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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 솔로랭크
헝클어진 머리칼 몇 가닥이 예은의 볼에 달라붙어 있다.
이제는 다 말라 하늘로 날아간 수분이지만 남게 된 눈물의 불순물들.
머리카락과 엉겨 붙어 모양새가 안 좋았다.
'이 정도는 해줘도 되려나.'
나는 검지와 엄지로 예은의 볼에 붙어있는 머리카락을 떼냈다.
자고 있는 예은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내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지만 세상의 일이라는 게 참 내 뜻대로 풀리는 법이 없었다.
'......깨버렸네.'
내가 머리칼을 만진 게 계기가 된 걸까.
예은이 부스럭부스럭 조금씩 꿈틀대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아!"
내 가슴팍에서 세상 모르고 자다 내뱉는 첫 마디가 아, 라니.
일단 사정을 들을 사람은 이 녀석밖에 없어보이니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려주기로 했다.
"......"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예은이 고개를 내리고 나를 빤히 쳐다본다.
눈이 마주치자 커지는 눈동자.
눈시울이 붉어진 예은이 나를 흘겨보다 의자에 다시 털썩 주저앉는다.
그리고 내 침대 옆에 있는 기계에서 빨간 버튼을 눌렀다.
"뭐 누른 거야?"
"보면 몰라? 의사선생님 부른 거잖아!"
딱 봐도 기분 안 좋아 보여 최대한 부드럽게 물어본 건데.
그냥 말해도 될 걸 빽 소리를 질러온다.
기지배 성격 꼬인 거야 원래부터 알고 있었지만, 왜인지는 몰라도 지금은 특히 심기가 상하신 모양이었다.
어째서 인지 물어볼까 싶다가 나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괜히 기분 안 좋을 때 신경 건드릴 필요없을 테니까.
예은에 의해 싸늘하게 식어버린 적막한 병실의 내부.
체감이 될 정도였는지 앞머리가 벗겨진 의사선생님은 병실에 들어오자마자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환자 앞에서 의사 본인이 놀래서야 쓸까.
하얀 가운을 입은 헤픈 느낌의 의사선생님은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풀은 후에 본론을 꺼냈다.
"어흠! 가벼운 뇌진탕입니다. 별 이상 없고요. 피 조금 흘리신 건 푹 쉬면 날 겁니다."
내가 물어보기도 전에 짧막하게 정리해주신다.
그래도 너무 설명이 응축된 감이 있는데.
기억을 되새겨 보면 피가 났었던 것 같다.
대체 어디서 어떻게 된 건지 정도는 알려주면 고마울 것 같은 기분인데.
"오른 손들어서 이마 쪽에 올려보세요. 아, 거기 반창고 같은 거 있죠? 작게 세 바늘 꿰맸습니다. 걱정 되시면 간간히 침 좀 발라 주셔도 됩니다."
".........아, 예에."
의사라는 사람이 이렇게 가벼워도 되는 건지.
대충 어떤 느낌으로 다쳤는지 친절한 부연 설명없이도 알 것 같은 기분이긴 하지만 조금은 친절함을 바랬다.
동석해있는 여자가 차가우니 만큼 따뜻한 느낌의 간호를 원했는데 의사도 영 못 써먹겠다.
아무래도 바로 퇴원해도 별 상관없는 상황으로 보였다.
"하루 정도 입원해주시는 게 제가 페이를 더 받을 텐데, 부담가시면 근처 호텔에서 애인분과 오붓한 시간 보내셔도 괜찮습니다."
"하하하, 이 아저.. 아니, 의사선생님이 눈치없는 농담도 잘 뱉으시네."
상대를 보고 자극해야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독이 올라와 있는 예은을 건드려서야 좋은 꼴은 못 본다.
침을 꿀꺽 삼키며 의사의 말을 받아친 내가 예은의 눈치를 힐끗 보니 다행히도 큰 반응은 없었다.
그래도 일단 몸에 별 부상이 없다는 말은 다행이긴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자꾸 헛소리를 해대는 저 의사의 말이 맞기는 하련지 조금 걱정이 되는데다, 너무 말이 가벼워서 살짝 짜증이 올라왔다.
귀찮게 해버리기 위해서라도 입원을 해버릴까 고민하던 와중, 옆에 계시던 간호사가 가까이 오더니 속닥속닥.
하루 입원비가 얼마인지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퇴원하겠습니다."
"예, 그럼 바로 수속 밟아 드리겠습니다~."
말이 잘 통하는 바람에 여기가 미국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어 버렸다.
소문으로 듣긴 했지만 미국의 의료비용은 정말 한두 푼이 아니었다.
내가 아무리 돈이 있다고 해도 한두 푼이 아닌 돈을 자존심싸움에 사용할 쏘냐.
몸 움직이는데도 딱히 지장도 없는 것 같고 저 돌팔이 비스무리한 의사도 보증을 했으니, 슬슬 일어나야겠다 싶어 예은을 톡톡 두들겼다.
