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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 카운트다운
단칸 방에서 한 명의 사내가 중얼거린다.
중얼거리는 내용은 진행하고 있는 게임에 대해.
남자는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했다.
'상황은.. 영 좋지가 않군.'
르풀랑이 킬을 쓸어담았고 끠들스톡 또한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알 방도가 없다.
시야를 장악하고 싶어도 난데없이 튀어나온 르풀랑에게 한 번 잘려버리면 손해가 막심하다.
아무리 한타조합의 구색을 갖췄다고 해도 이만한 차이는 뒤집을 수 없다.
이럴 때 내릴 수 있는 최선의 판단.
'그 방법을 쓰는 수밖에.'
그랜드 마스터 2위에 빛나는 남자.
도차는 자신만큼 솔로랭크에 통달한 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도차가 게임의 전황을 냉정하게 분석해봤을 때 결론은 하나.
팀원들도 말을 꺼내지 않고 있을 뿐이지 생각은 비슷하리라 여겼다.
파사딘[0/3/2]-서렌치죠. 담겜ㄱ
블러디체리[2/2/2]-어, 그래도 돼요?
테러스티나[1/1/1]-넵 담겜갑시다. 전 찬성 눌렀어요.
바론이 먹힌 것도 아니고 억제탑이 나가 것도 아닌데 서렌이라니.
왜이리 끈기가 없냐며 어처구니 없을 수도 있겠지만 그랜드 마스터에서는 일상이다.
그랜드 마스터의 구성원 하나하나는 당연 겜잘알.
안될 게임인지 될 게임인지는 멘탈이 나간 게 아닌 이상 구분할 수 있다.
이번 판이 그 가망이 없는 게임이란 사실은 팀원 모두가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
도차 대 주전파라는 1,2위 결정전의 구도가 나온 이상 눈치가 안 보일 수 없었다.
그런데 당사자인 도차가 시원스레 서렌을 치자는데 동의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한판 진 건 조금 아쉽게 됐지만 다음 판에 이기면 되겠지.'
주전파와 올마스터에게 게임을 졌다.
더군다나 라인전에서 갱킹까지 당했다.
대외적으로 이를 까내리는 이들이 분명 생길 텐데도 도차는 당당했다.
언제나 결과는 모든 것을 증명하는 법이기에.
그리고 도차는 마지막에 결과를 낼 자는 자신이라 확신했다.
'솔로랭크는 대회가 아니다.'
솔로랭크를 하다 보면 지는 판이 왕왕 생기기 마련이다.
팀게임인 이상 로드 오브 로드의 신이 온다고 해도 마찬가지.
당장의 승패보다는 길게, 거시적으로 봐야 한다.
3판 2선승이 아닌 99판 50선승이 될 수 있는 게 솔로랭크다.
그러한 솔랭에 도가 튼 도차에겐 자신만의 철학이 있다.
솔로랭크에서 패배를 하는 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진짜 부끄러운 일은 같은 실수를 한 번 더 하는 것이라는 사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평가할 때.
어떤 이들은 피지컬에 놀라고, 때로는 운영능력에 혀를 내두른다.
타고난 재능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럼에도 도차는 자랑스러워 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난 노력을 무시하는 발언.
재능이란 덧없는 것이라 여기며 자신의 가장 큰 장점은 다름아닌 노력이라 생각하고 있다.
비단 피지컬이, 게임을 보는 능력만이 뛰어나서야 메타와 상관없이 이 정도의 실력을 항상 유지할 수 없는 법이다.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건 오직 노력.
조금 더 자세히 파고들자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라 도차는 늘 자기자신을 담금질하고 있다.
'한 번 실수는 허용범위 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이는 이번 판에서 자신이 행한 실수들.
초반에 찰나의 실수로 킬각을 내준 것 또한 포함된다.
하지만 같은 실수를 또 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반드시 성장한다.
설사 다른 변수가 있다고 해도 그 변수 또한 극복해내면 그만이다.
누구나 하고 있을 이 간단한 학습으로 도차는 밑바닥에서부터 꾸역꾸역 성장해 올라왔다.
자신에게 재능이 있다면 올곧게 노력하는 것.
그리고 실수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것.
실수를 뼈에 새기는 것 또한 재능의 한 방향이란 사실을 부정하지 않겠지만, 피나는 노력이 밑바탕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으리라.
도차는 스스로에 대한 평가가 박했다.
'간만에, 불이 붙었어.'
도차 스스로 그랜드 마스터가 잘한다고 느꼈던 것은 벌써 반년 전의 일이다.
이제는 진부해져버린 플레이들에 실망하고 있지만 주전파를 포함한 몇몇 만은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는 게 언젠가 모든 이들을 발아래로 둘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니까.
자신이 그러한 재능이 있듯 어떤 이들은 또 그들만의 재능이 있다.
대표적으로 주전파.
주전파는 상상하기도 힘든 플레이를 자신있게 해낸다.
이전에 이겼던 수싸움을 한 번 더 꼬아, 혹은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도록 판을 짠다.
