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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천상계로
식당에서 재밌는 소문을 하나 들었다.
소문의 출처는 이제 제법 친해졌다고 생각하는 식당 카운터의 여직원.
'그렇게나 예쁜 여자가 왔다던데 그것도 한국인.'
2시쯤에 와서 식사하고 갔는데 한국 남자 직원들이 사이에서 그렇게나 화제란다.
연예인 누구누구 닮았다며 서로 싸우고 난리가 났다면서 장난스레 이야기를 꺼내는 그녀.
자신도 봤지만 눈이 동그랗게 떠질 만큼 아름다웠다고 한다.
지나가듯 시작된 대화는 꽤나 길어졌다.
원래라면 직원인 그녀와 이렇게 말을 오래 할 짬은 나지 않지만.
점심 시간 아슬아슬하게 맞춰 온 덕분에 손님이 적어 꽤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어찌 됐건 나야 좋은 일.
아무리 예쁜 목소리로 나에게 속삭인다고 한들, 영어로만 말하면 나는 못 알아듣는다.
때문에 그녀는 손짓 몸짓까지 벌여가며 설명해줬다.
눈치껏 대충 무슨 말을 하는지 파악하며 고개를 끄덕끄덕.
이게 참 사람이 그러면 안되는데.
보디랭귀지 와중에 그녀의 표정 변화가 어찌나 다양한지 그만 실소가 나올 뻔 했다.
필사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려고 하는 이국의 금발 미소녀는 아빠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흐뭇하기 그지 없는 광경.
사실 그녀가 미소녀라고 하기에는 솔직히 조금 부족한 감은 있지만 워낙 활동적이고 기운차 매력이 넘친다.
내가 알고 있는 누구와는 참 대조된다.
'고년은 어디서 뭐 하고 있으려나.'
예은, 지금 생각해도 이빨이 부들부들 갈릴 지경이다.
갑자기 결승전 직전에 사라진 건 사정이 있을 수도 있으니 그렇다 쳐도.
내가 올마스터라는 걸 다 알면서 모르는 척 했다는 게 괘씸하다.
어떻게 복수할 방법이 없을까.
'어차피 미국에 있는 동안은 글러먹었지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
하루하루 미루다 보면 지난 원한따위 잊어 먹어버릴 지도 모른다.
아니, 내 기억력을 생각해보면 반드시다.
이 사무친 원한이 가라앚기 전에 어떻게 방법이.
'뭐, 당연히 없겠지.'
사람이 홍길동도 아니고.
일단 찾을 방도도 없는데다, 만약 찾는 다 해도 갈 방법이 없다.
난 지금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있는데.
'길가다 떡 하고 마주치기라도 하면 또 모르는 일이지만.'
당연히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애초에 기대도 안 하지만 서도.
그럼에도 만에 하나.
'만나기만 하면 그냥 확!'
귀 싸대기를 확 마!
할 간덩이까진 솔직히 없다.
요즘 세상에 여자 한 번 잘못 때렸다간 발목에 무거운 밴드를 평생 차고 다녀야 할 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무릎 꿇린 채 설교를 2시간 가량 해주마.'
조금 소심한 판결이여도 나로서는 이 정도가 최선이다.
물론 마음같아서는 볼따구를 마구마구 꼬집어버리고 싶지만 서도.
'나도 참 바보같네.'
정작 떠올리고 나니 어떻게 혼찌검을 내줄 고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과는 별개로.
마음 속 한 구석에서는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예은이라는 사실은 정말 최근에 알았지만 리뮤와의 인연은 끈질겼다.
이런 저런 사건들을 겪으면서 미운 정, 고운 정 쌓인 게 많다.
도움을 받은 부분도 분명히 있고.
그런 녀석이 만약 갑자기 사라질 일이 생긴다면 분명히.
'사정이.. 있을 것도 같지만.'
아니다.
사정이 있다고 손 쳐도.
내가 굳이 머리 싸매 이해해줄 이유가 없다.
하마터면 또 바보같이 감성적이게 될 뻔 했다.
다시 만나 해명할 일이 있으며 모르되,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정체도 들통난 마당이니 다시 마주치기는 어지간히 껄끄로울 것이다.
