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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첫눈은 L.A보다 빠르다
얼마 전 치뤄졌던 롤챔스 본선무대의 조별 리그.
열두 개의 팀이 A조부터 D조까지 총 네 개조로 갈라졌다.
각 조에서 두 팀이 올라가고 한 팀은 떨어진다.
얼핏 보면 쉬워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어렵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변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대회무대라는 게 자신이 좋아하는 팀을 응원하는 맛도 있지만.
이변이 벌어져 강팀이 탈락하고 약팀이 올라가는 맛 또한 찰지다.
얼핏 지옥의 조라고도 일컬어지던 B조에서 벌어진 상황이 마치 그러했다.
우승 후보로 손꼽히는 불밤.
그리고 그에 준하는 가짜에어 독수리.
마지막으로 신생팀에 지나지 않은 삼선 블루가 속한 B조다.
그런데 삼선 블루가 강팀을 다 때려잡고 조 1위로 올라갔다.
─왕위를 계승하러 왔습니다..
무슨 일이냐? 뭐하는 게냐, 삼선 블루야!
왕위를 물려받는 겁니다 불밤님!
└ㅋㅋㅋ 왕위드립 흥하네.
└근데 ㄹㅇ 오지긴 했다.
└이눔들아 불밤 아직 탈락 안 했어ㅋㅋㅋ
왕위드립이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시즌2에 불밤이 겪었던 여정과 현재 삼선 블루와의 상황은 비슷했으니까.
2군에 불과한 형제팀, 흙수저 출신으로 대성했던 불밤이다.
그런데 삼선 블루 또한 팀내에서 2군 취급을 받는다는 소문이 있다.
흡사 비슷한 과정을 밟으며 전설을 써내려가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또다시 전설이 탄생하는 건 아닐까?
하는 추측과 기대는 그렇다 치고 아직 불밤은 탈락하지 않았다.
하나의 조에서 탈락하는 팀은 어디까지나 하위팀 하나 뿐이니 말이다.
─결국 독박 쓴 건 가짜에어 독수리네.
불밤도 쪽 당하긴 했지만 올라가긴 했으니까.
삼선 블루한테 발리고 독수리한테 분풀이한 건 재밌었음ㅋㅋ
└ㄹㅇ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짐.
└원래 고래는 독수리 아님? 새우가 고래잡은 격 아닌가?
└게임이 그랬다는 거지 게임이.
씨지맥을 중심으로 화끈한 탑캐리를 보여주는 삼선 블루.
루즈한 게임으로 극후반 승부만을 노리는 가짜에어 독수리를 잡아내자 반응이 그렇게나 좋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가짜에어 독수리가 롤챔스에서의 성적은 좋아도 조금.
아니, 상당히 재미없는 게임들만 보여주기로 유명했다.
막말로 가짜에어 독수리의 경기는 시작하면 밥먹으러 가라.
밥먹고 돌아와서 다시 켜도 재밌는 장면 다 챙겨볼 수 있다.
가짜에어 독수리의 극수비스러운 게임은 악명이 높았다.
그런 지루한 게임만을 해대는 강팀을 상대로 초반부터 몰아붙여 승리를 따낸 삼선 블루.
잉벤을 포함한 커뮤니티등에서 환호하는 것은 당연했다.
경기 전날 올린 씨지맥 본인이 올린 글은 성지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제가 말카림을 꺼낸 이유는요..
내일 있을 롤챔스를 보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절름발이가 꼭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경기로 보여드릴게요!
씨지맥이 잉벤에 올렸던 글의 전문.
다시 한 번 보니 마지막 문장이 크게 와닿는다.
말카림없이도 이변을 만들어냈다.
└찻잔이 식기 전에 돌아오겠습니다ㄷㄷ
└캐리머신 ㅁㅊㄷㅁㅊㅇ….
└성지순례 왔습니다. 여친 생기게 해주세요.
└응, 안 생겨.
└씨지맥님 갓빈 해설이 거미여왕 예측했는데 보셨나요!
