까? 아이디부터가 영어, 올마스터에요!"
장난스런 말투.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는 사실은 느낄 수 있다.
내가 회장형님이랑 지낸 시간이 솔직히 길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정도 쯤이야 당연히.
─그래, 몸조리 잘 하고. 형님이 언제 바캉스 겸 해서, 미국 놀러 간다, 마!
"네, 형님! 오실 때 꼬옥 말씀해주세요. 제가 공항으로 반드시 모시러 가겠습니다.
이럴 줄 알았다.
모르긴 몰라도 내가 여기서 일로 왔다는 사실을 아셨으면 분명 당장에 찾아와서 내 숙소부터 찾아왔을지도 모르시는 분이다.
과장이라 생각할 수 있어도, 형님이라면 정말 그래도 이상하지 않다.
아니, 진짜로 그랬을 거다.
"휴우…."
직접적으로 말씀은 안 하셨어도 섭섭하시다는 것 정도는, 굳이 내색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하지만 네가 그러한 결정을 내렸다면 분명 그럴만한 까닭이 있겠지.
회장형님은 말씀을 줄이셨고 통화는 일단락됐다.
전화를 걸기 직전까지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그래도 막상 전화를 거니 시원하게 받아주신 덕에 한시름 놓았다.
역지사지 하자면 충분히 맘 상할 수 있는 일임에도 나부터 생각해주시는 형님.
다시 한국에 돌아가는 날이 오면 반드시 사실을 말씀드려야지.
'그러기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그랜드 마스터, 그리고 기본적인 회화능력.
북미서버에서 배치고사부터 차근차근 올라가고 있기에 북미메타에 적응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지만, 아무래도 진짜 문제가 되는 건 후자다.
영어공부를 어떻게 해야 할지 차암.
'누군가 비슷한 입장에서 같이 공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참고해서 물어보고 배우면 좋을 텐데.
공부라는 것도 사실 요령이다.
학창시절에 내가 공부를 아예 못하지는 않았다.
'으음..! 안 했던 거지. 난 하면 되는 아이니까!'
썩 알아주는 대학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일단 대학 진학도 했다.
군전역 이후로 쭉 휴학인 상태.
그 전까진 영어공부도 어느 정도 했던 것 같기도 하지만.
'군대가 죄지, 죄.'
남자가 군대를 갔다 오면 머리가 리셋이 된다.
알고 있던 지식만 사라지면 좋은데 공부를 하는 방법조차 가물가물해진다.
옆에서 같이 공부하면서 가르쳐줄 친구가 한 명.
'아니, 밥먹을 친구조차 없네….'
상혁씨에게 이 부분도 진지하게 상담을 해야 할 것 같다.
토끼는 외로우면 죽어버린다고 하던데.
내 생명력은 워낙 질기고 강해서 그럴 일은 없겠지만 다소 마음에 상처정도야 입으니까!
바퀴벌레도 마음에 상처, 입을 수 있다.
아마도….
'지금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건.'
로드 오브 로드.
천천히 점수를 올리며 동시에 영어채팅에도 익숙해지도록 노력한다.
처음에는 전혀 못 알아 들을 것 같던 채팅들도.
이젠 짤막한 오더 정도야 느낌상으로 대충 알 수 있는 것도 같다.
이런 면에서 보면 심해에서부터 편안하게 점수를 올리는 것은 괜찮은 판단이었다.
슈퍼계정의 특색을 활용해 처음부터 천상계 구간에서 시작했다면 한 판, 한 판 이기는데 바빴을 테니.
당장 올라가는 것보다는 북미메타, 그리고 분위기에 차근차근 적응하는 것이 지금의 나에겐 더 중요하다.
그렇게 생각을 마무리지은 나는 다시 로드 오브 로드에 접속해 큐를 돌렸다.
오늘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내가 플레이 할 챔피언은 정해놨다.
솔직히 조금 느린 감은 있다.
이미 솔랭에는 조금씩 화제가 되고 있고, 롤챔스에도 곧 나오게 되는 픽이니 만큼.
'AP애꾸사자!'
본디 암살자로 기획된 챔피언.
하지만 그 성능이 너무나 애매해, 대체 어떻게 사용할지 아무도 감을 잡지 못하던 시점에 의외의 해법이 나왔다.
