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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윈터시즌
탈도 많고 일도 많았던 지난 시즌.
준비과정에 지나지 않았다고는 해도 꽤나 고생한 건 사실이다
그리고 그 보람이 열매를 맺어 당도할 수 있었다.
강남호텔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드디어, 드디어.
"자, 드디어 왔습니다. 여기까지 오시느냐 정말 수고 많았어요. 시현씨."
차에서 내리기 직전.
운전석에 앉은 상혁씨가 악수를 건네왔다.
목적지까지 오느냐 상혁씨의 차를 빌려탔기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지만서도.
그 말에 담긴 의미도, 여정도 결코 가볍지가 않다.
"상혁씨도요. 생각해보면 조금 꿀빠신 거 같긴 하지만."
상혁씨의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근 10층 높이의 중형빌딩 앞이다.
정확히는 팀 CLC의 숙소가 위치하는 건물 앞.
이곳에 오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있었고 나는 그 조건을 해결했다.
그리고 그중 절반 이상에 상혁씨의 도움을 받았음은 사실이다.
꿀을 빨았다는 이야기는 아무래도 계약기간.
본디 상혁씨의 역할이 내 현지적응, 그리고 언어문제의 개선이었기에 실질적인 일은 다 끝나셨다.
남은 계약기간동안 할 게 사라지셨다.
까놓고 말해서 상혁씨 입장에선 살판났다.
"하하, 그게 다 선생이 잘났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이거 참 왜 그러시나. 학생이 잘 배우지 않았으면 말짱 도루묵인 거 모르십니까?"
마주 잡은 두 손이 정다워라.
손등 위로 파랗게 솟은 핏줄이 나와 상혁씨의 심리전을 대변해준다.
이러한 남자들 간의 힘싸움은 그만큼이나 친근하다는 의미기도 하다.
"좋은 스승에 그 제자 그렇게 칩시다."
"사실.. 상혁씨를 못 만났으면 이렇게 잘 풀리지 못했을 거에요. 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영어라는 게 애들 장난도 아니고.
아무리 회화 쪽에 올인한 느낌으로 투자했다고 해도 힘든 일이다.
그나마 낯선 외국에 떨어지게 된 바람에 계기가 생겨서 그렇지.
애초에 한국이었다면 시도하기 전에 포기하고 말았으리라.
그 정도로 영어는 나와는 인연이 없는 단어였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참 감개무량하구만.'
떠나가는 상혁씨의 차를 팔을 크게 흔들며 배웅했다.
그러자 남은 건 큼지막한 여행용 가방과 내 몸뚱이.
이제 홀로 CLC의 문을 두들겨야 한다.
나는 마음 굳게 먹고 빌딩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핫숏이 있었으면 편했을 텐데 아쉽게 됐네.'
CLC 내의 유일한 지인이라 부를 수 있는 한 사람.
하필이면 이런 타이밍에 바캉스를 떠나버렸다.
일단 이야기는 들은 부분이지만 1군 멤버들 중 반수가 휴가를 떠났고 한다.
그리고 그 반수엔 CLC의 간판 멤버라고 할 수 있는 핫숏과 트리플리프트까지 포함된다.
물론 숙소에 대해서도 언질이 있었다.
빈손으로 가도 어련히 알아서 해줄 거라는 핫숏의 말.
그 무책임한 헛소리를 무시하고 나는 최소한이 될 선물을 구입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이곳을 향하기 전에 전화를 걸어 대략적인 설명 또한 들었다.
'전화를 받은 사람도 영... 핫숏같았지만 말이야.'
경박스러운데다 말이 너무 빨라 조금 알아듣기 힘들었다.
순도 100%의 한국인이라면 한 마디도 해석하지 못했으리라.
나도 대충 어떤 말을 하는지만 파악한 정도였다.
'카운터는 6층이라, 그곳에 오면 알게 될 거라니.'
정말 어련히 알아서 해줄 거란 핫숏의 설명보다 딱 한 단계 낫다.
하지만 그 편이 나로서는 편하긴 편하다.
알아서 해준다는데 뭐, 이견이 있을까.
문제가 있다면 전화를 받았던 그 난감한 사람이 혹여나 팀원이면 어쩔까 하는 것.
모르는 게 약이라는 생각이 들어 굳이 물어보진 않았다.
'만나보면 또 의외로 좋은 사람일 수도 있겠지.'
차라리 경박하더라도 말이 많은 쪽이 좋을 수도 있다.
나는 이제 아는 사람은 커녕 이름도 모르는 팀원들이 있는 CLC의 숙소에 홀로 적응해야 하니까.
'설마 핫숏은 그렇기에 자리를 비운 걸까.'
어쩌면 이런 타이밍이기에 자리를 비운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함께 하게 될 CLC의 2군 선수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는 말이 적절하다.
그도 그럴 게 연봉도 연봉이거니와 주목도가 남다르니 말이다.
2군이라는 게 얍잡아보일 수 있지만 명실상부 연습생의 윗 단계다.
그리고 1군이라는 스타자리의 전 단계다.