이제는 만날 일도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잊어버리는 게 가장 속편한 일임에도.
그럼에도 왜인지, 까맣게 잊을 수만은 없을 것 같은 떨떠름한 기분이 이상하게 사무친다.
'쓸데없는 생각보단 조금 더 생산적인 생각을 하자.'
앞으로 미국 생활을 헤쳐나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
물자보급.
한인타운에 한 번 들려야 한다.
내가 묵고 있는 호텔이 다른 건 다 괜찮은데 근처의 시설들이 쪼까 아쉽다.
편의점말고는 이렇다 할 음식점이나 매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한 불만을 완벽하게 보완해주는 것이 호텔식당의 퀄리티.
물론 상당히 높다고 인정하지면 아쉬운 점이 두 가지.
'왜 미국에는 이쑤시개가 없을까?'
한국 식당의 카운터에는 반드시 있는 이쑤시개.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미국에선 본 적이 없다.
양치는 한다고 해도 이쑤시개 하나 쯤은 쑤셔줘야 시원한 노릇인데.
그리고 하나 더 아쉬운 게 있다면 국물음식.
국물음식이라는 게 으레 그렇듯, 재료에서 우러나는 독특한 향때문에 호텔같은데서는 메뉴로서 내놓기가 힘들다.
그래도 한국 사람은 국물 못 먹으면 속이 안 풀리는 법인데.
'따끈한 오뎅국물 마시고 싶다.'
종이컵으로 한 국자 퍼먹으면 그렇게 목구멍에 술술 잘 넘어갈 수가 없다.
그렇지만 이 외딴 미국에 포장마차가 있을 쏘냐.
택시를 타고 한인타운에 가야 한다.
일단 이 호텔도 한인타운 구역에 정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으니 만큼 아주 멀지는 않다.
물론 걸어갈 정도까진 아니다.
이 근처 지리를 알면 모르되 내가 가봤을 턱이 있나.
최근에 상혁씨가 놀리듯이 겁까지 준 와중이라 시도할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길가다가 빠앙! 소리 들으시면 바로 도망치세요?>
내가 뭐 정의의 사자도 아닌데 도망갈 준비 하나는 철저히 돼있다.
문제는 총알이 나에게 향하는 경우의 대처법이 없다는 사실!
그래도 하나 다행인 점은 외국인 여행자들은 웬만하면 건들지 않는단다.
그렇지만 혼자 다니다 보면 무슨 일 생길지 모르니 반드시 차타고 돌아다니라고.
그러한 부분에 관해서도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으니, 만약 한인타운 쪽에 물건 살 일 있으면 불러달라고 분명히 말했다.
'생각난 김에 가볼까? 다른 건 몰라도 라면은 필요하지.'
안타깝게도 내 방엔 조리시설이 없다.
식당에서 밥 제대로 나오니 만큼 해먹을 필요야 없지만.
한국인이라면 보글보글 끓인 라면이 가끔은 그리워지는 법.
하지만 끓일 조리시설이 없으니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다.
컵라면으로 대체하는 수밖에.
그 정도로도 충분히 만족이지만.
'따끈한 국물 한 사발, 크으!'
어지간한 물품이야 국제 택배만 이용해도 배달이 가능한 세상이라지만.
적어도 음식은 직접 사먹어야 제 맛이다.
호텔 요리도 맛있지만 감자탕이라든지 곱창이라든지.
내 한국인으로서의 세포가 원하고 있다.
.
.
.
* * *
전화를 걸자마자 30분도 안되어 상혁씨는 곧장 자신의 승용차를 끌고 왔다.
어차피 주말이고 슬슬 전화할 줄 알았다면서.
능글능글한 표정으로 만나자마자 눈웃음을 짓는 게 은근히 밉상이다.
그렇게 쭉 상혁씨의 차를 타고 20분도 안되어 도착한 한인타운.
이 정도면 걸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상당히 가까웠다.
"그래서 길가다 위험한 일 생기는 경우는 정말 없는 거 맞죠?"
"세상사는 게 원래 다 될놈될, 안될안 이잖아요? 그래도 어지간하면 괜찮죠."
될놈은 뭘 해도 되고, 안될 놈은 뭘 해도 안되는 최근 유행어.
