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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윈터시즌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되물었다.
예은이 말한 2할 이라함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으니까.
"싸대기가 나갈 확률이..?"
가해자, 아니 예은의 말에 의하면 종종 있는 일이랜다.
밖에 나가면 남자들이 집적대는 일이 잦다고.
그리고 2할의 확률로 손이 움직인다고 한다.
확률정립까지 될 정도로 흔한 일이라.
화장기라곤 없는 민낯에 언제나처럼 꾸밈이라곤 없는 옷차림.
꾹 눌러쓰고 있는 모자까지 그대로건만 좋은 옷걸이는 그 자체만으로도 눈에 띈다는 걸까.
솔직히 길거리를 지나치다 만났으면 고개가 한 번쯤 돌아갔을 거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기에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나도 젊었을 적엔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길거리에서 핸드폰 번호를 따인다.
군대가기 전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땐 그런 사건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너무 오래전 일이기도 하거니와 지금의 나하고는 인연이 없어진 일이다.
이걸 뭐 어떻게 말을 이어야할까.
감이 안 잡혀서 떨떠름하게 서있자 예은이 짜증난다는 듯한 어투로 대꾸해왔다.
"말은 끝까지 해야지. 나한테 집적대는!"
말꼬리를 높여대는 예은때문에 순간 행인들이 발걸음을 멈췄지만 이내 지나쳤다.
아까와 같은 시원스런 싸대기가 터져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
행인들에겐 아쉬울지 커녕 나는 이 녀석의 매서운 손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아까처럼 맞았다건 정말 일주일은 볼이 탱탱 부어 있을 테지.
'애도를 표하마.'
정말로 질이 안 좋아 한 대 맞은 걸지도 모르겠지만.
그 화끈한 손맛에 데여 본 적이 있는 나로서는 측은한 감정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하고 많은 여자들 중에 하필 이 녀석이라니.
아까의 말썽 탓인지 저기압이 돼버린 예은이 나를 향해 쏘아붙이듯 말을 던졌다.
"그래서 왜 보자고 한 건데?"
"아니 그냥.. 놀자고."
말을 길게 하면 왠지 말꼬투리를 잡힐 것만 같은 예감.
안 좋은 예감은 백이면 백 맞게 되더라.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기에 일단은 비위를 맞춰주기로 했다.
"기분이 영 편찮아 보이시는데 말 걸어도 되겠습니까?"
"..걸어봐."
까칠한 표정을 유지하면서도 악화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대하는 게 껄끄러워진 건 사실이지만 분노조절은 되시는 듯.
다행스럽게도 방금 전 사태의 여파가 나에게 끼쳐오는 일까진 없었다.
"그래서 어떤 사정이 있으셨는지?"
"딱히.. 별 거 아니야."
별 거 아닌 일로 사람 싸대기를 날릴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무서운 사람이 아닐 수 없지만 어쨌건.
기분 상하게 하신 그 놈 멱살을 잡아끌고 와야 속을 풀어주실까.
신중하게 말을 고르던 와중에 예은이 툭 던지듯 먼저 말을 내뱉어왔다.
"늘 있는 일인데 그냥 니가 눈치없게 나타났잖아."
앞말도 뒷말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생각보다 자주 있는 일인 모양이다.
앞으론 만나는 장소선택에 있어 고려를 해봐야겠다.
더불어 생각했던 코스를 조금 비틀어야 할 것 같았다.
"원래 영화라도 한 편 보려고 했는데 그럼 밥부터 먹을까?"
"영화? 니가 웬일로?"
내가 무슨 못할 말이라도 한 걸까.
예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듯이 나를 쳐다본다.
내 안에서 밥순이는 밥으로 달래는 게 제격이라 결론이 나있었는데.
의외로 영화라는 단어에 관심이 있어보였다.
이 녀석이 밥보다 좋아하는 게 있었다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만 어쨌건 좋아하는 쪽으로 해주자.