그렇기에 라이벌일 수가 있고 자신에게 특별한 사람이다.
올마스터에 대해서는 아직 같은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
어떻게 한두 판 자신을 이겼다고 한들 도태돼버릴 이라면 경쟁상대라 여길 가치가 없으니까.
여길만한 가치가 올마스터에게 있을지.
방금 전 게임을 통해 도차는 많은 생각을 가졌다.
'...두고 보면 알겠지.'
특이한 수를 쓸 뿐이라면 큰 가치를 찾아보기 힘들다.
판이 거듭될수록, 메타가 바뀔수록 도태돼 버린다.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 모든 밑천이 바닥나기 마련이다.
'네 밑천이 어느 정도일지 확인해 주마.'
한 판만으로는 알 도리가 없다.
계속해서 붙어본다면 두 가지 중 하나.
밑천이 드러나거나 그 가치가 보이거나.
어느 쪽이든 자신에게 나쁠 바가 없다.
'전자면 그만인 일일 테지만 만약 후자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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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잉벤도 롤갤도 파프리카TV도.
로드 오브 로드를 좋아하는 팬들이라면 바라고 바랬을 삼파전 구도.
이로 인해 잠을 설친 시청자가 과연 몇 명일까.
아직까지 빠져있는 시청자는 또 몇 명일까.
그랜드 마스터 최상위권에서 펼쳐지는 대접점은 당연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
옛말 하나 틀린 게 없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첫 판은 조금 김이 빠졌다.
그도 그럴 게 이제 조금 재밌어지려는 찰나에 서렌이 나버렸으니까.
그렇게 끝이라도 났다면 쌓였던 기대치가 분노로 터져 펑 터져버릴 뻔했다.
─자고 일어났는데 아직도 계속 하네.
첫 판 서렌나길래 짜증나서 걍 잤는데.
아직도 겜하고 있음? 볼 만함?
└개, 꿀, 잼이었음.
└밤새고 두 시간 후에 학교가지만 여한이 없다.
[글쓴이]-??? 그 정도야? 리플레이 링크좀
└응 자러간다 ㅂㅂ
[글쓴이]-야 이 나쁜놈아!
늦은 밤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날밤을 새우면서까지 주구장창 이어진 삼파전은 서로에게 상처만을 남겼다.
정정하자면 주전파도 도차도 어느 쪽도 승자가 아니었다.
─그럼 결국 올마스터만 점수 빤 겨?
주전파나 도차나 점수 거의 제자리 걸음이고.
그 사이에 낀 올마스터만 신나서 점수 올린 거 아님?
└빅정답맨.
└ㅇㅇ근데 올라가는 속도 보면 슬슬 한계에 온 거 같은데. 아닌가?
└시원시원 올라가더니 약빨 좀 떨어지긴 했어~
당연하다면 당연한 수순.
올마스터는 약자가 강자를 잡으면 그만큼 많은 혜택을 주는 솔로랭크의 시스템을 이용해 단기간에 치고나갔다.
하지만 그 올마스터도 이제 낮은 점수대가 아니다.
곧 있으면 그랜드 마스터 최상위권에 도달한다.
그렇게 되면 현지인들과 마찬가지.
아직까지 시동이 꺼진 건 아니지만 슬슬 브레이크가 걸릴 시기인 것도 맞다.
압도적인 상승세 덕에 올마스터의 1위를 점친 이들도 많았지만 이제는 모르겠다는 분위기.
어느 누가 1위를 해도 이상하지 않다.
이제 시즌종료까지 남은 시간은 단 3일.
다가오는 롤드컵 결승 또한 얼마 남지 않은 가운데 박빙의 승부가 이어진다.
.
.
.
* * *
솔로랭크에서 테이커를 처음 만나면 자연스레 나오는 한 마디가 있다고 한다.
오! 테이커다.
하지만 테이커를 계속 만나다 보면 앞글자가 달라진다고 한다.
아, 테이커다….
기분 탓인지 활자에서 힘이 빠진듯 느껴진다.
이러한 소문은 결코 거짓도 과장도 아니었다.
'확실히.. 복불복이야.'
누군가 말했던 적이 있다.
가장 잘하는 미드라이너를 꼽자면 당연 테이커라고.
하지만 솔로랭크에서 만나고 싶은 미드라이너는 테이커가 아닌 도차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말이다.
도차가 안정적인 플레이를 기반으로 확실하게 승리를 목표로 한다면 테이커는 조금 악동같은 이미지니까.
당연 테이커가 잘한다는 말엔 누구도 이견을 붙일 수 없다.
그러나 솔랭에서 원하는 팀원은 단순히 잘하는 팀원이 아니다.
유리한 게임을 굳히고, 불리한 게임에서 팀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믿음직한 미드라이너를 바란다.
그런데 테이커는 잘할 뿐이지 이길 생각은 영 없어 보이니 그게 문제다.
잘하면서 이기기까지하면 당연 좋겠지만 그게 말마따나 쉬운 일이 아니니까.
