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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의 공연
어처구니가 없게도.
단 한 번의 시도만에 성공해 버렸다.
'이걸 한 번에?'
방송을 보며 큐를 맞춰 돌린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친구추가를 맺어 게임을 돌리는 중이라 표시가 보이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냥 CP.GG에서 그의 게임이 끝났을 때, 딱 1분 후에 랭크게임을 돌렸다.
그런데 정말로 잡혀버렸다.
'전력을 낼 가치라.. 확실히 있지.'
큰 기대를 갖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저격에 성공해버리니 생각이 달라졌다.
제대로 시험해주겠다는 생각.
트리플리프트는 간만에 투지가 불타올랐다.
하지만 도박수를 둘 정도로 미련한 자신이 아니었다.
'도라이븐을 상대로 괜찮은 챔프는.'
조금 치사한 감도 있지만 트리플리프트는 헤이클린으로 맞받아 치기로 결정했다.
일단 자신도 도라이븐을 해본 만큼 상대하기 쉬운 챔프와 어려운 챔프 정도는 파악하고 있다.
주로 플레이하던 챔프들인 헤이클린, 배인, 그리고 이즈레알 중.
배인과 이즈레알로는 도라이븐에게 도저히 힘을 쓰기가 힘들다.
때문에 헤이클린을 픽했다.
헤이클린은 라인전만큼은 절대적으로 강력한 원딜러.
그 비결은 바로 초반부터 우월한 사거리 덕분이다.
도라이븐 또한 딜교환이 강력하다지만 사거리 차이로 농락한다면 해볼만 하다는 게 트리플리프트가 내린 결론이다.
'Unknown Error, 아이디 참 특이해.'
조금, 아니 상당히 이색적인 아이디를 사용하는 해당 유저에 대해서는 관심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무려 트리플리프트 자신이라 의심을 받고 있는 유저였으니까.
프로게이머라 할 지라도 커뮤니티 사이트는 눈팅을 한다.
심지어 종종 글도 올리는 자신이다.
물론 래딧에 따로 해명은 하지 않았지만 신경쓰이지 않아서 그런 태도를 취했다면 거짓말이다.
만약 단순한 오해.
논할 가치가 없는 실력대였으면 농담이라 여기며 넘어갔을 거다.
하지만 직접 본 그의 실력은 자신조차 측정하기 힘들다.
현존하는 원딜러, 그것도 프로게이머 사이에서 탑이라 평되는 자신이.
'시험해주지.'
자신조차 놀라버린 그 실력이 한 순간 끓어오른 거품인지, 아니면 아직 발굴되지 않은 원석인지.
혹은 비밀병기라고 우겨댄 핫숏이 기성 프로게이머를 데리고 장난을 치고 있는 건지.
겨루어 본다면 대강 결론을 낼 수 있을 터이다.
트리플리프트 자신은 대부분의 원딜유저들과 최소 세 번 이상은 라인전을 가졌으니까.
그 중에서도 호적수라 평되는 이들의 무빙과 라인전 방식은 꿰고 있다고 자부한다.
직접 겨룬다면 누구인지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다.
하지만.
탕!
탕!
천천히 진행하는 라인전.
헤이클린이란 챔프 자체가 결코 조급해서는 안되는 원딜이다.
사거리와 라인푸쉬력 덕에 라인전이 강력하기는 하지만, 그와 별개로 딜교환이 좋은 건 아니다.
스킬의 선딜도 선딜이거니와 평타의 데미지도 평범하기 짝이 없다.
배인처럼 3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도라이븐처럼 한 방이 강력하지도 않다.
때문에 딜교환이 아니라 일방적인 견제.
사거리 차이를 이용해 아주 조금씩 감질맛나게 상대를 괴롭혀야 한다.
툭, 툭 건드려 가랑비에 옷 젖듯 데미지를 누적시키는 게 헤이클린의 라인전 목표.
이것이 헤이클린이란 챔프가 원딜의 정석으로 불리우는 까닭이기도 하다.
사실 누킹이 가능한 크레이브즈나 지나치게 유틸성이 좋은 이즈레알은 살짝 사이비 원딜러.
헤이클린이야 말로 원딜이라는 개념에 가장 가까운 챔프다.
헤이클린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조금 더 빡세게 견제를 하고 싶은 자기 자신에 대한 억누름.
그리고 자신의 딜링에 대한 자신감과 계산 또한 필요하다.
어느 한 방향으로 잘못 기울어져 버린다면 실수를 범하게 되고, 그 순간 라인전이 강력하다는 장점이 무색해진다.
더군다나 헤이클린은 라인전이 강한 만큼 중반 타이밍에 딜로스라는 패널티가 존재한다.
라인전이 망해 제대로 성장을 못하게 되면 끝도 없이 무력해지는 결정적인 이유.
하다못해 배인은 망해도 한타에 들어가면 고정데미지 때문에 어느 정도 딜이 박히는데 반해.
