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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윈터시즌
화창한 봄날의 날씨.
초겨울의 로스앤젤레스가 딱 그 정도다.
사람에 따라서는 아주 약간은 쌀쌀하다고 느낄 수 있는 온도.
마침 내 앞의 상대가 그런 느낌인가 보다.
"으엑.. 니 표정 소름돋거든?"
"하하, 소름이 돋다니.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지긴 했나봐?"
주말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예은에게 용건이 있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용건이 있어 만나는 경우는 처음인데.
그 탓인지 표정관리가 잘 되지를 않는다.
나 스스로 생각해도 억지웃음을 짓고 있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얼른 이실직고 하시지?"
"나같이 선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일단 어디 좀 가서 얘기하자."
내 옆에서 구역질이 나온다는 표정으로 후드티를 쓰고 따라오는 예은.
영 찜찜한지 간간히 나를 째려봐온다.
그렇게 쳐다봐도 딱히 숨기는 건 없는데.
뭐, 외적으로는 말이지만.
'아무래도 필요해.'
어젯밤 잠을 설치면서까지 생각을 해봤다.
어찌나 고민이 되는지 푹신한 침대에 누워있는데도 잠이 솔솔 오지를 않더라.
잠드는 시간을 한참 넘어 고요하고 어둑한 새벽까지 시간을 보내고나서야 드디어.
고민의 결과는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단순하다.
나 혼자서는 안된다는 것.
허나 두 명이라면, 그리고 이미 한 번 호흡을 맞춰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이 수월해진다는 확신이 섰다.
물론 쉬운 길은 아니다.
무려 두 명의 허락을 얻어야 했으니까.
하지만 한 명은 생각 외로 수월했다.
조건이 까다롭게 붙기는 했지만 정 필요하다면 가리지 말라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정말 한 마디 더 사족을 안 붙이길 다행이었다.
'이 녀석이라니.'
무언가 불만이 있는 듯한 눈초리로 나를 찌릿찌릿 노려보는 예은을 보며 속으로나마 한숨을 푸욱 내셨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 녀석 이상의 결론은 없다.
기량되지, 성장가능성 있지, 호흡도 맞춰봤지.
성격을 포기하고 다른 모든 것을 얻은 듯한 녀석이다.
그렇다고 내 억지만을 부리기도 뭣하지만.
'그저 솔직하게 물어볼 뿐이야.'
이러한 이유로 나와 예은이 발걸음을 옮기는 곳은 평소와 달리 꽤나 멀어졌다.
한국에는 정말 어디든 있는 곳이지만 미국은 그렇지가 않으니까.
어제 밤을 샌 이유는 내가 지금 가고 있는 장소를 찾는다는 이유도 포함됐다.
고민을 하면서 스마트폰을 끄적끄적 돌려 찾아내고 말았다.
"언제까지 가야 하는데?"
"곧이야 곧."
정말 다행스럽게도 미국에선 흔하지 않은 그곳이 한인타운에는 있었다.
그 중에서도 조금 시설이 괜찮은 곳을 따로 찾아봤으니 도착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이렇게 고생해서 갔는데 재미없는 곳이면 죽는다?"
"죽이기 전에 한 번쯤 재고는 해주고.. 일단 거의 다 왔어."
내가 목적지를 사전에 알려주지 않자 옆에서 쫑알쫑알 떠들고는 있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따라는 온다.
그렇게 30분을 넘게 걸어 도착한 곳은 으슥한 골목길.
나도 인터넷으로만 확인하고 처음 오는 곳인지라 상당히 낯설다.
예은도 무언가 찝찝해진 듯 주위를 둘러본다.
마지못해 따라오고는 있지만 발걸음이 늦어지는 게 영 내키지를 않는 모양.
하지만 정말로 이제 곧이다.
골목길을 지나 맞은 편 건물에 간판이 걸려있었다.
"여긴.."
도착하자마자 먼저 말을 흘리게 된 건 내가 아니라 예은이 되었다.
확실히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내가 어젯밤에 밤을 괜히 설친 게 아니다.
정말 심사숙고 끝에 결정한 장소다.
"어쩌다 이런 곳에 올 생각을 다했어?"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가끔은 괜찮잖아?"
내 말에 예은이 고개를 끄덕끄덕 해온다.
살짝 미소짓는 표정을 보니 의외로 썩 마음에 든 모양.
다른 녀석은 몰라도 이 녀석은 그럴 줄 알았다.
나와 예은은 그대로 가게 내부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노출된 장소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둘이서 온만큼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 후미진 장소가 좋았다.
그 편이 더욱 집중도 되고 말이다.
"잘 못하기만 해봐라."
"풋! 내가? 네 걱정이나 하시지?"
간만에 자연스런 분위기가 나올 정도로 도착한 장소는 재미지다.
PC방.
한국에는 길거리의 자갈 마냥 흔하게 있지만 외국에는 뜨문뜨문 한 그것이다.