그렇게 마음먹고 온데다 상황도 이러하니 그 편이 나으리라.
"영화 보고 싶어?"
"뭐.. 볼 건지에 따라서."
딱히 간다는 말은 안 했지만 그런 눈치여서 말을 꺼냈는데 말꼬리를 흐린다.
그래도 영 관심이 없는 건 아닌지 쭈뼛쭈뼛.
혹시 내가 흥미가 떨어지는 영화를 이야기한다면 말을 바꿀까.
정말 난감하기 짝이 없는 상황일 수 있지만 별로 그렇지도 않다.
'후후, 이번 경우에 한해선 자신이 있지.
만약 내가 어떤 영화를 하는지, 그리고 어떤 영화가 재밌는지 몰랐다면 심기를 건드렸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 영화는 취미도 아니고 문외한이 가까스로 아닌 정도에 준하지만 자신이 있다.
공교롭게도 난 알고 있으니까.
'이맘때쯤 재밌었던 영화가 그거였지.'
한국이 아니라는 사실이 조금 패널티로 작용하긴 해도 미국이다.
헐리우드 영화의 본고장.
대한민국에 헐리우드 영화가 수입되는 게 하루이틀 일도 아니니 알 수밖에 없다.
어렴풋이 남아있는 기억에 인터넷에서 검색한 감평을 더하니 볼만한 영화를 추려낼 수 있었다.
"그럼 가자."
"야, 야!"
잔뜩 화를 내서인지 삐딱해진 예은의 모자를 손바닥으로 꾸욱 눌러주자 반응이 언짢다.
혹시 아직까지 화를 내고 있을까 스위치를 눌러본 거기도 했는데 원상태로 돌아온 모양.
굳이 밥쪽으로 선회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
.
.
.
* * *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
이미 본 영화면 어떡할까 걱정도 했는데 다행이었다.
어지간하면 좋은 쪽으로는 표정변화가 없는 예은의 표정이 나빠보이지 않는 것만 봐도 중간이상은 되었으리라.
어쨌거나 화는 제법 풀리신 모양이니 나는 떠올랐던 궁금증을 물어보기로 했다.
영화를 보는 중간에 문득 들었던 의문.
별 의미는 없지만 대화를 시작하기엔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근데.. 너 사람 안 때린다고 하지 않았냐?"
"안 때리는데?"
째려본다.
그 이상 물어보면 다음 타자가 너가 될 거라고 경고하는 듯한 표정.
소름이 돋을 정도였지만 농담이었는지 금새 표정을 고치며 말을 꺼내왔다.
"기본적으로는 말이야. 집적거리는 놈들한텐 얄짤없어."
"그 기본의 틀이.. 부디 엇나가지 않기를 바란다."
일단 영화를 기다려면서 사정은 청취해뒀다.
어지간해서야 손이 나가진 않는데 조금 끈적거렸다나.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서 관심이 꺼질 때까지 내버려두려고 했지만 한 마디가 심기를 거슬렸단다.
자기가 CLC의 프로게이머라나 헛소리를 떠들어댄 건 둘째 치고.
자신을 롤을 좋아하기만 여자로 생각했다는 게 괘씸했다고 나를 노려본다.
아니, 왜 나를?
"별 이상한 놈 다 보겠지?"
"그러..게?"
그 사람이 사칭이건 아니건을 떠나서 일단 나도 CLC의 프로게이머다.
부디 그 불똥을 나한테 튀지 않았으면 한다.
그런데 어쩌다가 그런 이야기가 나왔을까.
그리고 내가 모르는 CLC의 프로게이머라니, 잘 연결이 되지 않는 느낌이다.
"CLC숙소가 그 근처라서 있을 만한 이야기기도 한데.. 그 사람 한국인 아니었어?"
"그러니까! 웃기지 않아?"
예은이 소리를 버럭 질러오자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뜨끔했다.