망한 헤이클린은 CC기도, 데미지도 없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애물단지가 돼버린다.
알려진 바 이상으로 난이도가 높은 챔피언.
헤이클린을 완벽하게 다루는 것은 마스터티어의 유저라 할 지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헤이클린에 대해 자부심이 높은 트리플리프트는 개인철학까지 있을 지경이다.
'완벽, 그 이상.'
추구하는 이상이다.
견제를 하며 체력을 깎고 킬각을 잡는다.
이 일련의 과정을 조금 더 아슬아슬하게,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는 벼랑 위에서 줄타기하는 심정으로 해낸다.
초심을 한없이 갈고 닦는 게 헤이클린이라는 챔프의 도달점.
그리고 트리플리프트는 그 도달점에 가장 가까운 존재는 바로 자신이라, 남몰래 자부하고 있다.
'헤이클린을 제대로 플레이하고 나면, 훌륭한 오케스트라 공연을 마지막까지 본 듯한 여운이 느껴지곤 하지.'
라인전은 강력하지만 중반 타이밍에 딜로스가 있으며, 이를 넘어서야 후반에 제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헤이클린.
이러한 헤이클린의 특징을 트리플리프트는 상당히 좋아한다.
마치 자신이 좋아하는 오케스트라 악단의 공연무대와도 비슷한 흐름이기에.
비유를 한다면 이러한 느낌일까.
라인전으로 시작하는 서장, 리듬을 타며 서서히 몸을 달아오르게 만든다.
그러다가 중장, 달아올랐던 몸이 차갑게 식으며, 대신에 정신이 뚜렷하게 고조된다.
마지막으로 종장, 클라이막스에 치다르게 되면 차갑게 식은 몸으로 생명을 갉아먹는 광기의 연주가 시작된다.
민감해진 정신은 세포 하나하나에 자율성을 부여하며 헤이클린이라는 악기를 최고조로 울린다.
다른 원딜 챔프들에게도 각각의 독특한 특성은 있다지만, 헤이클린처럼 우아하며 애처롭고 광기까지 느껴지는 원딜러는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트리플리프트에게 있어 헤이클린이라는 챔프의 선택은 사뭇 진지하다.
라인전, 운영, 한타 어느 것도 포기하지 하겠다는 의미.
진심으로 Unknown Error와 마주보고 싶었기에 트리플리프트는 헤이클린을 꺼낸 것이다.
.
.
.
* * *
─미니언이 출발하였습니다.
곧바로 잡힌 큐.
그리고 언제나처럼 진행되는 라인전.
하지만 여느 때와는 다르다.
그 사실을 직감하는데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흐릿..해.'
적팀으니 서포터 쏘냐가 어떻게 움직일 지는 빤하다.
그런데 이상하다.
저 원딜러의 움직임이 흐릿하다.
잡힐 것도 같으면서도 미묘하게 예상을 빗나간다.
'어쩌면 부캐일 수도.'
그러한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다이아1 중반의 점수대.
꽤나 높은 수준의 유저가 챔피언 연습, 혹은 손을 풀기에 가장 적절한 구간이다.
그도 그럴 게, 다이아1이라 함은 로드 오브 로드의 시작과도 같은 관문이니까.
'얼토당토한 소리같긴 해도, 이게 진짜 진실이지.'
다이아1은 전체 유저의 비율에서 따진다면 0.1%에도 미치지 못한다.
누가, 어떻게 봐도 초고수들이 접점을 펼치는 전장.
그러나 더욱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다면 그다지 차이가 없다.
다이아티어나, 골드티어나.
결국 기본적인 상식이 항상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선 매한가지다.
예를 들어보자.
라인을 밀다 보면 갱킹이 온다.
라인을 너무 당기면 다이브가 올 수 있다.
한타가 열리기 전에는 정비를 하고 합류를 해야 한다.
이 너무나도 당연한 상식이 으레 지켜지게 되는 점수대가 바로 다이아 1티어부터다.
그 이전에도 물론 지켜지기는 하겠지만, 점수대가 올라갈 수록 그 빈도가 높아질 뿐 당연하게 행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 다이아 1티어부터는 팀원이 해줘야 하는 플레이를 안해줘서 암걸리게 만드는 경우가 거의 없다.
내가 라인전 도중 갑자기 이 생각을 떠올린 이유는.
'어떻게 봐도 아마추어의 실력은 아닌데.'
상대팀의 원딜러 헤이클린.
쏘냐는 크게 신경쓰이지 않지만 헤이클린은 별개다.
아마 듀오는 아닐 터다.
듀오라면 저렇게 구별되어 보일 리 없으니까.
애초에.
'프로듀오를 상대로 제대로 된 라인전을 펼칠 수 있을 리가 없지.'
내가 도라이븐으로 솔로랭크의 질서를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있는 건 맞지만.
그것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은 다름아닌 내가 잘 알고 있다.
봇라인전은 원딜과 서폿, 두 명이 운명공동체다.