더군다나 다른 팀도 아니라 CLC의 2군.
못 나가는 팀의 1군에 비해 큰 손색이 없다.
즉 실력적으로 쳐지는 부분이 없다는 의미.
자부심을 가질만도 하다.
'에이, 그래도 설마 핫숏인데.'
매사에 장난기가 다분한 핫숏이 과연 그렇게까지 깊은 생각을 했을까.
내가 너무 넘겨 짚는 것일 테다.
잡생각을 하는 사이에 벌써 엘리베이터는 6층에 도착했다.
끼이익….
평소라면 들리지도 않았을 미묘한 쇳소리.
신경을 자극하는 것보면 나도 은근히 긴장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엘리베이터의 문이 서서히 열리고 바깥 세상의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과연 무엇이 있을지.
어떤 세상인지는 가보지 않고선 알 수 없으리라.
하지만 나는 첫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문지기라도 되는 걸까.
두 명의 남자가 엘리베이터 문 앞을 가로 막고 서있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깜짝 놀래키는 게 베스트였다니까?"
"니같으면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런 짓 당하고 싶겠냐?"
티격태격대고 있는 두 사람.
나와 키가 비슷한, 미국인치고는 조금 작다고 할 수 있는 양아치스런 금발의 남자.
그리고 그런 남자를 못마땅한듯 나무라고 있는 날이 서있는 느낌의 뿔테 안경을 쓴 동양인.
무슨 일로 싸우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어찌 됐건.
"일단 좀 들어가도 될까요?"
내가 한 마디 내뱉자 언제 싸웠냐는듯 자연스럽게 길을 비켜준다.
그렇게 둘 사이를 지나쳐 복도에 도착.
펼쳐지는 광경은 오피스텔의 복도와 다름없었다.
'6,7층을 통째로 쓰고 있다고 했던가.. 조금 예상과는 다르긴 하지만.'
아마 이곳에서 개인실과 연습실.
그리고 식당이라 던지 각 방 별로 역할이 나눠져 있을 터다.
칸막이가 쳐져 있는 회사같은 분위기를 생각했지만 아니었던 모양.
외국이니만큼 개인의 사생활을 존중한다고 하는 걸까.
대충 그러한 분위기일 거라 혼자 머릿속으로 자문자답했지만 그게 또 아니었다.
사정이 있었다.
"아뇨, 여기는 팀원들과 코치진들의 개인실 층입니다. 식당은 이곳 빌딩의 공용을 쓰고요. 원래라면 7층에 오셨어야 합니다. 이러저러 설명이 필요하지만 일단은.. 전 데이비드 리입니다."
깐깐해 보이는 뿔테 안경의 남자.
자신을 데이비드 리라 소개한 남자가 차근차근 상황을 설명했다.
상당히 긴 설명임에도 무슨 이야기인지 감을 잡는 건 어렵지 않았다.
듣고 보니 과연 어째서 내가 생각한 숙소의 이미지와 달랐는지, 그리고 7층이 아닌 6층에 도착했는지 이해가 갔다.
바로 데이비드 리의 옆에 있는 껄렁한 느낌의 남자, 프릭때문에.
"아니, 난 그냥.. 선배로서, 그래 선배로서 말이지.'
주저리주저리 변명을 늘여놓는 게 딱 포지션을 알 거 같다.
어느 집단에 가도 늘 있는 가볍디 가벼운 느낌의 친구.
그만큼 친해지기 쉽다는 장점도 있지만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단점도 부각되기 마련이다.
사정을 대충 들어보니 전화를 받은 것도 이 남자.
목소리도 억양도 딱 이 느낌이었다.
혹시 텃세라도 부리려던 걸까.
안 좋은 생각도 들었지만 그건 너무 넘겨짚는 부분이었다.
"장난기가 조금 심한 친구라.. 멍청하지만 나쁜 녀석은 아니니 이해바랍니다."
"미안, 미안. 장난기가 쪼오금 발동해서 말이야."
"저도 장난은 좋아하는 편이지만, 어쨌거나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냥 단순한 장난이었다며.
게다가 사실 지금 카운터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짐부터 푸는 게 낫기도 하다며.
프릭이 전화를 받았을 때와 비슷한 빠르기로 속사포처럼 변명을 쏟아냈다.
사정을 듣고 보니 그럴 만도 하고 일단은 큰 의미부여를 하지 않기로 했다.
"일단은…. 여기 오셨으니 짐부터 푸시죠. 방부터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소개부터 하자니까?"
"닥쳐."
대충 어떤 사이의 둘인지 알듯 하다.
나는 리와 프릭의 따라 기나길 수도 있는 CLC에서의 생활, 그 버팀목이 되어줄 방으로 안내받았다.
그렇게 복도를 쭉 지나쳐 가는 도중.
아직 나를 대하는 게 떨떠름한듯 내 앞에서 이야기를 하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 너도 궁금해 했잖아? Unknown Error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 나랑 심도 깊은 토론을 나누지 않았어?"
"않았다. 했다 쳐도 내가 아니라 라이로와 했겠지."