하지만 내가 같은 한국인에 CLC 소속이긴 해도, 난 그 사람이 아니니 부디 싸대기를 날리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예은이 쓰고 있는 모자를 보며 어째서 남자가 롤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을지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저 모자가 결승전에서 산 기념품이었나.'
삼일 전에 예은과 롤드컵 결승전 관람하러 갔을 때.
나오는 길에 기념이라며, 그리고 자기는 모자를 자주 쓰니까 하나쯤 있어도 되지 않냐며 잔뜩 합리화를 붙인 다음에야 사버렸다.
기념품이라는 게 프리미엄이 조금 심하게 붙기 마련이니 바보같이 산다는 느낌을 주고 싶지 않았던 모양.
본인이야 잔뜩 신경쓰이는 듯했지만 나로서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돈내는 본인이 만족한다는데 딱히 딴지를 걸 이유가 있을까.
그런데 그 모자때문에 일이 생기다니 참 별일이지 싶다.
"그냥 허세를 떤 거 아닐까? 프로게이머가 길거리 자갈 마냥 굴러다닐 리 없잖아?"
"그으래? 내 옆에 있는 누구도 프로인 거 같은데?"
베시시 웃으며 내 옆구리를 툭툭 쳐오는 예은.
저러다 가끔 힘을 줘서 쿡 찌를 때가 있어서 방심하기가 무섭다.
'다행히 영화가 꽤나 괜찮았나 보네.'
이 녀석이 웃음을 흘리는 경우는 정말 기분 좋을 때 빼곤 없으니까.
평소에는 억지로 웃는 법도 모르는 녀석이다.
굳어있는 표정이 풀릴 정도라면 중간이상이 아니라 꽤나 흡족한 듯하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오늘 하루는 예은의 기분을 조금 더 풀어줘도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리라.
.
.
.
* * *
사나이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라는 속담이 있지 않던가.
남자는 그 속담을 믿고 용기를 내어 벴다.
벴더니 돌아온 건 싸대기였다.
'무슨 여자애가 손이 그렇게 매워....?'
살다가 그렇게 아프게 맞아본 적이 또 있을까?
남자는 자신의 왼 뺨에 얼음주머니를 문지르며 울분을 삭히고 있었다.
아니, 맞은 것 자체는 그다지 화가 나지도 야속하지도 않다.
진짜 문제는.
'애인이.. 있었다니.'
혼자 있는 줄 알고 말을 건넸는데 알고 보니 애인을 기다리는 중이었다라.
쪽팔려도 이러한 쪽팔림이 또 없다.
하지만 남자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 사실을 알았다 하더라도 자신은 포기하지 않았을 테니까.
첫눈에 반하다라는 말.
지금껏 단 한 번도 와닿은 적이 없건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미국땅에서 한국의 두 남녀가 조우하다니 이게 운명이 아니라면 무어란 말인가.
그때 자신은 회까닥 돌아 있었다.
'살면서 내가 언제 또 여자한테 용기를 내보겠어?'
흔하디 흔한 도보 위에 흔하디 흔한 옷차림을 하고 있던 그녀.
순간 불어온 바람에 그녀가 쓰고 있던 모자가 틀어져 버리지 않았다면 눈치채지 못했으리라.
그렇게나 아름다운 여성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혹시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한 걸까.
그녀는 볼을 붉히고 있었다.
아무리 11월이라고는 해도 기본적으로 춥지가 않은 로스앤젤레스의 낮에 어째서.
마침 자신이 그 앞을 지나치지 않았다면 눈치채지도 못했을 미약한 홍조는 메말랐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첫눈에 사랑을 느꼈다.
그리고 그 첫사랑의 대가는 비싸디 비쌌다.
'이거 1주일 안에 가라앉긴 하려나?'
과장 조금 보태면 주먹만하게 부어오른 볼따구.
차라리 멍이었으면 계란이라도 비볐을 텐데.
