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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의 공연
똑.
똑.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
그 점잖은 소리는 트리플리프트의 가슴을 조마조마하게 만들었다.
방문을 열어줘야 할까, 고민을 하던 트리플리프트는 어차피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포기했다.
끼익.
문을 열자 찾아온 손님은 역시나였다.
그는 자신이 생활하고 있는 방에 자주도 들락거리는 남자.
하지만 오늘만큼은 다시 찾아오지 않기를 바랬다.
"CLC소속 원딜러 트리플리프트, 익명의 아마추어에게 완패하다. 이거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리겠어?"
손님을 빙자한 주정뱅이.
한 손에 위스키병을 든 채 찾아온 핫숏이 장난스런 어조로 농담을 던져온다.
핫숏의 말을 들은 트리플리프트는 어찌 반박도 못하고 이마를 탁 치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내뱉는다.
"설마 관전을 한 건 아니겠지."
"글쎄, 어떨까?"
익살스런 표정으로 대꾸하며 위스키병을 건네는 핫숏을 보며 트리플리프트는 한탄했다.
이거, 잘못 걸렸구나.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는 생각.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신 트리플리프트는 술김을 빌려 다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알기는 또 어떻게 안 거야? 쪽팔려서 입도 뻥끗 안 하고 있었는데."
"그야 팀의 주장으로서 팀원들의 근황을 모를 수는 없잖아? 네 부캐 아이디도 기억해두고 있었다고."
이 정도면 사생활 침해수준 아닌가.
얄밉게 떠들어 대는 핫숏을 보며 트리플리프트는 한동안은 제대로 놀림먹겠구나 직감했다.
그리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자신 또한 핫숏에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저격을 한 셈이니.
죗값을 받으라면 그냥 달게 받는 편이 그나만 덜 놀림을 받는 길이다.
그나마 다행인 부분이 있다면 자신의 부캐가 입소문을 탄 아이디는 아니라는 사실.
확실히 기억을 되짚어보니 핫숏과는 한 번 듀오를 한 적이 있지만 래딧같은 사이트에 퍼지지 않았을 터다.
덕분에 얼굴 못 들고 다닐 정도는 아니겠지만.
중요한 건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입었다는 거다.
'제길, 운영을 당할 줄이야.'
바로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솔로랭크 게임.
그 게임의 내용을 떠올리며 트리플리프트는 기억을 되짚었다.
트리플리프트 자신은 Unknown Error라는 특이한 아이디를 쓰는 유저를 저격했다.
저격은 단 한 번만에 보기 좋게 성공했기에 스타트는 괜찮다.
남은 것은 게임을 진행하는 것뿐..
더군다나 그 시작 또한 나쁘지 않게 흘러갔다.
상대가 어떤 챔프를 꺼낼지 미리 알고 있었기에 택한 헤이클린.
Unknown Error는 헤이클린을 보고도 대수롭지 않은 듯 도라이븐을 꺼냈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건 명백한 실수였다.
시작되는 라인전에서 내가 현지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을 테니까.
그날 자신은 최고의 컨디션까지라고는 할 수 없어도 그럭저럭 괜찮은 상태였다.
집중해서 쏘아낸 견제는 도라이븐의 체력을 착실히 깎아냈고, 강제로 집타이밍을 잡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물론 상대가 집타이밍을 나쁘지 않게 잡은 탓에 큰 손실을 입히진 못했지만 CS의 차이.
자신이 미니언을 40개 가까이 먹었을 때 상대는 30개 조금 못되었다.
물론 견제를 하면서 CS까지 챙기는 것은 난이도가 요구되는 플레이다.
하지만 북미 최고의 원딜러로 손꼽히는 자신에게 있어 어려운 일까진 아니다.
그렇다고 쉬운 일도 아니었지만 쨌든, 게임의 구도는 의도한 대로 흘러갔다.
만족스럽게 서장을 보내고, 중장을 넘어 종장을 연주하긴 개뿔
서장에서부터 문제가 일어났다.
사단의 시작은 아군의 정글러가 갱킹을 오고부터 일까.
