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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 카운트다운
롤드컵 4강 A조의 경기가 치뤄지고 형식적인 인터뷰가 진행된다.
A조에서 올라간 팀은 역시 TWA.
예은이 응원한 건 셋째쯤 치더라도 역시일까.
내가 알고 있는 미래의 결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변의 이변을 만들어 나가고 있는 TWA인데요, 솔직하게 예상하셨습니까?>
마이크를 건네며 익살스럽게 묻는 아나운서의 질문에 TWA의 주장으로 보이는 이 또한 지지 않는다.
자신들이 포나틱을 잡은 게 결코 이변이 아니라는 듯.
말하기도 전에 벌써 자랑스러운 표정에서 묻어나온다.
<저희 TWA는 오늘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포나틱은 과연 명문팀다운 실력을 보여줬지만 그렇기에 저희 TWA는….>
어지간히 할 말이 많은지 구구절절 자세하다.
그 내용을 요약 하자면 대략 준비를 잘 했다는 정도.
굳이 설명을 덧붙이자면 오래된 명문팀인 푸나틱은 그만큼이나 전략 노출이 되었고 대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합에 따른 상대의 약점을 연구했다는 등.
운으로 이긴 게 아니라 자신들의 노력이 일구어낸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싶었던 듯 했다.
다만 조금 말이 길다.
'알긴 알겠는데 말이 좀 많으시네.'
이 녀석과 티격태격 지내다보니 나도 혐성이 되고 만 걸까.
성격을 조금 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별 의미없는 잡생각이 떠오르는 이유는 아무래도 내 옆에서 과자를 깨작깨작 먹고 있는 예은 때문.
내가 입심심하면 먹으려고 사놓은 과자가 예은의 입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맛있냐?"
"그럭저럭."
그럭저럭한 과자면 먹지를 말던가.
쟁여놓은 과자 중에 아껴 먹어야 생각해둔 것들을 어쩜 그리 잘 골라내는지.
나는 눈물을 찔끔 흘리며 이 녀석이 가고 난 후에 반드시 어디다가 숨겨놔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녀석은 한술 더 떴다.
"슬슬 점심시간이고 롤드컵도 끝났는데.. 배고프지?"
"난 배고프지. 그런데 댁도 고프세요?"
내가 보기에 과자만으로 한 끼를 때운 것 같은데 얼척이 없을 따름.
하루이틀 일이 아니라 당황할 정도는 아니지만 몸도 호리호리한 주제에 잘도 먹는다.
그 영양이 다 어디로 가는 건지.
'영 이해가 가지 않는 현상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슬그머니 바라보자 두드러지는 굴곡이 있다.
아주 티가 나는 정도는 아니지만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하면 조금 불어난 것 같기도 하다.
부위가 부위이니만큼 조금 더 찌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이지만서도.
나는 예은이 알아채기 전에 눈초리를 치우려 했지만 늦어버렸다.
"딱히, 살 안 쪘거든?"
눈치를 채버린 예은이 인상을 찌푸린 채 흉흉한 협박조를 내뱉는다.
여자들은 시선에 민감하다는 말.
평소엔 둔감하기 짝이 없는 예은도 생물학적으로 여성이 맞긴 한지, 내가 바라봤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조금 오해가 있는 듯 하다.
'몸무게가 불어났다는 의미는 아니었는데.'
여기서 변명을 해봤자 제무덤을 파는 꼴이다.
한두 마디 정도는 들어줄까 생각했지만 크게 나무랄 생각은 없어보였다.
아니면 떡밥에 더 관심이 많은 걸지도.
예은은 점심메뉴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나도 최근에 상당히 바빴던지라 든든하게 고기가 먹고 싶던 참.
혼밥을 하기엔 애매한 식당을 같이 갈만한 친구가 한 명 있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다.