그런데 정신나간 의사가 또 헛소리를 해댔다.
"보호자 아가씨가 간호 좀 해줘? 원래 남자들이 몸 아플 때 옆에서 잔시중만 약간 들어줘도 뿅가 죽거든."
저 빌어먹을 돌팔이가 뭔 헛잡담을 해대는 건지.
그리고 예은 너는 그걸 왜 또 진지하게 정자세로 듣고 앉아 있는지.
어처구니가 없어 예은의 양 어깨를 잡고 그대로 끌고 나갔다.
대충 지나치듯 인사하고 병실을 나가기 직전.
돌팔이 의사가 또 한 마디를 던져왔다.
"정 신경쓰이면 얼음찜질 좀 해줘도 괜찮고, 혹시라도 온찜질은 하지 말고. 그리고 아가씨도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병원가면 흔히 듣는 물 많이 드시고 기름진 거 드시지말고 밖에 나가 햇빛 좀 쬐시고의 확장판일까.
인터넷 검색만 해도 대충 나오는 사실 굳이 알려 줄 필요가 있는지.
그런 의사의 말을 또 진지하게 들으며 발걸음을 떼지 않으려고 하는 예은을 안간 힘을 내서 당겼다.
그제서야 병실 밖으로 끌고 나갈 수 있었다.
나가자마자 보이는 것은 넓은 복도.
안에서는 잘 몰랐지만 꽤나 큰 병원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설마 저 돌팔이 의사는 이곳에서 일하는 의사일까.
환자들이 다소 걱정은 되지만 내가 신경쓸 부분은 아니다.
일단 당장 이곳을 나가는 게 급선무.
나를 이곳으로 끌고 왔을 예은에게 방향을 물어보기로 했다.
"접수처, 어디로 가면 되는지 알아?"
아직 기분이 썩 풀린 것 보이지 않으니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그러고서도 한참을 기다려준 후에야 예은이 팔을 낮게 들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왜 또 갑자기 시크한 컨셉으로 바꾸셨는지는 몰라도 이 병원을 나간 후에 사정을 알아봐도 될 듯 하다.
'설마하지만.'
혹시, 만에 하나의 이야기긴 하지만.
정말로 내가 걱정돼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는 들어 나는 한 마디 뱉었다.
"굳이 그 돌팔이 의사 말이 아니더라도. 내가 느끼기에도 별 일은 아닌 것 같으니 이대로 집에 가자."
방금의 내 말을 듣고 나자 예은의 발걸음에 조금은 힘이 실렸다.
그럼에도 미련이 남은 듯 느릿느릿 하다.
아까 돌팔이 의사 말은 그렇게나 열심히 듣더니 대체 지금은 또 왜 그러는 건지 머리가 아파온다.
"일단.. 계산하고 바로 귀가하자, 벌써 1시가 넘었다 야."
"..계산했어."
얘가 웬일일까?
딱히 하룻밤 입원비가 아니더라도 낮은 액수는 아니었다.
그 때문에 속으로 한숨을 푹 쉬고 있었는데 내줬다고 하니 다행.
물론 갚아야 할 돈이긴 하더라도 느껴지는 우정에 코끝이 짠 해졌다.
"그럼 바로 택시타고 갈까?"
아까와 마찬가지로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
동의를 한 듯 보여 나는 예은을 끌고 병원 밖으로 나섰다.
바깥으로 나와 새벽의 찬 공기를 쐬며 대략적으로 내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머리가 팽 돌아갔다.
나온 문이 뒷문이었는지라 전체적인 구조가 파악이 안 됐었는데 주위를 둘러보자 알 수 있었다.
'여기 완전... 대병원이잖아.'
그 돌팔이 의사도, 불친절한 예은도 설명이 너무나 부족해서 몰랐지만.
아마 엘리베이터 안에서 기절하고 구조된 다음 앰뷸런스같은 거라도 타고 실려왔겠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나 혼자 추측하고 정리하고 있으니 방금 전 코끝이 짠해진 우정은 개뿔, 눈물이 찔끔 난다.
그래도 큰 병원 앞이다 보니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고, 그 덕에 택시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금새 택시를 발견한 나는 예은을 데리고 잡아탔다.
'아니, 다친 건 난데 왜 상전은 너니.'
어쨌든 일단 택시는 탈 수 있으니 각자 목적지에서 헤어지면 될까.
택시기사에게 먼저 예은의 기숙사부터 보내달라 입을 열려던 순간.
예은이 팔을 뻗어 나를 제지했다.
"강남호텔로 가주세요."
"알겠습니다~."
혹시 내가 걱정되어서 먼저 보내주려고 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찔끔 나왔던 눈물이 다시 스며드는 듯 하다.
하지만 이 새벽에 이 녀석을 혼자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
마음만 받아주고 목적지를 수정하려던 찰나, 그동안 묵묵부답 일관하고 있었던 예은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오늘 나도 호텔에서 잘 거야."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닐까.