농담으로 하는 소린지 알았는데 자신도 여기 살면서 별 일 다 있었다며 이야기를 꺼내왔다.
지나가다 깡패같은 사람들 만나서 돈 뺏긴 적은 예사고.
품에 흉기나 총을 숨긴 듯한 사람들도 은근히 있다며.
"만나면 그냥 주는 편이 낫습니다. 아시겠지만 미국은 총기 합법화 국가잖아요? 성질 잘못 건드리다 한 대 빠앙! 맞을 수도."
그런 이야기를 유쾌한 어조로 하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감하다.
그래도 외국인들을 한 번 잘못 건드렸다간 그런 사람들 입장에서도 여간 골치아픈 일이 아니라 어지간하면 건들진 않으니 괜찮다는 상혁씨.
이미 경험담까지 깔 거 다 까놓고 위로한다고 한들 하나도 안심되지 않는다.
"한국 치안이 워낙 좋지 않습니까? 미국 상황을 알아둬서 나쁠 건 없으니 한 소리에요. 제가 이 근처 맛집 하나는 꽉 잡고 있으니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갑시다."
상혁씨의 말마따나 한국에선 마피아나 갱단은 영화로밖에 만날 일이 없다.
길가다 칼 든 강도만 만나도 뉴스거리인 나라니까.
하지만 여기 미국에선 누가 봐도 심상치 않은 형님들을 직접 볼 기회가 종종 생기니 익숙해지는 편이 낫다는 게 상혁씨의 이야기였다.
"뭐, 조심하다고 치고.. 그런데 여기 완전 한국같네요?"
"LA 한인타운 역사가 하루이틀이 아니니까요. 40년이 넘었다던가."
한인타운이라고 듣고 오긴 했지만 중간중간 한국 음식점 있는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달랐다.
한국에 온 건지 착각이 들 정도로 한국어로 된 간판이 많다.
여기저기 아예 무더기로 건물 채로 한국 느낌이다.
일단 여기 미국일 텐데 이래도 되는 건지 몰라.
"그 만큼 한국 사람이 많다는 방증이죠. 미국사람들 입장에서는 이태원같은 느낌입니다."
아하!
무슨 느낌인지 한 번에 감이 온다.
설명 하나는 알아듣기 쉽게 기똥차게 잘하는 상혁씨.
영어 수업을 할 때도 대충대충 하는 것 같으면서도 이상하게 머리에 쏙쏙 박힌다.
"저도 영어 교사일 하루이틀 한 게 아니니까요. 그리고 뭐, 시현씨가 잘 알아듣기 때문도 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칭찬이었다.
상혁씨와 친해지면서 은근히 막말 들을 때가 많아 기대도 안했는데.
내가 말귀가 빠른 편이라 덕분에 자신도 편하단다.
처음 왔을 때 설겅설겅 지내다 보면 다 배울 수 있다고 말하긴 했지만.
1년 넘게 살아 놓고도 거진 배운 것도 없이 떠나는 애들이 부지기수인 게 미국 유학이란다.
특히나 어학연수 온 사람들 중에 그런 케이스가 많다고.
둘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는 사이에 목표했던 음식집 앞에 도착했다.
갈비와 삼겹살, 그리고 냉면을 취급하는 LA의 인기 식당이라며 소개하는 상혁씨.
한인타운임에도 잘 알려져 외국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찾는 명소라고 한다.
사실 내가 진짜로 먹고 싶었던 건 감자탕이었기에 조금 아쉬운 노릇이지만.
"이게 원래 냄새가 퍼져서 안되는 거긴 한데, 세상 사는 게 다 꼼수가 있는 법이잖아요? 다 방법이 있습니다."
감자탕은 냉동포장으로 싸가면 된단다.
그리고 근처 매장에서 전기 냄비와 냄새 제거제를 구비하면 완벽.
상혁씨 자신도 애용하고 있다며 능글맞은 표정으로 이야기한다.
모처럼의 외식인데 목구멍에 기름칠하는 게 좋지 않겠냐 못을 박는 상혁씨.
구구절절 옳은 소리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거부할 이유가 있을 쏘냐
나와 상혁씨는 찜해두었던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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