그러고 보면 예은이나 나나 게임에는 정말 지대한 관심이 있지만 이곳에 오는 건 처음이다.
더욱이 잡은 좌석은 커플석.
외국PC방에는 개인석밖에 없다고 들었지만 차분히 찾아보니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한인타운이 크게 성장한 L.A에 산다는 게 다행이었다.
'이제부터가 진짜지.'
굳이 고생해가면서 커플석이 PC방을 찾은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옆에서 이야기를 하기 편하니까.
그리고 표정을 보기 좋으니까.
가까운만큼 진심으로 이야기를 터놓을 수 있다는 판단이다.
"근데 너 언나운 뭐시기로 듀오해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부계정이 있거든."
나는 그랜드마스터인 Unknown Error계정 대신에 이전에 팀랭크에서도 활용했던 부계정을 꺼냈다.
혹시 대리게임이 되는 건 아닐까 의문도 들었지만, 라이로가 그런 부작용은 생각치 않아도 된단다.
CLC팀 공용계정이고 대놓고 돌려쓰지 않는 이상 제재당할 염려는 없다고.
프로게이머의 특권 정도로 생각하란다.
현재 그 부계정은 마스터티어 중반 점수대.
듀오를 하게 된 예은의 아이디는 다이아1이다.
이전에 나한테 구입방법을 물어본 그 계정.
대리문제야 딱히 걸리지만 않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플레이하고 있는 듯했다.
아무래도 뭐 미국에서 잠시 쓸 계정이니 큰 애착은 없는 듯.
사실 나는 부계정으로 할 생각이 없었지만 예은이 한사코 싫어했다.
미국에 온 후로 바빠서 게임감각을 많이 잃었다고.
너무 높은 구간대에서 게임을 하는 건 내키지가 않는단다.
"내 플레이에 한 마디라도 토달면 허벅지를 팅팅 붓게 만들 거야."
"...내가 하자고 해놓고 뭐라 할 정도로 속 좁진 않다고.."
이 녀석이 썩 눈치를 볼 일은 없겠지만 어쨌든.
예은이 이런 말을 꺼내두는 이유도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도 그럴 게 자존심이 무척 강한 아이니까.
반년 전까지 실버였던 나한테 따라잡힌 데다 이제는 실질적인 점수차이까지 나버렸다.
나는 프로지망, 그리고 예은은 공부를 했기에 당연히 벌어진 격차지만서도 아무래도 이 녀석은 지기를 싫어하니까.
"아얏, 진짜.."
"이거의 10배만큼 꼬집을 테니까 기억해 두라고."
게임의 로딩창부터 벌써 한 방 먹어버렸다.
익히 당해왔으니만큼 누구보다 잘 알지만 정말 손힘이 억세다.
손톱까지 뾰족 자라있어 제대로 꼬집히면 피멍이 들겠지.
실수로라도 트집잡지 말자고 마음먹으며 게임이 시작됐다.
"어, 미드하게?"
"응, 요즘 미드가 재밌어서. 전에 니가 가르쳐준 것도 있고."
카지트.
이전에 생긴 게 귀엽다면서 어떤 챔프인지 알려달라고 했는데 설마 미드로 쓸 줄은 생각도 못했다.
내가 Unknown Error로서 활동한 이력을 아는 예은인지라 당연 정글 아니면 탑으로 쓸 거라 생각했는데.
어쩌다 그쪽으로 생각이 닿았을까?
"그냥 니가 바보라서 탑정글로 사용하는 거 아니야? 이거 누가 봐도 미드챔픈데."
"호오, 어떤 면에서?"
CLC 프로의 면전에 대놓고 바보라 날릴 수 있는 녀석은 정말로 흔치 않으리라.
자기 주관이 확고하다.
그런만큼이나 이곳저곳에서 트러블만드는 제조기긴 하지만서도 게임보는 눈만큼은 확실히 날카롭다.
잠재력이 높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이전에.. 나는 어째서 이 녀석이 아니면 안된다고 생각했을까..'
LCL 결승전을 진행하던 와중에 그런 생각이 잠시 들었다.
잠깐이라고 해도 강렬했기에 기억에 남아있다.
역시 나에게 맞는 파트너는 이 녀석뿐인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타임끝의 실력이 부족하지 않았음에도 무언가 완벽하게 맞물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얼마 전 성장하게 된 타임끝과 완벽한 듀오랭크로 저격러 두 명을 격파한 후로 또 다른 생각이 싹트게 됐다.
그저 결승전의 결과가 좋지 않은 흐름으로 흘러간 탓에 사고가 새버렸던 건 아닐까 하고.
그렇기에 그때의 생각이 과연 맞았는지.
오늘 예은과 PC방에 찾아오는 이유는 그것을 확인해보기 위함도 있다.
─Welcome to Summoner's field!
이제는 이쪽도 저쪽도 익숙해진 여성 아나운서의 음성.
한국어 음성이 귀여운 맛이 있다면 북미쪽 음성은 반듯하다.