익숙해지긴 했어도 이런 낯선 외국에서 같이 밥먹을 수 있는 친구 한 명 있다는 사실은 어쩌면, 나름대로 복받은 걸지도 모르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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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갈빗살은 굳이 저녁에 먹지 않더라도 살살 녹는다.
고기의 정점, 업진살 만큼은 될 수 없겠지만 갈빗살 또한 충분히 밥도둑.
아니, 술도둑이 됐으면 좋았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식사시간이야 그렇다 쳐도, 나머지 시간까지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솔로랭크의 1위를 노려야 하는 사정 탓.
내가 어울려주지 않는다고 삐지는 게 아닐까 걱정했지만 의외로 그렇지도 않았다.
예은은 알고 있었다는 듯 딱히 권유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챙겨주기까지 했다.
<방 안에 놔둔 짐, 마음대로 해도 되니까.>
예은이 롤드컵을 보느냐 일이 밀렸다며 투덜투덜.
본연의 업무로 돌아가기 직전에 던지듯 내뱉은 말이다.
그러고 보면 방에 들어올 땐 짐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중에 어련히 가져가겠지 하며 신경쓰지 않고 있었는데 선물일 줄이야 상상도 못했다.
'참, 너같은 것도 만들어 보냈다.'
못난이 주먹밥.
밥을 뭉쳐 김가루를 뿌린 간단한 요깃거리다.
호텔에도 식당이 있는데 무엇하러?
그 이유는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라면 대신으로 썩 좋겠어.'
아직은 점심을 먹은지 얼마 되지 않아 허기지진 않지만 야식, 혹은 아침등으로 적절하리라.
안에 뭘 넣은 건지, 소금 간만한 건지 몰라도 라면보다는 괜찮은 끼닛거리다.
'안 그래도 시간이 빠듯한데 휴식시간은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잠깐 한숨 돌릴 정돈 되었다.
기분전환은 컨디션 회복에 많은 도움이 되니까.
그랜드 마스터부터는 단순히 승리를 쌓는 것보다 어떤 상대를 이기는지가 중요해지는 지라 더욱 그렇다.
'확 도차같은 놈들이나 걸려서 점수나 쪽쪽 빨았으면 여한이 없겠다.'
그저 비슷한 수준의 상대만 잡아서야 올라가는 속도에 한계가 있다.
그랜드 마스터 중위권인 나보다 훨씬 높은 상대들을 잡아야 한다.
그러한 경우가 당연 자주있진 않다.
하지만 가능성이 높은 건 사실이었다.
'현재 시각이 오후 열두 시, 한국은 다섯 시쯤 됐으려나.'
오전 다섯 시, 해도 뜨지 않은 새벽 시간대다.
안 그래도 큐 돌리는 사람이 적은 그랜드 마스터 구간의 새벽큐.
더욱이 초딩끝 어린이는 꿈나라에 가 있다.
그렇기에 둬볼 만한 도박수가 하나 존재한다.
쿠웅!
타이밍이 좋았던 것일까.
10분이 걸려도, 심하면 30분씩 걸려도 이상하지 않은 그랜드 마스터 구간의 큐가 빨리 잡혔다.
그렇다면 의미는 두 가지다.
'내가 타이밍 좋게 껴들었거나, 그저 지금 시간대에 큐돌리는 사람이 많거나.'
대어일지, 피라미에 불과할지.
낚시줄을 당기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듀오가 아닌 솔랭이기에 하이큐, 높은 점수대의 게임을 기대해봄직 하다.
이렇게 말은 해도 솔직히 별 기대 없이 누른 첫 번째 큐였지만 생각지도 못한 결과를 낳았다.
-5픽 누구세요? 아니, 승률보니 부캔가.
-뭐야, 신입이냐. 골 때리네. 얌전히 서폿가세요.
-그런데 어디선가 본 아이디인 것 같기도 하고.. 어, 설마?
그랜드 마스터 구간쯤 되면 새로 올라오는 이들이 거의 없다 보니 텃세가 조금 심하다.
