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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의 마술사
왜 이렇게 운이 없는지.
머리 식힐 겸 돌린 게임 첫 판에서 프로듀오를 적으로 만나버렸다.
덕분에 간만에 집중해서 빡겜을 해야 했다.
뭐, 재미는 있었으니 됐지만.
'역시는 프로는 프로야. 잘하긴 잘해.'
오더까지 도맡아 하고 있는 지, 적팀의 움직임은 수준급이었다.
다이아 5티어애들이 말 안 듣기로는 소문이 나 있는데.
그것을 강제로 따르게 할 정도면 꽤나 카리스마가 있는 모양이다.
원래라면 듀오가 아닌 나에게 상당히 불리하게 진행돼야 옳았지만.
하나 웃어주고 있었던 점은 초반 상황이 유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
초반에 내 세코가 터트린 킬들로 인해 스노우볼이 굴러가고 있었다.
프로듀오가 한타까지도 설겅설겅 했으면 맞붙어 보려고 했는데.
이내 포기했다.
용쪽에 있는 와드로 쭉 보니 적팀의 진형은 가히 철옹성.
핑와를 도배해 놓고 내가 들어올 구석만 보고 있었다.
아무리 세코의 한타가 별로라고는 해도.
어중이떠중이가 상대라면 어떻게 각을 보고 진입하는 게 가능했겠지만 상대는 프로다.
심지어 한 명이 아니라 두 명.
쓸데없는 역전의 계기를 줄 바에야 나는 백도어를 택했다.
간을 보다가 합류를 하는 스플릿이 아닌 순수한 백도어를.
어쩔 수가 없는 선택이다.
겉으로는 드러난 한타는 해봄직해 보여도, 실상 적 원딜을 어떻게 할 수 없는 이상 패배의 그늘이 짙었기에.
때문에 합류따위 안 하고 타워만 밀었다.
아군이 나한테 백도어 작작 좀 하고 합류하라고 핑을 미친 듯이 찍어도 무시한 채 묵묵히 타워를 깎았다.
타워 깎는 노인.
팀원이 아무리 핑을 찍어도 묵묵부답.
최대한 버텨보라고 한 마디 해놓고 백도어에 올인했다.
툴툴 대던 팀원들은 일단 내 말을 따랐다.
그도 그럴 게 캐리를 하고 있던 건 누가 봐도 세코다.
그것도 게임 혼자하는 수준으로.
계속 해서 말을 들어줄 정도로 다이아5 티어 분들이 얌전치는 않지만 일단은 들어줬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어질지.
슬슬 불안하던 찰나에 이니시가 걸렸다.
설마 했던 타이밍.
아군의 원딜러 헤이클린이 나무카이에게 바보처럼 물려줬다.
하나 다행인 점이 있다면 혹시 몰라 귀환을 했다는 것.
자칫 전멸이라도 하면 억제탑 교환이 아니라 그대로 게임이 끝날 수가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귀환하자마자 들리는 적신호.
점멸 이니시에 의해 한타가 걸렸다.
그 위기의 상황에서 번뜩 떠오른 생각.
나는 의병대를 사고 곧장 달렸다.
아군의 실수를 전화위복으로 만들기 위해.
멍청하게 물려준 헤이클린에 의해 적팀의 진형이 반으로 갈렸다.
모두의 시선이 타워쪽에 쏠린 순간.
의병대로 돌진한 나는 적 원딜러 토이치를 암살하는데 성공했다.
고작 그 하나로 게임은 터졌다.
다소 과장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진짜다.
점멸까지 사용하며 다이브를 택한 나무카이.
거기에 호응한 말화이트는 볼 것도 없이 죽은 목숨.
나머지 서폿과 미드는 내 분신과 본체에 사이좋게 마무리 했다.
그것만으로도 큰 손해지만 문제는 전멸을 했다는 거다.
게임시간 30분이 가까워지는 시기에.
이 시간대에 한타를 승리하면 두말할 것도 없이 바론이다.
뜬금없이 이긴 한타에 아군이 얼타고 있었지만 내가 나서서 내렸다.
바론 오더를.
기바오, 기적의 바론 오더가 아니다.
안정적으로 챙길 수 있는 바론.
딱히 타워나 용이라든지 다른 부분을 손해보지 않고 온전히 가져갔다.
벌어지는 글로벌 골드의 격차.
탑과 봇의 2차 타워는 이미 밀어 놨다.
미니언 웨이브까지 이 쪽의 손을 들어주니 스노우볼이 굴러가는 건 한 순간.
바론 버프가 끝나기 전에 탑과 미드의 억제탑 2개를 미는데 성공했다.
한타는 크게 자신이 없어 가능한 피하려고 했지만 바론을 먹은 한타는 충분 해봄직 하다.