성인 여성의 매력이 느껴진다.
"헛생각하지 말고 게임에나 집중해."
"니가 말하기냐!"
이번 게임에서 내가 맡은 라인은 정글이다.
LCL에서와는 완전 반대가 되었지만 오히려 잘 됐다.
미드보다는 정글이 전 라인을 두루두루 살피기에 좋으니까.
'이 녀석과 게임할 때 한 번 트집 잡히면 주구장창 물어 뜯으니까. 나도 빡겜에 들어가 볼까.'
딱히 예은의 잔소리 때문만은 아니고 자존심이 있다.
아무리 내가 Unknown Error라는 사실을 상대가 모른다 해도 체면이 있지.
이런 구간에서 실수를 해서야 쓸까.
언제나 그렇듯 전력으로 깔아뭉개 준다.
─퍼스트 블러드!
아군이 적을 처치했습니다.
'벌써?'
아니, 내가 마음먹은지 얼마나 됐다고 뻘쭘하게.
다름아닌 미드에서 첫 승전보가 울려왔다.
게임감각이 영 아니라더니 이거 완전 내숭이 따로 없다.
"키킥, 1킬이라도 덜 딴 쪽이 PC방비랑 밥값까지 전부 내기다?"
솔킬을 딴 게 어지간히 기쁜지 검지와 중지를 펼쳐 V자를 만든 예은이 신이 나서 웃어재낀다.
하지만 내기를 한다고는 입도 벙끗 한 적 없는데.
이거 완전 날강도가 따로 없다.
날강도한테 삥뜯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번 판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이 듬과 동시에 하나의 의문.
'그런데 어떻게 솔킬을 땄지?
탑도 아니고 미드다.
미드라고 솔킬이 터지지 않으리란 법은 없지만 아무래도 쉽지가 않다.
방금 전 예은의 태도를 보면 어지간히 자신감이 있었던 듯한데.
'그 방법을 썼구나..!'
확실히 카지트라면 가능하다.
그것도 힘의 영약 스타트를 한 카지트.
2레벨을 찍고 제대로 고독각을 노려버리면 알고도 당해버린다.
그런데 아직 미드카지트가 주류도 되지 못한 현재.
적은 제대로 된 대처조차 못했고 이는 당연 솔킬로 이어졌다.
'하지만 누가 이길지,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법이니까.'
딱히 내기 때문이 아니더라도 지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
간만에 잡은 리심으로 하드캐리 좀 해볼까.
3레벨을 찍은 나는 적팀의 정글로 향했다.
'슬슬 레드도마뱀 체력이 1천 아래까지 깎였으려나.'
솔킬을 따인 미드라인 커버때문에 적팀의 정글러 아모모는 두 번째 버프를 먹는 게 늦어졌다.
때문에 나는 조금 늦은 타이밍의 엇박자 카정을 갔다.
아모모가 레드도마뱀을 잡는 속도를 생각해봤을 때 이제 곧이라는 판단.
부쉬속에서 숨을 죽이고 시기를 기다리던 나는 윗부쉬로 천천히 이동했다.
타악!
혹시라도 올 카정을 방지하기 위해 레드도마뱀을 부쉬까지 끌어서 먹고 있던 아모모.
나는 아모모가 먹던 레드 도마뱀을 정글러의 필수 스펠 단타를 사용해 뺏었다.
아모모의 입장에서 어처구니가 없으리라.
'카정을 올 시기도 아니거니와, 왔다고 쳐도 자신이 있었겠지만.'
일반적으로 카정을 오는 시기는 2레벨이다.
그런데 아모모는 미드라인 커버를 하면서 3레벨을 찍어버렸다.
더욱이 단타까지 그대로 들고 있었으니 뺏기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터.
하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위해 포션을 빨면서 블루버프를 단타없이 먹었다.
그 보람이 꽃을 핀다.
이쿠, 이쿠!
어차피 레드버프도 뺏어버린 마당에 조급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천천히 평타를 묻히며 아모모를 괴롭혔다.
어차피 도망갈 생존기라곤 전무한 아모모.
기껏해야 쌍둥이 골렘이 있는 위쪽 벽을 넘어 도망가는 것이리라.
하지만 생각외로 아모모는 대담했다.
투욱!
붕대를 던지고 맞상대를 한다.
도망가봐야 나한테 따라잡힌다는 생각때문일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적 미드가 커버를 오고 있겠지.'
언뜻 본 미니맵에 적미드라이너가 사라져있다.
그런데 아군 미드라이너 녀석은 빽핑조차 찍고 있지 않다.
이 무정한 녀석.
나무라기에는 아직 이르지만 말이다.
쿠직!
적팀의 미드라이너 코리아나.
나한테 채 당도하기도 전에 카지트의 갈고리에 찢겨져 나간다.
아무리 먼저 출발했다고 해도 기본 이동속도와 돌진기의 유무.
더불어 점멸까지 써서 패시브 평타를 묻힌 카지트에게서 코리아나는 도망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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