대화의 흐름을 듣자하니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Unknown Error, 나에 대해 팀원들끼리 이야기가 오고 간 모양.
모르긴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핫숏…. 정말로 아무 것도 안 했구나..'
혹시 나에 대한 이야기가 어느 정도 끝나있지 않았을까.
솔직히 말해 조금 해줬으면 싶었지만 역시는 역시, 핫숏은 핫숏이었다.
두 사람은 나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는 듯했다.
그나마 Unknown Error가 나라는 사실을 아는 정도.
아무래도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나 알아서 이야기를 꺼내야 할 것 같았다.
6층이 제법 넓은 탓에 도착하는데는 약간 시간이 걸렸다.
1군과 2군만 포함해도 10명, 코치진들까지 따로 산다고 하니 이곳의 규모도 이해가 간다.
그렇게 도착한 내 개인실은 보자마자 감이 왔다.
'시설은 솔직히 호텔이 조금 낫네.'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소리다.
아무래도 호텔 본연의 목적이 접대에 특화된만큼 낫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다.
하지만 이러저러 전체적인 셋팅까지 따진다면 다른 이야기.
이곳은 게이머의 방으로는 최적화돼 있다.
'무엇보다 창문이 작은 게 좋구만.'
호텔이라는 게 으레 그렇듯 통짜유리가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다.
근데 이게 관광객 내지 일반인들에게는 좋을지언정 게이머들에게는 거슬린다.
자신만의 공간을 침해받는 느낌이랄까.
무언가 집중이 저해되는 듯하다.
물론 창문이 작으면 환풍이라던지 사소한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지만 그 점은 기술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그냥 간단하게 공기청정기 하나 들여놓으면 해결되니 말이다.
"이전에 쓰시던 컴퓨터는 곧 업체에서 이송이 끝날 겁니다. 구체적으로는 오늘 내에. 아무래도 당신이 살던 한국보단 느릴 겁니다."
끄덕끄덕 듣고 있는 리의 말에서 무언가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한국이라니, 핫숏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게 아닌 것인가.
그런데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저는 중국계 미국인입니다. 태어난 건 미국이지만 말이죠. 여기 사람들에게는 비슷하게 보여도 다 알잖아요? 특히나 한국인들은 특징적이니까."
리가 말해오는 그 특징적인 부분.
호텔에서 일하던 친구, 루시에게서도 들었던 이야기긴 했다.
한국 남자들은 헤어스타일이 다 비슷비슷 하다나.
특히나 왁스라던지.
나름대로 신경을 쓰고 있기는 하지만 티가 나긴 나나보다.
앞으로는 조금 더 수고를 들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리가 로크도그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뭐, 애초에 그는 안경을 안 썼기도 했지.'
'데이비드 리' 라길래 이씨 성을 가진 한국인이 아닐까 지레짐작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내가 아는 로크도그의 미국 이름은 아닌지 고민을 했었다.
하지만 리는 한국인은 아니고 중국계인 모양.
이렇게 되면 CLC 내에 동양인이 나를 포함해 무려 세 명이나 된다.
같은 중국계 미국인인 트리플리프트를 포함해서.
어쩌면 한 명 더 생길지도 모른다.
'로크도그도 이맘때쯤 CLC로 전입을 온 걸로 얼핏 기억이 난단 말이야.'
로크도그는 사실상 미국인에 가까운 한국인.
아무래도 이민자가 많은, 다인종 국가인 미국이니만큼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케이스다.
내가 알고 있는 미래에서 로크도그는 CLC에 스카웃돼서 잠깐 있었다.
사정이 있어 떠나갔다고는 하지만 시기가 미묘하게도 지금이다.
어쩌면 핫숏이 나를 선택한 것이 계기가 되어 미래가 뒤틀려 영입 자체가 취소됐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시간 날 때 핫숏한테 물어보면 되는 일이니. 내 일부터 신경 쓰자.'
일단은 나 자신의 일부터.
나는 내 개인실에 짐을 대충 풀어두고 나왔다.
짐정리 정도야 나중에 해도 되는 일.
이제부터 리와 프릭에게서 이곳 CLC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은 들어야 한다.
'성격은 조금 친해지기 어려워 보이지만서도 뭐, 어떻게든 되겠지.'
가벼운 느낌의 양아치, 프릭보다는 오히려 데이비드 리 쪽이 문제다.
살짝 강압적인 느낌이 풍기는 말본새가 자기주장이 강해보인다.
친해지는데는 시간이 조금 필요할 지도.
딱히 걱정이 된다는 건 아니다.
'게이머는 게임으로 말하는 법이니까.'
게이머라는 족속에선 의외로 흔한 편이다.
자기 주장이 강하고 타인의 접근을 불허하는 타입.
내 얼마 안되는 게임지인 중 하나, 예은만 봐도 딱 그 타입이다.
적어도 수십 배는 심각하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게임을 하다보면 자연스레 풀어진다.
조금은 걱정이 되고 했던 타지에서의 생활.
그 스타트가 제법 괜찮은 느낌으로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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