강조냐, 혹은 강소리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가끔 헛해설을 해대는 롤챔스의 강빈 해설.
그런데 그가 웬일인지 맞는 말을 해왔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거미여왕 픽.
강빈이 맞춰버렸다.
그 사실은 씨지맥 또한 당연 알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씨지맥입니다. 응원과 격려메세지 감사합니다!
같은 인사성 메세지는 둘째 치고 저도 녹화동영상 돌려봤습니다.
그 강빈 해설님이 거미여왕 예측하셨다는 거요.
제가 보기엔.. 그냥 소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 같긴한데ㅎㅎ
농담이구요. 강빈 해설님 사랑해요!
└헐 본인등판. 깨알같은 강빈디스ㄷㄷ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었구나ㅋㅋㅋ
└ㄹㅇ 솔찌 운빨이었다.
자랑스레 올 만도 하다.
의미심장한 메세지를 남기고 결과가 안 좋으면 그만큼 쪽팔린 일도 없지만.
역으로 결과가 좋으면 반응을 보고 싶어서라도 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씨지맥이 또다시 잉벤을 찾아오는 날이 올지.
└앞으로도 잉벤 놀러와주세요!
└이러다 롤챔스에서 한 번 실수하면 잉벤러들 우두르급 태세전환하는데ㅋㅋㅋ 알고 계십쇼ㅋㅋ
└ㅋㅋㅋ 그래서 프로들이 잉벤 안 옴.
뒤에 남겨진 댓글들은 살짝 소름이 돋는다.
꾸준하게 승승장구하며 좋은 경기력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들은 고스란히 씨지맥의 팬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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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CLC의 일과는 기본적으로 평일에 한정된다.
주말에는 당연하게도 휴일.
그런 주말이 왔음에도 예은은 무언가 불만이 많아 보인다.
"힐링이 필요해."
예은이 한껏 볼을 부풀린 채 투덜거려 온다.
무슨 얼어 죽을 놈의 힐링?
반사적으로 내뱉으려던 나는 말을 삼켰다.
'꽤나 스트레스를 받았나 보네.'
곰곰히 생각해 보자면 그럴 만도 했다.
예은이 해온 노력은 나조차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바로 응석을 받아주면 긴장이 빠질 수도 있는 노릇.
나는 한 번 더 예은을 채찍질하기로 했다.
"조금 더 할 수 있지 않아?"
"그래도.."
평소라면 버럭 소리라도 질러왔겠지만 정말 힘이 빠진 듯하다.
그도 그럴 게 예은은 하루 반나절이나 내 방에서 뒹굴었다.
딱히 놀았다는 건 아니고 소환자의 전장에서 힘 좀 쓰셨다.
"딱 한 판만 더 하자."
"으엑, 토나와."
진심으로 구역질이라도 할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예은.
예은은 현재 나에게 1:1 코칭을 받고 있다.
그 동안 뒤쳐진 부분을 따라잡으려면 주말에도 쉬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이유.
남들 쉴 때 쉬고, 놀고 있을 때 놀아서야 쓸까.
이제 열흘 가량밖에 남지 않은 대회를 준비하는 시간은 빠듯하다.
겸사겸사 분노조절 부분도 해결하고 말이다.
"그럼.. 아까 거 계속 해줘."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여듯 부탁해온다.
하지만 코칭이라는 게 운전석 옆자리 조수석에서 귤까주는 정도가 아니다.
피곤한 건 나도 매한가지인데 말이지.
그래도 노력하는 게 제법 기특하기도 하니 조금 정도는 들어주기로 했다.
"그럼 절충해서 5분만 한다?"
"10분 하자 10분. 이런 미녀의 어깨를 주무르는데 고마워하진 못할 망정."
아무리 째려봐도 각하다.
플레이를 봐주는 코칭도 상당히 심력이 소모된다.
힐끔 째려보던 예은은 어쩔 수 없이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평소라면 조금 더 대들어 왔겠지만 게임은 이미 시작된 마당.
이제 와서 무를 수는 없으니 집중해야 한다.