더군다나 이전의 무리한 이니시로 인해 적팀의 스펠은 모두 빠졌다.
그에 비해 아군의 스펠은 살아있다.
한타에서 점멸의 유무는 결정적.
특히나 적 토이치를 아군 브루저가 쉽게 물 수 있게 됐다.
점멸을 사용해서.
한 순간 묶어만 준다면 마무리하는 건 간단.
내 세코가 토이치를 끔살내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답답한 아군들을 내비두고 가는 건 물론 탐탁치 않지만 괜찮다.
이전의 한타에서 크게 한탕한 덕에 수호악마가 나왔으니까.
세코가 한타를 피하는 건 어디까지나 물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번의 부활을 허용해주는 수호악마가 생기면 과감히 뛰어들 수 있다.
어떻게 토이치만 죽이면 이기는 한타.
내 목숨과 교환했는데 정작 나는 부활을 했으니 질 수가 없다.
그렇게 깨진 2억제탑.
상대가 아무리 프로고 운영에 일가견이 있다고 해도 이제는 어떻게 안된다.
나는 아군 4명을 탑으로 돌리고 봇라인을 백도어 했다.
아군이 거대 미니언과 함께 대치만 하고 있어도 적팀은 속수무책.
내 쪽으로 인원을 돌릴 여유따위 없다.
자칫 잘못하다간 쌍둥이 포탑까지 나가버릴 테니까.
3억제탑이 완성된 순간 게임은 뒤집을 수 없다.
떼로 몰려오는 거대 미니언들만 상대하기에도 벅찰 지경.
그런데 용을 먹고 코어아이템을 갖춘 아군 다섯 명이 쭉쭉 전진하니 거질 게 없다.
그대로 승리.
게임을 가져갔다.
'그런데 나한테 친추는 왜 건 거야?'
게임이 끝나고 상대 정글러에게서 친구 추가 메시지가 도착했다.
프로게임단 독나타스의 정글러.
일단 아이디만 놓고 보자면 그렇다.
그래도 설마 진짜일까.
혹시나 해서 확인해보니 진퉁이었다.
나와 같은 슈퍼계정.
사칭일 염려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게임에서는 무시하더니만.'
정말 궁금해서 전체 채팅으로 물어보기까지 했다.
왜 그렇게 빡겜을 하냐고.
댁이랑 불구대천의 원수를 진 것도 아닌데 나한테 대체 왜 이러냐고
─WHY SO SERIOUS?
분명 기억하건데 대답따위 들려오지 않았다.
아무리 공인인 프로게이머라도 그렇지, 도발도 아닌 단순한 채팅을 무시할 정도로 시크해야 하나.
그래놓고 게임끝나서 친추를 걸어?
프로고 나발이고 괘씸해서 안 받는다.
'어휴, 있는 놈들이 더 한다더니 배치 전승을 그렇게 하고 싶었나.'
'프로가 다이아5에서 왜 이렇게 이렇게 진지를 먹는지.
전적을 검색해 보니 얼추 이해는 됐다.
슈퍼계정의 배치고사 와중.
배치라는 게 으레 그렇듯 한 판, 한 판이 중요하다.
한 번 지기라도 하면 나중에 3판 이상의 연승으로 보충해야 하니까.
그래도 프로 두 명이서 듀오를 돌리는데 이긴다고 생각했겠지.
초반에는 분명 설렁설렁했었다.
내가 갱킹을 성공시키기 시작하자 갑자기 꼭지가 돌았는지 빡겜을 하긴 했지만.
작정하고 듀오인 원딜러만 지키면서 오로지 한타만 노린다.
솔직히 정말 치졸하기 그지없는 전략이었다.
우리팀 원딜러는 프리딜각을 만들어줘도 총을 든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지 스스로 딜로스를 만드는데.
잘나신 프로 원딜러는 평타 한 번, 한 번의 쿨타임까지 계산하며 무빙샷을 넣어 대니까 상대가 될 수 있나.
어찌저찌 백도어 작전이 잘 성공해 이기긴 했지만 앙금이 남는다.
큰 건 아니고 소심한 복수랄까.
나중에 프로무대에서 만나면 자비없이 쳐발라주마!
.
.
.
* * *
주중의 평일은 금새금새 지나갔다.
영어공부를 하는 것으로.
이게 참 정신적인 피로는 둘째 치고 입이 아프다.
최근 상혁씨에게 한 소리 들었다.
다른 부분은 꽤 발전속도가 빠른데 발음이 안된다고.
토종 한국인인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다.
혀 꼬부라지는 영어는 영화에서나 들어봤는데.
당연 흉내내려고 노력을 해봤지만 턱없이 부족하단다.
극단의 조치.
