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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의 공연
마스터티어로 향하는 승격전, 그 마지막 판에서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다.
솔직히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딱 한 판 남았으니만큼 운명의 여신이 부디 봐주시기를 원했는데.
'정말 급할 때 휴지없는 법이지.'
승격전인만큼 일단 신경을 써서 한 판, 한판 시간을 두고 돌렸는데도 불구.
적팀이 도라이븐을 밴해버리는 상황이 왔다.
일반적으로 적팀에 장인이 있으면 해당 챔프를 밴하는 일이야 흔히 있는 경우지만 신경쓰인다.
'요즘 들어 나에 대한 관심이 과하단 말이야.'
아직 얼마 올라가지도 않았는데.
고작 다이아 1티어인데도 사람들의 관심이 도를 넘는다.
어느 정도냐면 시도 때도 없이 친추가 오고, 자고 일어나면 알림창이 꽉 차있을 정도.
그 원인이 북미의 로드 오브 로드 팬사이트, 래딧이라는 걸 모르진 않지만 솔직히 과한 감이 있다.
'일단 올라가고 난 후에 생각해볼 문제겠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관심 자체가 나쁘지 않게 다가오는 건 아니다.
그 시기가 너무 이를 뿐.
나는 아직 내 실력을 제대로 입증하지도 않았는데 부질없다.
진짜를 보여주지 않은 시점에서의 관심은 차후의 혼란만 야기할 뿐이다.
'마스터로 올라가고 나면 아주 깜짝 놀라 뒤집어 지겠구만.'
하지만 아직 승리의 미소를 짓기에는 이르다.
도라이븐이 밴이 됐다.
그럼에도 팀은 내가 원딜을 가주길 원한다.
물론 배인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차선책이 되겠지만 나는 다른 챔프를 택했다.
헤이클린.
얼마 전, 상당 수준의 유저를 만난 적이 있기에.
아니, 프로, 혹은 숨겨진 초고수라는 말이 정확하다.
게임이 어떻게 내 쪽을 잘 웃어줘 비교적 손쉽게 승리를 챙길 수 있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가 원딜이었기 때문이다.
한 번 말리고 나면 게임에 영향을 주기 힘든 원딜이란 포지션.
그 점을 이용해 나는 잔인하리만큼의 운영을 통해 게임을 굳혔다.
그렇게 내가 이겼다고는 해도 그것이 그의 실력을 평가절하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
오히려 인정한다.
인정하기에 지금 내가 헤이클린을 하고 싶은 기분이 든 것이다.
'헤이클린이라는 챔프는 참 묘하지.'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이렇게 까탈스러울 수가 없다.
꼬그모처럼 딱히 스킬을 사용하지 않아도 긴 사정거리.
테러스티나처럼 성장형도 아닌 지라 초반부터 그 장점을 살림 견제는 일방적이다.
그런데 막상 해보면 이게 또 애매하다.
라인전은 강력한 주제에 교전에 들어가면 힘도 쓰지 못하고 꾀꼬닥.
그 이유는 장점만큼이나 확실한 단점들 때문이다.
스킬의 선딜이 너무 심각하다.
쓴다고 바로 발동되는 게 아니라 일정시간 후에 나간다.
상대의 입장에서 피하기도 쉬울 뿐더러, 실질적인 교전에서는 사용하는 각을 잡기가 힘들다.
때문에 거진 평타로만 딜을 우겨 넣어야 한다.
난이도가 상당히 높은데다 성질 급한 사람들이 쓰다간 자칫 실수를 야기하기 싶상이다.
이전에 만났던 그 프로수준의 유저 또한 한 번의 실수때문에 나에게 킬을 내줬을 정도니.
모르긴 몰라도 그 유저는 헤이클린보다는 다른 원딜챔프를 더 잘할 거라는 확신이 있다.
언제 프로무대에서 정식으로 겨뤄보고 싶다는 생각.
하지만 일단 지금은 게임에 집중할 때다.
'뭐, 나도 썩 잘 다룬다고는 볼 수 없지만.'
탕!
그렇다 해도 헤이클린이란 챔프를 어떻게 활용하는 지 모를 내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원딜 챔프들의 사정거리는 550.
현재 솔랭에서 많이 쓰이고 있는 원딜러들은 대부분 이에 근접한다.
그러나 헤이클린 이보다 100이 긴 650.
저 100만큼의 사거리 차이로 상대를 얼마나 농락하나가 관건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퀴리릭!
헤이클린의 Q스킬, 대탄환은 선딜이 있어 챔피언에게 맞히는 것은 다소 까다롭다.
게다가 적을 뚫고 지나갈 수록 데미지가 감소한다는 패널티때문에 치명적인 데미지까지는 주기 힘들다.
그럼에도 관통하는 모든 적을 맞히는 데다, 유효범위가 길다는 장점은 라인클리어에 이토록 유용할 수가 없다.
압도적인 사거리, 그리고 라인클리어의 능력.
이 두 가지만으로 헤이클린을 봇라인의 정점에 선다.
최소한 라인전을 한정해서는 말이다.
'이렇게 차이를 벌려도 막상 싸우면 어떻게 될 지 모르는 게 헤이클린이다.'
