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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듀오
상대 미드라이너 아링과 그리고 정글러 카지트.
굳이 우연이라 치부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아무리 사람을 함부로 의심하면 안되는 법이라지면 이번만큼은 경우가 다르다.
'그랜드 마스터 상위권쯤되는 실력의 유저가 땅에서 솟아날 리도 없고 말이야.'
당연 상대 아링와 카지트는 이전의 그 녀석들이다.
굳이 챔프폭을 바꾸는 수고까지 안 하는 것 보면 가릴 것 없이 처음부터 전력으로 맞설 생각이다.
그런데 어떻게 첫 판부터 저격을 할 수 있었을까.
'타임끝 방송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었던 모양인데..'
적어도 내 얼마 안되는 친구목록에서 정보가 새어나갔을 리는 없다.
그 말인즉, 내가 타임끝에게 말을 거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게임을 돌렸다는 말.
이 정도면 작정한 수준조차 아니다.
당연 장난이라고 치부하기도 힘들다.
'나와 이 정도로 척을 진 녀석이 있었던가?'
의문이 든다.
하지만 이 의문은 지금 시점에서 떠올려봐야 의미가 없다.
당장 눈 앞에 처한 현실이 급급했다.
어디서 어떻게 배운 건진 몰라도 정글 카지트가 나름 잘한다.
마치 북미에 계신 Unknown Error를 보는 것처럼.
혹시나 하는 소리지만.
'보고 배웠을 수도 있겠지.'
자신이 키운 제자에게 뒷통수를 맞고 쓰러진다면 이러한 기분일까.
언젠가 한 번 당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하필이면 그랜드 마스터를 향하는 승격전 와중이라니.
묘한 기분에 휩싸인다.
하지만 게임은 이미 초반을 넘어 중반.
승기 또한 적팀이 가져가고 있다.
불평을 하지 않고 게임에만 매진해도 뒤집을 가능성은 한없이 낮다.
파라랑~!
미드라인을 물밀듯 치고 오는 적팀을 막기 위해 나는 세 갈래 카드를 던졌다.
지금 내가 플레이하고 있는 챔피언은 트페.
성장 정도는 무난하다.
탑과 봇라인을 오가며 로밍을 몇 번 성공시켰기 때문.
그럼에도 잘 큰 게 아니라 무난인 이유는.
'쌍으로 점멸까지 써서 미드갱을 오는데 안 당할 수가 있어야지.'
변명일 수도 있겠지만 궁극기를 배운 아링이 점멸까지 쓰며 갱호응.
그리고 카지트까지 점멸을 써서 나를 때리면 아군 정글러가 역갱을 봐주지 않는한 죽어야 한다.
다른 챔프도 아닌 생존기가 없는 트페이기에 어쩔 수가 없다.
아니, 그나마 트페라서 다행이다.
트페라는 챔피언이었기에 정글차이가 남에도 자력으로 이 정도 끌고 나갈 수 있었다.
귀환시 체력 즉시회복과 더불어 엄청난 순간 속도를 주는 의병대로 라인을 빠르게 오가며 말이다.
문제는 적팀의 아링 또한 놀고 있진 않았다는 것.
나는 궁극기나 텔레포트가 아니면 움직일 수 없다.
섣불리 움직이다 적팀의 정글러 카지트에게 고독 상태로 잡아먹히면 어떻게 힘도 못 쓰고 솔킬이다.
때문에 아링이 로밍을 갈 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빽핑 뿐.
그 빽핑을 듣지 않거나, 들어도 의미가 없는 상황에선 아링이 킬을 쓸어담는 구도가 나왔다.
후웅!
그렇게 킬을 받아먹고 잘 성장한 아링이 내던지는 희푸른 물방울.
깔끔하게 정리되는 미니언 웨이브는 아링의 성장도가 어마무시하다는 증거다.
20분 타이밍에 죽음의 불타는 손길과 라둔의 죽음투구가 나왔다.
두 아이템의 시너지를 생각해본다면 스치기만 해도 나나 원딜러는 끔살이다.
'그래서 조냐를 빨리 뽑긴 했지만.'
나는 위험부담을 감수하고 조냐를 올렸다.
당연 성장과정만 생각하면 마법저항력을 올려주는 심홍의 완드가 낫겠지만 아링의 스킬구조를 생각해보면 큰 의미는 없다.
어차피 물방울의 고정데미지는 저항력을 무시하는데다 애초에 매혹을 맞은 시점에서 끝이라는 생각.
그렇기에 궁과 텔포로 킬을 조금 받아먹었을 때 나는 조냐의 물시계부터 빠르게 올렸다.
파라랑~!
최대한 카드를 던지며 미드라인의 미니언 웨이브를 막아보고는 있지만 한계가 보인다.
슬슬 적과 아군의 탑라이너가 합류할 시간.
타이밍을 노려 이니시를 걸게 분명하다.
그것도 강제 이니시를 말이다.
쿠와아아앙!
적팀의 탑라이너 말화이트가 나 하나를 노리고 궁극기를 박는다.