내 입에 나무젓가락을 물리고 하루 종일 발음연습만 시켰다.
나무젓가락을 몇 개나 부러뜨렸는지 모를 정도로.
그렇게 입 양쪽이 얼얼해지고 찢어져 딱지가 앉을 정도로 며칠간 발음연습에 올인하자 제법 나아졌다.
사실 나는 실감이 나지 않지만 일단 상혁씨가 인정해줬다.
그리고 식당의 여직원, 루시도 깜짝 놀랐다.
애같았던 발음이 사람다워졌다면서 꺄르륵.
놀림받긴 했지만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그 만큼이나 내가 발전이 있었다는 이야기니까.
덕분에 할 맛이 제대로 나 평일에는 거의 영어에 올인.
게임은 거의 접속도 안 했는데 한 번 더 친구 추가 메세지가 왔다.
이전에 만났던 그 독나타스의 정글러에게서.
뭐가 그리 하고 싶은 말이 많은지.
받아줄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손이 미끄러져서 취소를 눌러버렸다.
거짓부렁 하나 없이 정말 실수로.
내가 조금 쪼잔한 면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저자세로 나오는 상대를 매몰차게 거절할 정도로 악인은 아니다.
이전에 솔랭에서 만났던 일.
솔직히 며칠 지나니 다 까먹었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나서서 친추를 보낼 정도는 아니다.
만약 진짜로 나에게 볼 일이 있는 거라면 삼고초려는 기본아니겠는가.
삼국지에서 보면 유비가 제갈량의 초옥을 세 번이나 찾아간 끝에야 겨우 제갈량 본인을 만났다고 했다.
내가 뭐 그 정도 위인은 아니지만 일단 앙금이 있으니 만큼 조금 튕겨줘도 괜찮을 터.
그래서 좀 더 기다려봤는데 결국 메세지는 다시 오는 일은 없었다.
고놈 참 삼세번 모르나, 삼세번.
꼿꼿하기는.
일단 그 일은 그 일이고.
드디어 주중의 평일이 끝나고 주말이 찾아왔다.
놀 때는 놀고 쉴 때는 확실하게 쉬어라.
누가 만든 말인지 몰라도 명언이 아닐 수 없다.
신나게 놀아주마.
더군다나 이번 주말은 의미가 깊다.
'루시와 데이트.'
루시도 데이트라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초대를 받았다.
빈 말이 아니다.
약속 시간과 장소까지 정확히.
그것도 루시쪽에서 말을 꺼냈다.
이 말의 의미는.
'나에게 호감이 있는 게 분명해!'
내가 여심을 잘 모르는 건 맞지만, 까놓고 말해서 이 상황은 누가 봐도 좋은 흐름아닌가?
미국에 와서 생기는 첫 친구가 여자친구가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아직 확실히 정해진 게 아님에도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가질 않는다.
'루시가 예쁜 건 아니여도 성격이 참 잘 맞아.'
이성의 외모를 크게 따지지 않는 나지만 그래도.
이전에 한국에서 잘 되간다고 나 혼자 착각했었던 예은.
싸가지녀에 비한다면 조금 아쉽긴 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년이 얼굴 하나는 반반한 거지, 루시가 부족한 게 아니다.
무엇보다 그 싹수가 노란 년에 비하면 말이 얼마나 잘 통하는지.
별것도 아닌 말에 하나하나 반응을 해준다는 게 정말 기쁘다.
이런 게 혹시 천생연분아닐까.
인터넷에 종종 올라와 있는 외국에서의 러브스토리 보면 이런 경우가 참 많던데.
혹시 나도?
하는 생각이 최근에 조금 들고 있다.
'이거 참, 이거 참, 이거 참, 어쩌지!'
침대에 누워 좌우로 뒹굴뒹굴.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다.
당장 내일 만나기로 했다.
토요일 정오가 되기 전의 낮.
11시경에 한인타운의 입구 쪽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다.
지리는 대강 기억하고 있다.
지난 주에 상혁씨와 한 번 놀러갔을 때.
혹시 몰라 외워두고, 까먹을까봐 핸드폰에 저장까지 해놨다.
'크큭, 내 인생 드디어 꽃필 날이 오나?'
떡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기대가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조금은 홧김에 저지른 감이 있던 CLC와의 계약.
평생을 한국에서만 살다, 갑자기 이국에 와서 불안한 점이 많았는데 최근 일이 너무나도 잘 풀린다.
이렇게 잘 나가다가 보면 꼭 한 번 고꾸라지던데.
'에이, 설마.'
두근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찬 물로 목욕한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있을 루시와의 데이트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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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한 작가가 추천 부탁드려요 ㅠ.ㅠ
부족한 작가 힘내라고 쿠폰 보내주시는 독자님들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