난전이 일어나면 어이가 없을 정도로 약해지는 면모를 보여주곤 한다.
그런 헤이클린이 초반에 말리기까지 한다면 치명적.
이전에 솔랭에서 만났던 프로수준의 원딜러를 상대로 게임을 굳힐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상대 봇듀오가 헤이클린의 견제를 강제로 뚫고 교전을 걸 수 있을 정도의 강함.
즉, 킬로 인해 아이템 차이가 벌어지면 헤이클린의 장점인 견제가 무색해진다.
때문에 헤이클린은 라인전에서 결코 실수를 하면 안된다.
킬을 따기보다는 차곡차곡 견제를 통해 상대가 미니언을 먹기 힘들게 만든다.
그렇게 적 원딜러와 CS차이를 벌려 나가는 게 주목표.
물론 견제에 힘을 쏟다보면 도라이븐같은 챔프는 갱을 당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헤이클린은 도라이븐보다 데미지는 약해도 안정적이다.
E스킬, 투망이라는 확실한 생존기가 있기에 정글을 덜 신경쓰며 과격한 견제를 우겨 넣을 수가 있다.
이렇게.
타앙!
굵어진 총성.
헤이클린은 마스터 오브 이와도 비슷한 패시브를 가졌다.
다만 마이의 패시브가 두 번 공격 하는 거라면 헤이클린은 강렬한 한 방.
1.5배의 데미지를 가진 평타가 적팀의 원딜러 이즈레알에게 박힌다.
내 견제에 가랑비에 옷 젖듯 줄어든 이즈레알은 벌써 반 피.
그리고.
퀴리릭!
이즈레알이 내 견제를 맞고 도망가는 위치에 정확히 대탄환을 날린다.
선딜때문에 맞히는 것이 다소 까다롭기는 해도, 이렇게 상대를 몰아넣은 다음에 쓴다면 그 확률이 한층 올라간다.
'뭐, 비전이 있긴 하겠지만.'
이즈레알을 하는 까닭이기도 한 비전점프.
점멸에 가까운 판정을 가진 저 우월한 이동기가 있는 한 대탄환을 맞히는 것은 힘들다.
적도 바보가 아니니까, 뻔히 맞는 상황에서 굳이 스킬을 아끼진 않을 터다.
그러나 피한다고 끝이 아니다.
'이제 마나가 거의 떨어질 시기지.'
대탄환에 비해 이즈레알의 비전점프는 마나소모가 극심하다.
이런 식의 스킬 교환이 이루어지면 체력소모는 덜 볼지라도 장기적으로 두고보자면 손해다.
물론.
체력대신 마나를 소모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즈레알의 입장에서는 한 번이라도 더 버텨 기회를 노리려고 하는 것이다.
아군 정글러가 부디 자신을 도와주길 바라며.
부디 저 얄미운 헤이클린을 한 번만 따달라.
속으로 부르짖든, 채팅으로 부르짖든 어느 한 쪽은 분명 하고 있을 것이다.
'슬슬, 얼굴을 비칠 타이밍이기도 한데.'
예상하고 있다.
적팀의 정글러 아모모가 슬슬 6레벨을 찍고 올 타이밍이라는 걸.
그렇기에 아군 정글러에게도 핑을 찍었다.
'저 동선으로 보자면 한참은 늦으려나.'
꼭 레드를 먹고 블루를 먹고 그 다음에만 갱킹을 간다.
정해진 순서를 지키지 않으면 발작이라도 일어날 듯 행동하는 정글러들이 가끔 있다.
이런 경우에는 그냥 쭉 빼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만.
-조아라님 오면 아모모 발만 묶어주세요.
-안 빼고 싸우시게요?
일반적으로 헤이클린이 갱을 회피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생존기를 사용해 그냥 빼는 거고.
다른 하나는 적이 갱호응도 못할 정도로 극심하게 괴롭히는 것이다.
자칫 잘못 갱왔간 너 갱승난다? 갱킹이 오기도 전에 위협을 주는 방법.
하지만 안타깝게도.
적이 CS도 버리면서 사린 탓에 그 지경까지는 가지 못했다.
적 또한 일단 마스터티어, 혹은 그에 근접하는 실력대.
갱호응을 할 최소한의 체력과 마나정도는 남겨두고 있다.
나는 회피하지 않고 맞서 싸우기로 결론내렸다.
조금은 도박수이기도 하지만 승산이 없는 것은 아니기에.
-아군이 위험신호를 보냄!
-아군이 위험신호를 보냄!
깔아둔 와드에 아모모가 보이자 아군 정글러가 미친 듯이 빽핑을 찍는다.
하지만 내 생각은 이미 굳혀졌다.
서포터와 함께 역관광을 노리기로.
투욱!
적팀의 정글러 아모모 또한 마스터티어에 준하는 실력자다.
그리고 아모모라는 챔피언을 하는 유저들은 궁극기의 각을 항상 재고 있다.
점멸 붕대.
나는 예상하고 있었기에 각을 내주지 않았지만 서포터인 조아라가 맞았다.