막말로 다 이긴 게임에서 '아 끊겼네. ㅈㅅㅋ' 한 마디 나오면 팀원들의 멘탈이 와르르르 무너진다.
물론 테이커라고 해서 의미없이 무리를 하는 게 아니다.
쌓이고 쌓인 시도만큼 테이커는 계속해서 성장한다.
머릿속에서 떠오른 과감한 시도를 실전에서 옮길 수 있기 때문에 테이커는 남들과 차별화되는 슈퍼스타가 된 걸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렇게 슈퍼플레이를 계속해서 목표로 하다가 롤드컵같은데서 빵 터트려 국위선양 해주면 이보다 좋은 일이 있을까.
적어도 한국의 로드 오브 로드 팬들에게 있어선 고무되는 일이다.
당장 문제가 있다면 솔로랭크에서 테이커를 만나는 이들.
그들의 숭고한 희생이 밑거름된 결과라는 사실을 알아주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가 않으리라.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들에는 내가 포함돼 버렸다.
이러니저러니 길어져버린 이 사태를 한 마디로 정리를 하자면.
'...제발 도차 걸리게 해주세요.'
사람의 됨됨이는 그렇다 쳐도 팀원으로서의 도차는 믿음직하다.
그렇다고 테이커, 아니 주전파를 마다하겠다는 소린 아니지만 지금 내가 상당히 피곤하다.
어제 저녁부터 오늘 아침 넘어서까지 쭉 이어져 온 솔로랭크.
자존심매치가 돼버려 지금까지 쭈욱 하고 있지만 슬슬 한계다.
딱 한 판만 더 하고 꼭 자고 마리라.
멘탈이 성할 때야 웃어 넘길 수 있는 트롤링들.
테이커의 기기묘묘한 플레이에 호응을 해주던 나도 이제 머리가 아프다.
오! 테이커다에서 아, 테이커다…로 변했다.
자고 일어나 머리를 환기하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마지막 게임이니만큼 안정적으로 승리를 챙기고 싶다.
그러한 작은 소망이 있다.
'오늘 분은 충분히 했지만 전판에 져서 뒤끝이 찝찝하단 말이지..'
처음 주전파와 도차큐에 걸렸을 때 5픽이었던 나는 이제 3픽 아니면 4픽이 걸린다.
한 단계의 차이가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놀라운 성장.
랭킹 또한 아슬아슬하게나마 10위권 대에 안착했다.
그러니만큼 충분히 할만큼 한 게 맞지만 전판의 패배때문에 기분이 영 언짢다.
쿠웅!
솔로랭크에 대한 열기가 식은 건 나뿐만이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꽤나 오래 걸려버린 큐시간.
이전 판까지의 큐들은 2분 이내에 잡혔을 만큼, 만났던 사람들이 팀만 바꼈을 만큼 게임을 쉬지 않았다.
나, 주전파, 도차 뿐만 아니라 같이 게임을 진행하는 모두가 말이다.
그렇다고 마냥 빡겜만 한 건 아니었다.
처음에는 한 판, 한 판의 승리에 목을 맸던 것도 같은데 어느 샌가 즐기게 되었다.
이런 게 정이라는 걸까.
똑같은 사람들만 하루 반나절 만나다 보니 딱히 말을 섞은 게 아님에도 조금은 친근감이 느껴진다.
집착했던 승리에 대한 갈증도 조금은 희석되어 어느샌가 즐기게 된 것도 같다.
이렇게 된 건 이 급박한 세기말 와중에 게임을 즐기고 있는 한 명때문.
-어, 4픽님. 영혼의 봇듀오 한 판 더? 저 원딜은 잘함ㅎ
하루종일 주구장창 솔로랭크만 돌려서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서도 확실하다.
아군 1픽이 몇 판 지나고 나니 나를 친근하게 불러왔다.
계속해서 만나자 친근감이 쌓인 건 나 또한 마찬가지.
묵묵할 줄 알았던 상대 쪽에서 유쾌하게 다가오자 나도 맞장구를 쳐줬다.
그 아군 1픽이 나를 향해 지옥의 봇듀오를 신청해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 테이커다…."
나도 모르게 육성이 터져나오며 한숨이 함께 내질러진다.
그럴 만도 한다.
연이어서 권유를 해오길래 받아준 적이 있었으니까.
원딜 또한 자신이 있는 라인이니만큼 뭐, 한 판 정도야.
아무리 빡겜이 필요한 시즌이라고는 해도 두 번이나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기도 했다.
그리고 의외로 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
그런 안이한 마인드로 봇듀오를 허락한 내가 멍청했다.
'잘하긴, 개뿔이요….'
바로 전판에서 내가 원딜, 테이커가 서포터.
직접 해보고 나서 말하는 거지만 빈말로도 잘한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내가 피곤에 쩔어진 이유의 1할 정도는 그 망할놈의 봇듀오 때문이다.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미드라이너는 제발 좀 미드에.
나는 막무가내로 원딜러를 픽박으려는 테이커를 말려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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