혹시 의사선생님의 농담을 진지하게 들어버린 건 아닐까.
잘은 모르겠지만 그냥 농담하는 거겠지, 생각했는데 설마가 그 설마였다.
"네 방에서 잔다고."
"....................뭐?"
굳이 따지고 보자면 예은이 내 방에서 잤던 것은 하루이틀 일이 아니다.
틈만 나면 일 땡땡이 치고 와서 객실 침대에 디비 누워 퍼 자셨으니까.
그래도 그건 어디까지나 낮의 일이다.
그것도 내 정신이 말똥말똥 할 때의 이야기.
아무리 친구사이라고 해도 이 한 밤중에 너를 재워줄 수는 없다.
별 다른 사정이 있는 것도 아닐 테고.
"오른 손목, 괜찮지 않지?"
"…."
예은의 대답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제서야 어째서 의사선생님이 대충이었는지, 그리고 예은이 돌파리틱한 의사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었는지 이해가 갔다.
어째서 찜질에 대해 이야기를 한 것인지도.
'능글맞은 대머리. 이미 다 이야기가 끝난 상태였구나.'
오른 손목의 염좌.
엄밀히 따진다 해도 큰 부상은 아니다.
당장 움직이는 것이 불편하지도 않다.
그러나 몇 시간동안 손목만 움직여야 하는 게임으로 들어가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아마 무리가 올 수도 있겠지.
아니, 안 올 수도 있다.
그냥 시간이 흐르는 것만으로도 간단한 낫는 부상일 가능성이 높다
의료 전반 지식이 없는 나로서 내 상태를 스스로 점검했을 때 그렇게 생각이 된다는 것이지만 말이다.
나는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전후사정이야 어찌 됐건, 자신때문에 내가 다쳤다고 생각하는 예은은 그냥 넘어가기에 책임감이 걸린 듯 하다.
정말 여러 부분에서 프라이드가 높은 녀석이 아닐 수 없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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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어제는 정말 여러모로 놀라운 일이 많았던 하루였다.
마스터티어를 한 번에 찍은 것도 그렇고, 뜬금없이 엘리베이터가 끊겼던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그 예은이 내가 잠들 때까지 간호를 해준 일은 경탄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예은은 현재 내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입을 헤벌린 채 꾸벅꾸벅 자고 있다.
눈물이 말라붙은 눈가도 그렇고 머리칼도 그렇고 온전한 상태는 아니라지만 내리쬐는 햇살.
일단은 외견만큼은 괜찮은 녀석인지라 헝클어진 머리칼의 표면이 창밖에서 내리쬐는 햇살에 반사되는 모습은 제법 그림이 된다.
나는 의자에 앉은 채 세상모르고 꿈나라로 떠난 예은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어제도 그렇고 새벽까지, 고생이 많았다.'
예은은 어젯밤 침대에 누운 내 오른 손목을 차가운 물수건으로 문질러 주었다.
그냥 얼음주머니만 올려놔줘도 된다고 했는데도.
그래서야 잠들기도 불편하고 전체적으로 온도가 내려가지 않는다면서 내 말을 쌩깠다.
자존심도 자존심이지만 남 말도 참 오질나게 안 듣는다.
'덕분인진 몰라도 거의 가라앉았네.'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의자에 앉아 잠을 자고 있는 녀석의 앞머리를 쓰다듬었다.
딱히 무슨 의미가 있어서라기 보단 기특해서 랄까.
원래 이렇게 남한테 다정하게 느껴질 만한 짓을 하는 녀석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나도 그렇고 예은도 그렇고,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많이도 변했다.
아주 예전, 시간감각으로 따지자면 거의 10년은 돼버린 옛날 일이다.
이 녀석과 만나게 된 날이.
그때와 비교해보자면 정말 여러가지로 변했다.
성격도 그렇고 관계도 그렇고 정말로 여러가지가.
그런 생각을 하며 예은의 앞머리를 수차례 쓰다듬던 나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예은의 이마가 조금 뜨거웠다.
창밖의 햇살이 예은을 향해 쏟아지고 있는 것 맞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의 체온이 티가 날 정도로 달궈지진 않는다.
아예 땡볕이면 몰라도 가을철 로스앤젤레스의 아침 햇살은 그렇게까지 따갑지 않으니까.
'감기기운.. 있었구나.'
그러고 보면 어제도 낯빛이 다소 붉었던 기억이 났다.
게다가 그 아니꼬운 돌팔이 의사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도.
하지만 이제 와서 알아챘다고 해도 엎질러진 물이다.
부디 심하지 않기를.
예은의 이마에 손바닥을 올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셨다.
다행히도 그렇게 높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꽤나 곤히 잠든 예은을 살짝 들어 침대 위에 눕혔다.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조금 몸이 맞닿긴 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이해해줄 거라 믿으며 말이다.
그리고 어젯밤 예은이 그랬던 것처럼 차가운 물에 수건을 적셔 꾸욱 짠 후 녀석의 이마에 사뿐히 올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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