주문력템을 올려보니 상당히 괜찮더라.
이 애꾸사자라는 챔피언의 스킬 중 AP계수가 달린 건 오직 W스킬, 야성의 외침 뿐.
CC기로서의 효과만 없을 뿐이지 주위에 범위데미지를 주는 리심의 땅치기와도 비슷한 판정의 스킬이다.
그런데 애꾸사자는 스킬구조가 조금 특이해 이것을 두 번 연속해서 쓸 수 있다.
마나코스트가 아닌 분노코스트라는 독특한 특징의 챔피언.
스킬을 사용할 때마다 분노게이지가 하나씩 모이고, 총 다섯 개가 모이면 똑같은 스킬을 한 번 더 사용할 수 있다.
1.0AP 계수가 있는 W스킬, 야성의 외침을 연달아 터트려 버린다.
코어아이템 죽음의 불타는 손길까지 더해지면 웬만한 딜러는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게 만들 수 있는 위력.
그러면 라인전이라도 약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분노코스트라는 게 사실상 노코스트에 가깝기에.
다른 챔피언들이 마나가 아까워 스킬을 쓸지 말지 고심을 할 때 애꾸사자는 마음껏 스킬을 퍼붓는다.
게다가 야성의 외침을 사용하면 방마저와 더불어 체력까지 회복돼 라인유지력 또한 꿇리지가 않는다.
명실상부한 사기챔프.
덕분에 곧 너프를 먹긴 하지만.
'그 놈의 마크눔.'
그 사기성을 빠르게 간파하고 롤챔스에서 사용해버렸다.
꿀챔보는 눈 하나는 기가 막혔던 프로게이머.
내가 아는 미래에 의하면 곧, 그것도 며칠 후면 사용하게 될 것이다.
애꾸사자의 사기성을 내가 처음으로 선보이지 못하게 되는 것은 조금 아쉬운 일.
하지만.
'애꾸사자의 진정한 모습은 하나가 아니란 말이지.'
애꾸사자, 그리고 카지트.
두 챔피언 모두 정말 손에 꼽기 힘들 정도의 너프 역사를 가졌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오뚜기처럼 일어난다.
애꾸사자가 AP암살자로서 너프를 먹게 될 지라도 끝이 아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
변신은 고작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꿀을 쪽쪽 빨 날이 기대가 되는 노릇.
그래도 일단.
'AP애꾸사자부터 즐겨놔야지.'
그 놈의 마크눔이 롤챔스에서 AP애꾸사자가 꿀챔프라고 소문을 다 내놓은 탓에.
대회에 나오고 고작 10일만에 급너프를 먹게 된다.
그 후로 한동안 고인이 되는 챔피언.
내가 오늘 낮에 플레이했던 귤선장은 솔직히 챔피언 성능이 구리다.
그냥 잠깐 한숨 돌릴 겸, 정말 순수하게 재미로 했지만 애꾸사자는 아니다.
AP애꾸사자는 명실상부 시즌2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사기 챔피언이다.
그런 주제에 재미까지 찰지다.
하지 않을 이유가 없을 정도로.
'한동안은 내가 재밌는 챔프 위주로 천천히 가보자.'
귤선장 또한 결코 이유없이 한 게 아니다.
게임이라는 건 결국 하는 사람이 재미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최근 게임이 일이 돼버리면서 마우스가 잘 잡히지 않았다.
아무리 즐기던 것이라도 직업이 되고 나면 흥미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지지자불여호지자 호지자불여락지자라 하셨다고 한다.
지지지지 뭔 소리인지도 모르겠는데 담겨있는 깊은 의미를 내가 이해할 수 있을 쏘냐.
하지만 하나 정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은 있다.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
지금의 나처럼 외딴 나라에 와 친구도 없이 혼밥하면서 기분 꿀꿀할 때 노력한답시고 게임만 하다보면 어느샌가 뚝 막혀버린다.
물론 사람이 항상 즐기는 식으로 임할 수 는 없는 노릇이지만 잠깐 정도는 기분전환을 해도 될 터.
재밌으면서 효율까지 괜찮은 챔피언들.
하나하나 분석해보며 천상계까지 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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