'설마하지만, 애초부터 녀석이 짜놓은 판에 휘말린 것 같기도 한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자니 아이템부터가 설계였을지도 모르겠다.
도라이븐이 첫귀환에서 사온 아이템은 2두란검.
이 트리플리프트를 상대로 한 라인전이 그리도 힘드냐 속으로 비웃었다.
그런데 그것을 상대는 보기 좋게 되돌려줬다.
2두란검으로 얻을 수 있는 추가체력.
초반의 장점을 무섭게 살려 휘몰아쳤다.
그 조금의 체력차이로 인해 나는 죽고 녀석은 더블킬을 먹었다.
'이미 게임은 끝났고, 골때리는 상황이구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쿨하게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인정하면서도 트리플리프트는 게임 중 떠올랐던 의문을 핫숏에게 물었다.
이전에는 거짓말로 치부했던 문제,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혹시 그 사람 정글러 아니야?"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여기서 그 사람이라 함은 당연 Unknown Error다.
수수께끼에 둘러쌓인, 그러면서도 핫숏이 인연이 닿아있다 확답한 사람.
인연정도가 아니라 아예 스카웃을 했다고 했었나.
다름 아닌 우리 CLC에.
"운영, 게임을 이끌어가는 능력이 절대 순수한 원딜러는 아니야. 그리고 혹시 해서 말하는 건데, 난 지금도 라인전을 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래, 그래. 우리 대단하신 트리플리프트께서 라인전을 질 리가 없지, 암. 그래서, 왜 정글러라 생각하는데?"
밉살스럽게 떠드는 핫숏을 보면서, 인상을 지은 트리플리프트는 당장 반박을 하기 보단 사색에 잠겼다.
자신이 정글러라고 생각하는 이유.
명확하게 정리를 하진 못했지만 대략적인 근거의 파편이 없는 것도 아니다.
아주 잠깐의 시간동안 할 말을 정리한 트리플리프트는 진지한 어조로 읊었다.
"라인스왑의 유동성때문일까? 아군 정글을 부르고, 봇을 파괴하고, 탑에 영향을 끼치고. 아군의 동선을 정확히 꿰고 있는 듯 했어. 그런 창의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포지션은 정글러밖에 없지."
"응, 틀렸어."
그럴 듯 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듣던 핫숏이 짧막하게 받아친다.
아니, 이 녀석이.
순간 욕지거리를 내뱉을 뻔한 트리플리프트였지만 이내 참고 한숨을 내뱉었다.
단박에 받아칠 정도로 틀린 것인가.
조급해진 트리플리프트는 말을 이었다.
"그럼 대체 어딘데? 원딜도 아니고, 정글도 아니야. 그러면 뭐 탑이나 미드나 서폿이란 얘긴가? 끼원 맞추기도 정도껏 해야지."
원딜러가 피지컬이라면 정글러는 운영이다.
한 사람이 가지기에는 너무 지나치다.
두 마리를 토끼를 쫓다가는 이도 저도 이룰 수가 없는 법.
방금 핫숏이 아무 생각없이 받아친 한 마디는 로드 오브 로드의 근본을 부정하는 것이다.
애초부터 있을 수 없는 가능성, 그래야 할 텐데.
"어째서 그렇게 단정짓지?"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그야, 당연히…. 힘들잖아?"
딱히 이유가 생각나진 않았지만 상관없다.
한 사람이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것은 당연히 힘이 들 터.
정말 단순하면서도 딱히 근거가 필요하지 않은 논리다.
때문에 시도하는 것 자체가 멍청한 행위라고 일축할 수 있다.
하지만 근거가 없는 만큼 반박에도 취약하다.
받아치는 핫숏의 말 또한 별 다른 근거가 섞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핫숏은 오히려 트리플리프트를 납득시키는데 성공했다.
"나도 네 말에 동의는 해. 하지만 말이지.. 예전부터 생각한 건데 세상엔 괴물이 많아. 도저히 할 수 없을 만한 것들을 당연한 듯 이루어내는. 사실 따지고 보면 당장 너만 해도 그렇잖아? 그리고, 나도 말이지."
"뭐, 그렇긴 하지만서도.."