왼쪽 뺨에 빨갛게 퍼져있는 손자국은 어디 하나 들어간 데가 없다.
정말 완벽하게 그녀의 오른 손바닥이 맞닿았다는 느낌이다.
한동안은 어디 돌아다니기도 힘들 정도로 부어버렸다.
'강렬..했지.'
뺨따귀를 얻어맞았을 때 세차게 울리는 파동에 넋이 나갔다.
정신을 잃을 뻔까지 했다.
하지만 그보다 마음이 아팠던 건 그녀에게 애인이 있었다는 사실.
자신과 특별히 다를 거 없이 보이는 평범한 남성이 그녀의 곁에 섰다.
그 광경을 더는 1초도 지켜볼 수 없었다.
그래서 도망쳤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꼭 도망칠 필요는 없었던 듯싶었다.
최소한 자신이 말실수만 안 했다면.
'그래, 그건 좀 아니었어.'
솔직히 실수였다는 건 인정한다.
쓰고 있던 모자에 박힌 롤드컵마크를 확인하고 그만 흥분해 버렸다.
그도 그럴 게 자신의 특기분야였으니까.
롤을 좋아하냐, 자신을 아냐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설사 자신을, 로크도그라는 프로게이머를 안다고 쳐도 아니됐다.
신나서 자기 이야기만 하는 사람.
자신이 생각해도 꺼려지는 부류다.
첫 만남에 실수를 해도 너무 크게 했다.
'아니면 혹시.. 믿어주지 않았던 걸지도 몰라.'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막 때리는 사람이 존재키나 할까.
그녀의 가녀린 팔이 움직이게 될 정도면 자신의 엄청난 실수가 맞다.
조금 고민한 결과 내려진 결론은 하나.
자신의 허풍이 그녀의 팬심을 긁어버린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이 시즌에 북미에 왔을 정도면 높은 확률로 CLC의 팬.
결과적으로 CLC가 중도탈락했다고는 해도 롤드컵 우승후보는 당연 CLC였으니까.
그런데 CLC의 프로게이머를 자처했으니 심기를 건드릴 만도 했다.
설사 사실이라고 해도 받아들이는 입장에선 거짓말이라 여겼을지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그저 믿어주지 않았던 거라면 오히려 기사회생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
자신이 CLC의 프로로서 활약을 하게 된다면.
그녀가 CLC의 팬인 이상 자신의 얼굴을 볼 수밖에 없으리라.
'아직 기회는 있다.'
혹여 팬미팅같은 곳에 올지도 모른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미약한 홍조를 띄고 그녀가 사과를 해온다면 베스트.
이상적인 관계로 탈바꿈될 수 있다.
사귀었던 남자친구가 있었던 것 같지만 어쩌면 단순히 친구나 남동생이었을지도 모를 일이고.
만약 정말로 남친이었다 해도 게의치 않다.
자신에게 온다면 이전의 과거따위야 아무래도 상관없다.
남자는, 로크도그는 맹세했다.
정식으로 CLC의 일원이 되기 전의 고작 1주일 남짓.
원래라면 그동안 바빠서 못본 영화라도 보면서 시간을 떼울 작정이었지만 고쳐잡았다.
곧 다가올 윈터시즌에서 그녀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단 일분일초도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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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않고 눌러 주시는 추천 정말 감사합니다.
부족한 작가위해서 쿠폰 보내주시는 분들 항상 고맙습니다.
*댓글이 너무 많아서 씁니다..
혹시 억측이 생길까봐 일부러 때리고까지 시작했는데..
선을 그어드리자면 걱정하시는 방향으로 나갈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지루하시다는 독자님들..
지금까지 여러 챕터가 걱정에서 시작됐는데 다 좋게 끝났잖아요.. 최근 한국솔랭 챕터도 그랬고요.
지루한 부분이 없으면 재밌는 부분도 있을 수 없습니다..
못난 작가놈 믿어 좀 주십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