자기들끼리 쿵짝쿵짝 하다가 닷지를 한다던지, 혹은 강제로 닷지를 권유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경력있는 신입이란 우스갯소리같은 채용광고가 있는데 그랜드 마스터의 꼴이 딱 그러하다.
한 판, 한 판이 중요할 수밖에 없는 점수대이니만큼 실력이 보증된 사람들끼리만 게임을 하고 싶어 한다.
그러한 생각을 이해해주지 못할 것도 아니지만 양보해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당연히 미드를 가야지.'
낮은 구간에서 5픽은 무조건 서폿이라 하던가.
다이아나 마스터 초입쯤 되면 조율을 통해 가지만 그랜드 마스터에서는 또 그렇지가 않다.
1픽과 5픽의 점수차이가 크게 나는 경우가 잦다.
현재 잡힌 큐가 바로 그 경우다.
1픽은 그랜드 마스터 1200점이 넘는 최상위권 유저.
그에 반해 나는 아직 800점대에 머물고 있다.
이 400점의 격차는 결코 적지가 않다.
실버와 골드, 혹은 골드와 플레의 격차가 대충 그 정도니까.
막말로 골드티어의 서폿유저가 실버에서 미드잡고 양학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물론 게임의 틀이 잡히고도 남는 그랜드 마스터 구간인만큼 아무래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서도.
확실히 솔랭에서 미드는 중요한 법이다.
그런 중요한 라인을 5픽에게 주는 건 정말 승패에 연연하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일.
아무리 시즌종료의 문턱까지 온 지금이라도 무리한 요구다.
그랜드 마스터 상위권이상, 자신들의 자존심과 연결된 문제이기에 더더욱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나는 당당히 미드를 요구했다.
-미드.
최근 생활사이클이 조금 깨져 잠도 늦게 이룬데다 롤드컵 관전때문에 시간을 꽤나 써버렸다.
사람은 당연 기계 아니기에 필요한 기분전환이었다지만 약간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한 아쉬움.
이러한 판이 두어 번만 반복되면 간단히 메꿀 수 있으리라.
-???? 여기가 무슨 마스터 찌끄레기 구간인 줄 아나, 존댓말 써주니까 우리가 동급같아?
-2픽님 잠만여 5픽 저분 올마스터인데..
-올마스터인데 어쩌라고?
내가 누군지 몰라서 하는 소리는 아닐 터다.
흔히 말하는 신고식.
내가 이전까지의 전적이 있다고는 해도 그랜드 마스터에서 실력을 증명한 적은 없다.
그렇기에 이 정도 텃세는 예상한 바고 없어서야 재미없다.
-게임을 입으로 하나, 내가 너보다 잘한다니까?
나한테 딴지를 건 2픽은 최상위권이 약간 안되는 1100점대 중후반의 유저.
아마추어인지, 연습생인지는 몰라도 부심을 가져도 충분한 실력이다.
하지만 그래도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는 법.
아직 모르는 것 같으니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ㅋㅋㅋㅋㅋㅋ패기돋네. 올마스터고 나발이고 들어는 봤으니 한 번은 믿어주겠다만 두 번은 없다?
-2픽 쟤 원래 싸이코에요. 어련히 이해하고 빡겜해요~
-캬! 이런 거 보는 맛에 본캐큐를 멈출 수 없다니까ㅋㅋㅋ
아무리 서로 간에 시비가 생긴다고 그랜드 마스터 구간.
이 높은 점수대에서 자신을 증명하는 명함이 되는 건 오직 실력뿐이다.
아무리 매너가 좋고, 인성이 좋아도 실력이 떨어진다면 기피된다.
역으로 아무리 매너가 쓰레기고, 인성이 파탄나도 실력이 높으면 존중받는다.
강자생존의 법칙.