핫숏의 말은 조금 자뻑같은 소리긴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트리플리프트.
자신이 북미 최고의 원딜러라는 명성을 갖기에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불과 반년 전만 해도 트리플리프트 자신은 원딜러가 아니었으니까.
솔직히 로드 오브 로드 초창기부터 원딜러 하나의 포지션만을 갈고 닦아온 이들이 보기엔 어처구니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없다.
그것은 핫숏 또한 마찬가지다.
그도 정글 탑, 두 포지션에 능통해 있으면 정작 주 포지션은 미드다.
남들은 단 하나도 갖기 힘든 재능을 세 가지나 갖췄다.
그런 자신과 핫숏이 두 마리 토끼라던지 왈가왈부하다간 어디 가서 죽창을 맞는 수가 있다.
인정은 하지만 완전히 납득한 건 아니되진 않는다.
그렇기에 트리플리프트는 핫숏을 향해 다시 한 번 쏘아붙였다.
"그래. 원딜러와 정글러, 그리고 하나 더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건 그렇다 치자.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존 선수들 중에 그만한 기량이 있는 선수는 떠오르지 않아. 나 약올리는 거 아니면 슬슬 이야기 해주지?"
"오호, 북미 최고의 원딜러 나으리께서도 발등에 불이 떨어지셨나 봐? 글쎄, 어떻게 할까?"
마지막까지도 자신을 놀려 먹으려 하는 핫숏때문에 영 인상관리가 되지 않는 트리플리프트였지만, 결국 아쉬운 건 자신이다.
숙이고 들어가는 수밖에.
하지만 또 다시 나오는 한숨만큼은 감출 수 없었다.
차마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 녀석때문에 굉장히 약이 오른 것은 사실이기에.
"그 녀석, 게임에서 어땠는지 알아? 자기가 자기보고 트리플리프트란다. 진짜 대체 누구야?"
"낄낄낄, 나도 관전하다 배꼽빠지는 줄 알았지. 그래도 이해는 해줘? 그 녀석은 네가 트리플리프트였다는 걸 몰랐으니까. 아,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지금도 모른다고?"
부디 방금의 말이 거짓부렁이 아니길.
트리플리프트는 간곡히 바람과 동시에 떠올렸다.
몇 시간 전에 있던 Unknown Error와의 접전.
초반의 조그마한 스노우볼이 그의 운영에 굳어가기 시작하자, 그리고 확실히 뒤집기 힘든 상황이 돼버리자.
그가 입을 털었을 때의 기억을.
'분위기에 휩쓸린 것이기도 하지만. 왜 하필 내 앞에서냐고.'
Unknown Error가 먼저 시작한 건 아니다.
공범자 아니, 주범은 따로 있다.
자신의 아군이 그를 부추겼기에.
[All]-트리플리프트님 맞으시죠? 같이 겜해서 영광입니다 T.T
[All]-저두.. 부디 다음 판엔 같은 팀으로 걸려주세요!
[All]-CLC가 롤드컵 우승해주세요. 파이팅!
래딧에서 그가 트리플리프트라는 사실을 곧이 곧대로 믿은 것인가.
이러한 아군의 호들갑스러운 반응에 Unknown Error는 이렇게 대답했다.
[All]-솔랭 조용히 돌릴라 했는데 들켜버렸네~ 쨌든 롤드컵 응원 감사합니다^^ 힘낼게요!
마치 트리플리프트 본인이라도 되듯 자연스럽게 맞받아쳤다.
아니, 그러다가 래딧에 증거스샷이랍시고 올라가면 어떡하려고?
당연히 자신도 한 소리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밖으로 꺼낼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과정이야 어찌됐건 모양새는 원딜 차이로 게임은 진 꼴이니.
그런 꼴사나운 입장인 자신이 나설 수는 없었다.
더욱 더 얄미운 건 딱 그 게임 끝내고 큐를 돌리지 않았다는 사실.
부디 한 판 더 겨뤄보자.
조마조마 돌린 큐에 Unknown Error는 없었고, 졸지에 자신은 다이아1 현지인들과 한 판 더 게임을 해야 했다.