미드 2차 포탑을 끼고 있는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할 만한 선택은 아니다.
아마 팀내에서 오더가 오갔을 터.
누군진 몰라도 나만 죽이면 끝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나 보다.
띠이이잉..!
결코 쉽지 않은 반응이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해냈다.
조냐의 물시계를 사용해 말화이트의 궁극기를 무위로 돌렸다.
하지만 원래라면 아링을 낚기 위해 사용해야 했던 조냐가 빠졌다.
썩 좋은 흐름이 아니다.
샤락!
아링이 황천질주로 대쉬하며 조냐가 풀린 나에게 유혹을 날려온다.
언짢게도 노려오는 대상은 또다시 나.
나는 가까스로 점멸을 사용해 피해낼 수 있었지만 이게 또 좋지가 않다.
'그냥 내 스킬스펠부터 다 빼고 시작하는구만.'
어차피 다른 놈들은 있어도 병풍에 지나지 않는다는 소리다.
나에게서 모든 스킬과 스펠을 뽑아내 변수를 차단하겠다는 의미.
내 입장에선 짜증이 나지만 상황에 걸맞는 영악한 판단이다.
파라랑~!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먼 거리에서 카드를 던지며 앞라인의 탱커를 원딜과 함께 잡는 것.
공격적인 수라던지 변칙적인 수라던지,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래도 적들이 나에게 힘을 쏟은만큼 아군이 잘해주면 다행이겠지만 역시 솔랭에선 기대하면 안된다.
쿠화악!
하늘을 나는 이형벌레 카지트가 날갯짓하며 솟구쳐 날아온다.
덮치는 대상은 나보다 살짝 앞에 있는 원딜러.
내가 미묘한 거리를 유지해주고 있는 덕에 고립에 처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위험하지 않냐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지만.
쿠직!
카지트의 거대한 갈고리가 아군 원딜러 미스터 포텐의 살점을 뜯어낸다.
고독상태가 아님에도 성장격차로 인한 무시할 수 없는 데미지.
황금카드를 던져 흐름을 끊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다.
'애초에 쿨타임인 걸 알고 들어왔을 테지.'
주도적인 플레이를 할 수 없다는 게 이리도 답답하다.
상대는 나보다 많은 카드를 활용해 내가 쓸 수 있는 카드를 한 장, 한 장 줄여나간다.
그리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카드를 내주며 수의 폭력에 휘둘려야 한다.
갑갑하게 진행되는 게임.
띠잉!
쿨타임이 돌아오자마자 부랴부랴 황금카드를 던져 봤지만 이미 늦었다.
궁극기와 점멸까지 쓰며 미포를 추적한 카지트가 기어코 일을 냈다.
─아군이 당했습니다!
뒤늦게나마 황금카드로 스턴을 걸었다는 게 다행일까.
하마터면 킬리셋을 한 카지트가 나에게까지 마수를 뻗칠 뻔 했다.
나는 도망가면서도 최대한 카드를 던지며 적팀의 체력을 갉아먹었다.
'별 의미는 없겠지만.'
어차피 트페란 챔프는 코어 아이템이 나오기 이전까지 낼 수 있는 데미지에 한계가 있다.
더욱이 템이 잘 나와도 썩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도 그럴 게 궁극기 자체가 이동기니만큼 안고 가야하는 패널티다.
그 대신에 로밍이라던지 운영이라던지 여러 이점이 있긴 해도 이렇게 아군이 일방적으로 털릴 땐 무의미하다.
어떻게 활용할 구석이 없다.
특히나 적팀의 두 에이스 아링과 카지트는 1:1에 특화된 챔피언.
섣불리 스플릿 푸쉬를 취할 수도 없었다.
─아군 포탑이 파괴되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멀리서 카드를 던질 뿐.
이마저도 나니까 할 수 있는 거다.
점멸도 없는 트페로 아슬아슬 최대 사거리를 계산해 적팀의 미니언 웨이브를 갉는다.
어차피 논타겟인 세 갈래 카드의 특성상 적을 맞히는 건 기대도 할 수 없다.
애초에 데미지자체도 황금카드와 연계하지 않으면 치명적이지 않다.
그렇기에 미니언을 미는 게 최선의 판단이었다.
─억제탑이 파괴되었습니다!
어떻게 노력은 해봤지만 결국 2차포탑부터 억제탑까지 고속도로가 뚫렸다.
승산이 희박하다.
까놓고 승격전이고 나발이고 간에 서렌을 치고 싶은 상황.
적 말화이트가 1인궁을 쓴데다, 아링의 유혹이 나한테 빠졌다.
그런 상황에서도 아군은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
최대한 유리하게 열린 한타구도에서조차 이 모양이란 소리는 길게 가도 승산이 없다는 의미.
게임의 향방은 지극히 불리하다.
.
.
.
* * *
미포가 자신의 E스킬, 하늘에서 떨어지는 총알비로 견제를 하기 위해 딱 1센티의 거리를 좁히는 순간.
아링의 유혹점멸이 정확하게 미포를 덮친다.