거짓말처럼 느껴질 수 있겠지만 진실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비매너 유저들이 늘 만나는 사람만 만나게 되는 이곳에서 게임을 할 수 있을 리가 있나.'
올마스터라는 명함.
어느 프로게임단에 가도 먹히리라 생각하지 않지만 이곳 그랜드 마스터는 다르다.
정말 야생 그 자체.
오직 힘만이, 실력만이 모든 것을 증명한다.
그렇게 조금은 긴장된 분위기에서 시작되는 첫 번째 큐.
나는 무사히 미드를 양보받을 수 있었고 이는 하드캐리의 기본조건이기도 하다.
미드만큼 솔랭에서 캐리력이 좋은 라인은 없으니까.
하지만 자신이 있었기에 방심한 것도 사실이다.
그랜드 마스터 상위권 구간의 신고식으로 만난 상대는 독특했다.
'조금, 아니 상당히 귀찮은 녀석이야.'
로밍력이 좋고, 순간 누킹이 가능하고, 광역딜이 가능하고.
그 외에도 여러가지 이유가 있어 미드는 캐리력이 좋은 게 사실이지만 탑라인처럼 변수가 적은 탓도 크다.
라인이 짧은 탓에 비교적 갱킹각에도 덜 노출되거니와 결정적으로 라인전.
탑라인과 달리 도박적인 수를 두는 챔프가 많이 없다.
탑라인같은 경우 자신의 실력이 높더라도 변수에 휘둘릴 수 있다.
당연하다.
괜히 탑신병자, 탑신병자 하는 소리가 나오는 게 아니니까.
각 챔프별 장인마다 고유의 킬각이 있고 처음 당하면 어, 이게 죽어? 에 죽는 경우가 왕왕 생긴다.
이는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마찬가지다.
물론 실력이 뛰어난 이는 가까스로 살거나, 두 번은 당하지 않겠지만.
그 한 번때문에 한 판을 그르칠 수있으니 골치가 아플 수밖에.
한 판, 한 판이 치명적일 수 있는 그랜드 마스터 구간인만큼 더더욱이다.
나야 뭐 어지간한 장인들의 킬각에 노출되지 않을 자신이 있지만 그래도 사람인 이상 실수, 혹은 망각은 할 수 있는 법이다.
'아무리 그래도…. 타이머싱거는 상대하는 방법을 안다 해도 짜증이 나는데.'
많이 없다고 했지, 아예 없다고는 안 했다.
그 얼마 안되는 도박적인 챔피언 중 하나가 바로 타이머싱거.
하필이면 첫 판부터 만나버렸다.
조금 어거지로 미드를 받아냈으니 당연한 대가라고 퉁 칠 수도 있겠지만은.
'그렇다고 파훼법이 없다고는 안 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쉽게 가자.
단순히 실력차이로 찍어누르는 방법도 당연히 있다.
하지만 이번 판은 중요도가 높다.
2픽 녀석과의 쓸데없는 자존심 싸움은 접어두고라도 이러한 하이큐.
상대적으로 높은 점수대의 유저들과 게임이 잡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만큼이나 많은 보상을 주기에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판이다.
때문에 나는 조금 잔인하지만 5픽이기에 할 수 있는 특권.
그리고 내 챔프폭의 장점을 살린 카운터픽을 활용하기로 했다.
'타이머싱거 상대로 이만한 챔피언이 또 없지.'
이 이상의 챔피언은 없다고 과언할 수 있다.
라인전 능력하나만큼은 로드 오브 로드의 전 챔피언 중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타이머싱거.
그런 타이머싱거라 할 지라도 상대하기 싫은 상성정도는 당연 있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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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작가 힘내라고 쿠폰 보내주신 분들 항상 고맙습니다.
*제가 시차를 잘못 계산한 바람에 오류가 있었습니다.
저녁 식사->점심 시간으로 수정했으며 내용의 흐름상 소소한 수정이 가해졌습니다.
큰 틀에서는 변한 게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