예은은 현재 정글을 중점적으로 하고 있다.
미드야 결국 탑의 연장선.
플레이 방식도, 하는 챔피언도 크게 다르지 않아 무리가 없다.
하지만 정글은 다르다.
독나타스와 스크림을 여러 번 반복할수록 드러난 사실이지만.
그 후에도 다른 팀들과 스크림을 할 때 지적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지만.
예은의 시야가 조금 좁다.
아무래도 탑을 위주로 하던 예은이다 보니 전라인을 두루 살피는 능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아마추어 대회에서야 크게 상관이 없었지만 프로무대에선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오는 기회는 반드시 받아먹고 아군의 드러내는 틈은 최대한 커버를 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넓은 시야가 반드시 필요하다.
분노조절이 우스갯소리로 꺼낸 말이긴 해도, 흥분한 나머지 시야가 좁아진다는 일은 정말로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내 정성진 안마를 받고 기분 좋은 탄성을 흘려대는 바로 지금처럼.
"음~ 손가락 두꺼워서 기분 좋아."
"..오해 살만한 소리 하지 말고 게임에나 집중하라고."
솔직히 말하자면 이 녀석 어깨가 보들보들해서 만지는 나도 기분이 묘하다.
보드라운 피부 밑에 뭉쳐진 근육들.
풀어주는 보람이 제법 있다.
'생각보다 작단 말이지.'
여자치고 크다고 할 수 있는 예은이지만 나보다는 당연 작다.
그럼에도 평소엔 딱히 체격 차이가 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자세라 해야 할까, 기세라 해야 할까.
실질적으로는 내가 10CM가 조금 안되게 큼에도 딱히 작다거나 하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직접 만져보니 조그마하다.
한 손으로 완전히 뒤덮을 수 있는 어깨.
두 손바닥으로 감싸안자 엄지 손가락이 목덜미까지 닿는다.
"하아... 조금만 더 세게 눌러줘."
"침이나 닦고 정글이나 돌아라.."
피곤에 절어있을 때.
목덜미 부근을 꾸욱 눌러주면 정말로 날아갈듯 기분이 좋다.
자칫 긴장을 놓으면 입가에서 침이 질질 흘러나올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기분이 좋아도 게임 중이다.
초반이라고 한들 정글러는 긴장을 풀면 안된다.
나는 안마를 해주면서 모니터 화면을 보며 하나하나 지적했다.
"카정 생각하면서 먹는 거야? 봇라인 상황봐서 2렙갱 생각해야지. 화면이 자꾸 탑만 보고 있잖아?"
"째째하게 시시콜콜. 말 진짜 많네."
뤁툴 거리며 입술을 뾰루퉁 내밀고 있는 예은이지만 저래 봬도 꾹 참고 들어준다.
게임을 가르칠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이 바로 말을 안 듣는 것.
그리고 불만을 가질 때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예은은 나쁘지 않은 제자다.
마음에 쟁여두지 않고 뱉는데다 제대로 실천을 하고 있으니까.
'이 녀석을 빠듯이 키워내야 해.'
다른 팀원들도 조금씩 조언을 해주고 있지만 예은이 가장 중요하다.
가장 호흡을 많이 맞춰야 하는 사람을 꽂는다면 당연 이 녀석이다.
이 녀석이 잘해야 나 또한 하고 싶은 플레이를 할 수 있다.
어깨를 주물러 달라는 둥 헛짓거리에 어울려 주는데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정글 먹으면서 계속 전라인 체크하고, 와드 박은 곳 파악하고, 적정글 동선 생각해서 루트를…."
"그 입 막아줄까?"
마우스와 키보드에 두 손을 할애하고 있는 터라 조금 만만히 보고 쪼아댔다.
그런데 고개를 올려 턱을 까닥까닥 하는 게 확 박치기라도 해버릴 기세다.
살쾡이같은 예은의 눈동자에 담긴 위협은 반정도 진심같다.
'..오래 살려면 조심조심 살아야지.'
이전에 로크도그를 한 대 확!