도라이븐이라는 챔프가 독특한 플레이방식 덕에 서포터 빨을 덜 받을 수 있다고는 해도.
호흡을 맞춘 프로 수준의 봇듀오를 어설픈 서포터를 데리고 격파할 수준까진 될 수 없다.
이는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넘을 수 없는 울타리.
그렇기에 도라이븐은 정확히 마스터티어에 도달할 때까지만 쓰기로 정했었다.
지금 내 상대인 헤이클린은 확실히 아마추어 수준이 아닐 정도로 잘한다.
단정지을 수 있다.
무빙 하나하나에서 범상치 않음이 느껴지기에,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알 수 있을 정도다.
파앙!
회전도끼로 미니언을 받아먹을 때마다 헤이클린의 견제가 들어온다.
고작 100남짓한 사거리 차이.
저 절묘한 거리가 유지하고 되는 한 내 반격을 허용되지 않을 터다.
어설픈 헤이클린이었다면 광란의 피바다로 따라잡은 후 역관광을 제대로 낼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틈을 상대는 내주지 않고 있다.
그냥 단순히 견제의 수준만 높은 거면 또 모른다.
심지어 일부러 틈을 주고 갱호응을 유도한 적 또한 있다.
아마추어 이상, 어쩌면 프로.
상대는 최소한으로 잡아도 북미서버의 그랜드 마스터 유저다.
내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탕!
탕!
헤이클린의 따가로운 견제때문에 고통스럽게 흘러가는 라인전.
해법을 찾아보자면 없는 건 아니다.
어떻게 한 번 귀환타이밍을 잡아 흡수의 칼을 사올 수 있다면, 맞는 만큼 회복하며 라인전을 꾸려나갈 수 있다.
도라이븐은 그 강력한 데미지만큼이나 흡혈량 또한 어마어마하기에 가능하다.
그러나 그래서야 본말전도.
도라이븐이라는 픽의 이유가 사라지고 만다.
'서로가 무난하게 큰다면 웃어주는 건 헤이클린이지.'
물론 헤이클린 또한 적 원딜러와 CS차이, 혹은 킬차이를 압도적으로 벌리지 못하면 사정이 좋지 못하다.
그럼에도 도라이븐보다는 낫다고 말할 수 있다.
중반 타이밍에 조금 딜로스가 요구되기는 해도 3코어, 4코어.
아이템을 갖춰나갈 수록 강해지는 게 헤이클린이라는 챔프의 특색이니까.
그에 비해 도라이븐은 데미지는 나을지 언정 시간이 지날 수록 포지셔닝을 잡기가 힘들어진다.
무식할 정도로 상대를 찍어 누를 수 있으면 모르되.
애매한 데미지로는 할 수 있는 선택지가 제한되고 만다.
그렇기에 선택하는 과감한 도박수.
나는 흡수의 칼이라는 안정적인 선택지를 포기하기로 했다.
그 대신에.
티링!
선택하는 아이템은 2두란검.
시즌3에만 가도 원딜의 시작템은 두란검이기에 흔히 볼 수 있는 선택지지만, 시작아이템이 신발인 시즌2에선 과연 과감한 결단이라 말할 수 있다.
두란검과 두란링은 초반용 아이템, 효율성은 확실히 좋다.
하지만 다량을 사게 되면 그 가격 만큼이나 코어아이템이 늦어지고 만다.
첫 귀환에 500골드 전후로 있으면 모르되, 돈이 충분함에도 굳이 두 개씩이나 구입할 필요성이 없는 아이템이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나는 두란검을 두 개나 구입했다.
귀환하자 1000골드 남짓했던 돈.
흡수의 칼을 사면 공격력이 부족하고, AD 25를 올리자고 상위템도 애매한 채굴삽을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VF소드를 살 돈이 나오지 않으면 늘상 빠질 수밖에 없는 원딜러의 숙명과도 같은 고민.
나는 공격력과 체력흡수를 모두 얻고자 2두란검을 택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노림수.
'두란검은 체력을 올려주니까.'
그 수치는 두란검 하나당 80, 결코 낮다고 치부할 수 없는 양이다.
서로가 무난히 파밍만 하게 된다면 시간이 갈 수록 별 의미가 없겠지만서도.
만약 딜교환이 빠듯이 일어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일단 그 상황을 만드는 게 급선무다.'
내가 2두란검을 샀다는 건 초반의 투자.
상대가 정말로 그랜드마스터 이상, 혹은 프로수준의 원딜러라면 모를 리가 없다.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아군이 도움이 필히 요구된다.
혹은 적팀의 선택으로도 펼쳐질 수 있다.
원하는 것은 소규모 교전.
하지만 난장판이 펼쳐지길 학수고대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약 이전의 나였다면 불가능했을 선택지.
나는 그 어느때보다 빠른 속도로 키보드를 두들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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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음을 무릅쓰고 해주신 추천 감사합니다.
부족한 작가 힘내라고 쿠폰 보내주신 분들 항상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