조금 화가 나있던 탓에 압도적인 양학으로 끝내버렸다.
시원하게 풀린 게임 덕에 답답했던 속은 어느 정도 풀렸지만 말끔하진 않다.
오히려 캐리를 했음에도, 팀원들의 찬양을 듣고 있음에도 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후우….'
나중에 한 번 기회를 잡아 또 저격을 해보려고 했는데.
핫숏에게 들켜버렸으니 이제는 그러기도 힘들다.
오늘 자신을 찾아온 것도 은근히 눈치를 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자신이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다.
"새로 영입했다는 녀석이 누군지 말이나 해봐. 나한테조차 말하기 힘든 문제야?"
"뭐야, 질투? 그런 진지한 얼굴을 하면 더욱 놀려먹고 싶은데.. 잠깐, 잠깐! 화내지는 말라고. 다는 아니여도 어느 정도는 말해줄 테니까."
어금니를 으득 씹자, 그제서야 핫숏은 능청스러운 표정을 풀고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딱히 화가 나서 이를 간 것은 아니다.
정말로 누군지 모르겠기에.
비슷한 사람조차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 녀석은 곧 CLC에 올거야. 모르긴 몰라도 늦어도 다음달까지는 오지 않을까?"
"아니, 난 당장 궁금해 미치겠는데. 어서 말해주시지?"
산타 할아버지가 어떤 선물을 두고 갈 지 두근두근 대며 잠드는 시절은 지난 지 한참이다.
안타깝게도 자신은 마쉬멜로우가 눈 앞에 있으면 그대로 먹어치는 사람이다.
다소 급한 성격이 종종 단점이 되어 붙잡을 때도 있지만, 그 민감한 성격은 자신이 원딜로 전향해 선전할 수 있던 이유기도 하다.
"으음, 사실 조금 더 감춰두고 싶었는데 좋아. 그는 말이지…."
"빨리 얘기해."
뭐 그리 숨길 게 많은지.
모든 걸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은 듯, 자신이 궁금한 부분만 딱 잘라 이야기했다.
그의 포지션, 그리고 실력대.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걸, 믿으라고 한 말이야? 진짜라면 차라리 안 듣는 게 좋았을 거 같은데."
"믿겨지지 않더라도 사실은 사실이야. 정 그리 궁금하면 한 달만 기다려 보라고."
어쩌면 그보다 앞당겨질 수도 있겠지만.
언제나처럼 의미있을 법한 헛소리를 추가하는 핫숏을 보며, 트리플리프트는 깊게 생각하는 걸 관두기로 했다.
그래, 기다려보자.
과연 얼마나 잘난 녀석인지 두 눈으로 확인해보자.
마음먹은 트리플리프트는 자신도 모르게 앞굽으로 땅바닥을 톡톡 두들기고 있었다.
* 작품후기에 영어 서술에 대한 투표 결과 및 작가의견 남깁니다.
============================ 작품 후기 ============================
영어 서술을 아예 없엔다. 20 (46%)
지금보다 조금 더 줄인다. 0 (0%)
FUCKING BOT DUO(빌어먹을 봇듀오) 이런 식으로 한국어 해석을 추가한다 13 (30%)
변경하지 않는다. 7 (16%)
오히려 늘려버린다. 4 (10%)
투표 결과와 더불어 제가 글을 쓸 때 어쩔 수 없는 점 한 가지 양해 부탁드리려 합니다.
제가 영어 채팅을 썼을 때 항상 생각을 해야 했던 부분이 가능한 쉬우면서도 직관성있는 단어를 써야 한다 였는데.
이 고민때문에 조금이라도 복잡한 문장을 쓸 수 없게 되는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냥 한글로 쓰려고 해요.
물론 영어권 채팅의 느낌을 유지하기 위해서.
너무 가벼운 느낌을 죽이고 진지하면서도 유쾌함을 살린 어조로 영어채팅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영어 채팅이 보고 싶으셨던 독자님들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대신 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더욱 재밌는 글로서 만회하겠습니다.
부족한 작품 재밌게 읽어 주시고, 작가 힘내라고 쿠폰까지 보내주시는 독자님들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