상대의 생각을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놀아야만 할 수 있는 수준높은 플레이.
만약 입만 안 털었다면 저 아링 대단하다고 시청자들의 입에서 찬사가 터져나왔을 것이다.
아링[전체]-미포
아링[전체]-멍청이가
아링[전체]-이걸
아링[전체]-처맞네
아링[전체]-깔! 깔! 깔!
누가 보면 이기고 있는 게임에서 입을 터는 나쁜놈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단순한 상황이 아니다.
욕지꺼리를 내뱉으면서도 아링의 무빙이 끊기지가 않는다.
모르긴 몰라도 스킬쿨 사이사이마다 타자를 쳤을 터.
킬각을 잡아놓고 입까지 털어대다니 보통 여유가 아닐 수 없다.
-아링 인성보소ㅋㅋㅋ 진짜 '그 녀석' 맞는 거 같은데:?
-그냥 아링 잘하는 구나 하고 보고 있었는데 채팅창 보고 소름돋았다. 쓰레기였네.
-혹시 타자쳐주는 사람 따로 있나? 저게 가능해?
-키보드 파이터들에게 있어서는 꿈만같은 플레이네.. 솔직히 나도 조금 꼴린다.
천상계 유저씩이나 되는 사람이 저래도 되는 거냐.
상대를 비웃는 아링의 인성에 본 시청자들의 지탄이 쏟아진다.
그러면서도 슈퍼플레이와 키보드 파이팅을 동시에 해내는 피지컬에 놀라움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선악을 떠나 실력만 본다면 확실히 인정받을 만하다.
바로 이 도슈라는 플레이어는 말이다.
"아무리 그랜드 마스터가 괴물들 천지여도 저렇게 입털면서 게임하는 놈은 도슈밖에 없거든? 쟨 그냥 도슈맞아. 아니면 방송접는다."
어느새 평소 컨셉을 탈피하고 진지모드에 들어선 타임끝.
타임끝의 예사롭지 않은 눈초리가 모니터 화면의 아링을 바라본다.
저 아링이 도슈가 맞다는 확답이 드디어 떨어졌다.
-이제 '그 녀석' 이라고 안 불러도 되냐ㅋㅋ
-도슈 쟤 인성파탄나긴 했는데.. 솔직히 게임은 잘하긴 해.
-어제 털리더니 이번엔 다른 아이디로 저격했나보네. 진짜 끈질긴 쓰레기다.
-저승사자는 저런 놈들 안 잡아가나~
만약 저격을 한 이가 아링뿐이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늘 방송을 챙겨보는 몇몇 시청자들은 눈치를 채버린 사실이지만 도슈에겐 듀오가 있었다.
단순히 실력을 보고 알아채기엔 어려운 일이긴 해도 챔프폭이 겹쳤다는 게 결정적이었다.
"그리고 저 카지트는 아마도지만.. 저번에 올마형 저격했던 다른 유저같네. 그 때 그 카지트도 꽤 잘해보이긴 했는데 설마 도슈의 지인이라니, 후우."
알아챘다고 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
팀원들의 수준차이조차 크게 나 어떻게 역전의 여지가 없어보인다.
타임끝은 절친한 형인 올마스터가 패배하는 광경을 바라만 봐야 했다.
-이번 판 지면 올마스터 승격전 패패로 시작이네.. 사실상 떨어진 듯
-안타깝다. 여기서 급제동이 걸려버리다니.
-무슨 저격질이야 쓰레기새끼들 진짜.
채팅창에서 야유가 터져나온다.
그대로 올라만 가기만 했다면 주전파, 도차와 함께 재밌는 삼파전을 구경할 수 있었을 텐데.
승격전이라는 게 한 번 떨어진다고 끝은 아니라지만 아쉬울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시즌 종료가 얼마 안 남은 시점에서 한 판, 한 판은 중요하니까.
솔직히 말해 지금도 꽤나 늦었다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다.
그나마 올마스터니까 저렇게 가능성을 내비출 수 있었던 거지.
하지만 어째서일까.
타임끝의 입 가장자리에 미소가 걸렸다.
지금 가장 아쉬워해야 할 올마스터의 지인, 타임끝이 느낀 감정은 분노도 안타까움도 아닌 환희였다.
자신과 악연이 쌓이고 쌓인 도슈라는 유저.
타임끝은 앞서 한 번 올마스터를 저격해 실패했던 녀석에게 다시 한 번 쓰디 쓴 패배를 각인시켜 줄 자신이 있었다.
"형들, 나 믿지? 패패부터 시작한 승격전이 승승승으로 마무리되는 기적, 보고 싶지 않아?"
BJ로서의 멘트가 아니다.
BJ이기 전에 한 사람의 그랜드 마스터, 로드 오브 로드 최고티어의 유저로서다.
그랜드 마스터란 승부에 대한 집착과 집념없이 달성할 수 있을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타임끝의 입에 걸린 미소는 언제나의 컨셉에 걸맞는 순진함과 함께 잔혹한 승부사의 이중성을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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