조아라는 물론 나까지 묶기 위해 발동되는 아모모의 궁극기.
부와아아악!
범위가 넓기도 넓은 슬픈 좀비의 재앙이 나와 조아라를 묶는다.
그 순간을 정확히 맞춰 나는 투망과 대탄환을 동시에 사용해 내뻈다.
흔히 말하는 헤이클린의 EQ콤보.
아모모에게서 떨어지며 스킬데미지를 우겨 넣는다.
촤라락!
내가 조금씩 딜링을 박아 넣고 있을 때.
적 봇듀오는 아모모의 CC기에 발이 묶인 조아라를 뚜까 팬다.
죽음은 확정인 상황이라지만, 마지막까지 제 할 일을 하겠다는 듯 스킬을 흩뿌리고 장렬히 전사하는 조아라.
덩쿨로 아모모의 발을 묶는데 성공했다.
조아라의 의지를 내가 이어받을 차례다.
탁!
발이 묶인 아모모 밑에 덩그러니 떨어지는 쇠덫.
일반적으로는 미리 깔아두고 적팀이 진로를 방해하는 용도가 한계이지만 이렇게 연계 또한 가능하다.
넝쿨에 의한 속박이 풀림과 동시에 한 번 더, 쇠덫이 아모모의 발목을 붙잡는다.
탕!
탕!
조아라의 풀콤보와 더불어 내 스킬데미지까지.
속박된 아모모에게 탄환들이 쏟아지자 버티지 못한다.
적 봇듀오의 도움보다 내 탄환이 도달속도가 훨씬 빠르다.
─적을 처치했습니다.
일단 한 명.
아모모를 처치함으로서 내 레벨도 올랐다.
5레벨이었던 헤이클린이 6레벨로.
나는 빠르게 궁극기를 찍었다.
그리고.
촤락!
조아라는 죽은 것으로 끝이 아닌 챔피언이다.
마치 꼬그모의 패시브와도 비슷한.
죽고 나서도 적에게 데미지를 줄 수 있는 가시꽃의 앙갚음이라는 패시브가 있다.
가시꽃이 쏘아져 나가며 이즈레알과 쏘냐를 훑는다.
나 또한 앞무빙을 밟으며 탄환을 쏴재낀다.
탕!
타앙!
쏘냐와 이즈레알에게 정확히 한 발씩.
안 그래도 체력이 달아있던 둘은 도망이란 선택지를 취한다.
부랴부랴 움직인 탓에 제한되는 동선.
퀴리릭!
일직선상의 사거리가 무척이나 긴 대탄환이 쏘냐와 이즈레알을 뚫고 지나간다.
물론 부족하다.
라인전에서 헤이클린은 괴롭히는 건 잘해도 한 명 끝장내기는 뒷심이 딸리는 감이 있으니까.
하지만 목표는 이뤘다고 확언한다.
<조준.>
헤이클린의 궁극기, 아직 한 발 남았다는 선딜이 길어도 지나치게 길다.
데미지 하나는 확실하지만 이 지나치게 긴 선딜때문에 실질적인 교전 와중에는 사용이 불가능할 정도다.
그렇지만 적팀이 이렇게 대놓고 도망간다면야 여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발사!>
아직 한 발 남았다는 스킬명대로 정확히 한 발만 쏘는 궁극기다.
타겟팅으로 나간다고는 해도, 일직선으로 날아오는 탄환을 아군이 대신 맞아주는 게 가능하다.
그래서 종종 헛탕을 짚는 경우도 생기지만, 난 그것까지 계산해 이즈레알과 쏘냐의 체력을 엇비슷한 수준으로 깎아놨다.
선택의 시간이다.
전우애가 넘치는 적 봇듀오.
과연 누가 솔선수범 희생을 해줄 지.
탄환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휘리리릭!
대기를 뚫으며 날아가는 거대한 탄환의 파공성.
일단 내 탄환은 이즈레알을 지정해 날아가고 있다.
이즈레알은 당연한 듯이 쏘냐의 뒤에 숨는다.
원딜보다는 서폿이 죽는 게 낫지 않겠냐하는 생각일 터.
하지만 아무리 그 말이 정론이라고 한들.
피도 눈물도 없는 솔로랭크다.
쏘냐 또한 자신의 KDA가 깎여가면서까지 듀오도 아닌 이즈레알을 보호해줄 의리는 없다.
간혹 가다 희생정신이 넘치는 서포터분들도 계신 건 사실이지만은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니까.
타아아앙!
탄환이 쏘냐의 코앞까지 도달함과 동시에.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혹은 내심 기대하고 있었을 반전이 일어났다.
쏘냐의 점멸.
오른쪽으로 살짝 이동하는 것으로 탄환은 그대로 뒤에 있던 이즈레알에게 명중한다.
─더블킬!
적을 처치했습니다.
야금야금 공을 들여 깎아냈던 적 봇듀오의 체력은 헛되지 않았다.
목숨을 아끼지 않는 조아라의 희생덕분에 더블킬을 먹게 된 내 헤이클린.
안 그래도 심각했던 CS차이까지 더해지자 이즈레알을 탈주 직전까지 몰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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