갈겨 버렸던 것도 그렇고 성질나면 어떻게 할지 모르는 예은이다.
이미 해야 할 말은 다 뱉은 후이기에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 때의 사건에 대해.
'참 우연이란 말이지.'
얼마 전에 로크도그의 입을 통해 들었던 사실이지만 당시.
한인타운 한복판에서 싸대기를 후려 맞은 주인공이 바로 로크도그란다.
이야기를 시작했을 땐 다소 당황했지만 들어보니 별 거 아닌 오해였다고.
'보험금 쪽으로 가면.. 예은이 승소하려나?'
법조계로 산다는 게 참.
사람을 패버려도 돈과 힘이 깡패라는 사실이 무섭게 느껴진다.
그런 녀석을 방금 전 쪼아댔으니 다시 입을 떼는 게 조금 망설여진다.
"야, 한 마디 했다고 꿀먹은 벙어리 되지 말고.. 빨리 아까처럼 떠들어대란 말이야."
"니가 하지 말라면서.. 어쨌든 조합 보이지? 네 생각엔 어디를 키워야 할 것 같아?"
윽박지른 건 한 마디 일지언정 내가 느낀 생명의 위협은 진짜지만 어쨌든.
원한다면 해준다.
아직까진 대회보다 솔랭에 익숙한 예은을 위해 나는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했다.
"잘하는 쪽..?"
"솔랭에서야 틀린 대답이 아니겠지만.. 아무쪼록 대회 기준으로 생각하자."
현재 예은이 플레이하고 있는 게임의 양상은 이러하다.
예은의 팀은 조금 짬뽕같은 느낌.
적팀은 전형적인 원딜캐리 조합이다.
"원딜을 잡는 게 중요하니까.. 내가 큰다?"
"아니.. 만약 팀원이 프로라면 말이야. 당장 이 게임의 승패는 접어두고."
정말 반만 정답이다.
혹여 이 녀석, 정답을 알면서도 질질 끄는 걸지도 모른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가르치는 보람은 있는데 항상 말대답.
자존심때문에 간간히 태클을 거는 거라면 이해해줄 수도 있는 노릇이니 넘어간다.
물론 예은의 대답이 틀렸다는 건 아니다.
예은이 플레이하는 챔피언은 노텀.
노텀은 잘 성장하기만 하면 원딜러 한 명 찢어죽이는 건 여반장이다.
하지만 솔랭과 달리 대회게임에서는 정글러의 성장이 부족할 때가 많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봐바, 탑이 말카림이잖아? 말카림을 조금만 풀어주면 한타 때 같이 원딜 물만 하지?"
"피, 다 아는 거다 뭐."
꿀밤을 쥐어박고 싶은 발언을 해오지만 참아야 한다.
막말로 이 녀석 때리면 보험처리도 안될 수 있다.
무서워라 법조계.
어쨌건 게임은 무난하게 승리했다.
원딜캐리 조합인 상대팀은 한타에서 별 힘도 못 쓰고 패배했다.
그 이전에 라인전의 패색이 짙었던 탓.
잘 큰 노텀과 말카림이 강제로 무는 터라 방법이 없었다.
"나 잘했지?"
"솔랭 한 판 이겨놓고 푼수질은, 머리라도 쓰다듬어 줄까?"
핀잔을 주려고 내뱉은 말인데 의외로 예은이 반응을 해오지 않는다.
옆구리라도 찔러올 줄 알고 힘주고 있었는데 움직일 기색이 없다.'
오히려 무언가 기대하는 눈치.
의자에 앉아 고개를 올린 채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이 녀석과 하루 이틀 어울려온 게 아니니만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저녁 뭐 사줄까?"
"......더럽게 비싼 거."
설마 장난이겠지
이 녀석이 나한테 얻어먹을 때 음식값으로 쫑알거린 적은 없다.
뭘 사줘도 꾸역꾸역 잘 먹는 밥순이다.
그 밥순이에게 의외의 봉변을 당하리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레스토랑에 도착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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