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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첫눈은 L.A보다 빠르다
빠른 속도로, 하지만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다.
다가오고 있는 롤챔스 윈터시즌.
만반의 준비가 차근차근 갖춰지는 와중이다.
"니가 조금만 더 굴.. 아니, 밥값을 해주면 완벽할 거 같은데.."
"하? 난 누구가 놀러 갔다 온 사이에도 열심히 하고 있었거든?"
종종 내 지갑을 가볍게 만들고 있는 예은.
최근 예은이 내 코칭을 받으며 부단한 노력해주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나라고 양심없게 놀고 있었을 리 있나.
당연히 코칭하는 시간 외에도 시간이 빌 때마다 따로 하는 게 있다.
'솔직히 조금 맛들렸기도 하고.'
CLC에 온 이후로 나는 꾸준히 헬스를 하고 있다.
유산소 운동이 아닌 근육 트레이닝 위주로.
운동이라는 걸 하다보니 재미가 들렸기도 하거니와 아무래도 필요하다
이곳은 한국이 아닌 미국이니까.
미국 사람들은 남자들끼리의 기싸움이 한국보다 심하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운동 안 하는 사람들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당연 케이스 바이 케이스겠지만 기본적으로 그러하다.
TV를 보면 종종 인종차별을 받는다는 이야기.
그 대부분이 사실이 운동을 안 해서 얕보였다일 정도로 말이다.
여튼 간에 꾸준하게 해오던 트레이닝은 내 체형이 꽤나 변했을 정도로 성과가 있었다.
당연하게도 챙겨 먹는 보충제 덕도 있고 팀원의 도움.
운동에 꽤나 관심이 많은 헤일커드가 많이 도와줬다.
그 보람찬 성과가 이러한 결과를 낳을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어쭈…. 호오..?"
암코양이처럼 손끝을 세운 예은이 내 팔뚝을 쿡쿡 찔러온다.
팔뚝부터 시작해 쇄골 그리고 복부.
가끔 가다 짜증이 나시면 이렇게 긁어오신다.
대놓고 할퀸다기 보단 손톱 끝으로 사르르르 매만진다.
"야.., 적어도 손톱은 세우지 마라.."
"깎았으니 괜찮지 않아?"
아무리 손톱을 다듬었다고 한들.
깎았다는 정도는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
남자는 살이 나올 때까지 잘라내곤 하지만 여자는 기껏해야 손끝까지다.
게다가 손톱을 손질한 게 최근인지 각이 날카롭게 서있다.
살가죽이 살짝 찢어지면 어떡하지, 옷 위로 느껴지는 감촉이 아찔하다.
실제로 종종 빨갛게 부어있기도 하다.
더군다나 이렇게 긁어대다 마지막에 날리는 한 방이.
"뭔가, 열받아."
한 마디 툭 내뱉고 손바닥으로 찰싹 쳐댄다.
이 녀석 손맛이 워낙 매워서 옷을 걷어 올려보면 새빨간 자국이 찍혀 있을 정도.
더욱 열받는 건 적반하장 격의 태도다.
"꼴에 운동 좀 하나봐?"
"..보면 모르냐."
이 멍청아.
마지막 말을 내뱉으려던 나는 꿀꺽 삼켰다.
쉴 시간을 빼앗아 연습을 시켰기 때문일까.
최근 이 녀석이 행동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내 옆구리를 찌르는 경우야 왕왕 있었던 일이었지만 조금씩 격해지고 있다.
가끔씩 주먹으로 툭툭 건드려온다.
내가 운동을 해서 그렇지 옛날이었으면 정말 골병들었다.
"단단해지니 뭐랄까.. 때리고 싶어져."
"..콩머스 때리다가 반사데미지에 죽어 봐야 정신을 차리지."
그래도 영 이해해주지 못할 건 아니다.
스트레스의 분풀이를 하는 거라면 어느 정도 받아줄 요량이 있다.
주말에나 하던 1:1 개인교습.
요즘은 평일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진행하고 있으니까.
가르치는만큼 착실히 느는 예은이지만 그게 오히려 마음에 걸려서 더욱 몰아붙였다.
'꾸역꾸역 더 가르쳐 주고 싶단 말이야.'
보통 한 사람이 지나치게 공부에 몰두하다 보면 한계에 도달하기 마련이다.
가르치는 것보다 까먹는 것이 많아지는 분기점이 있다.
그런데 이 녀석은 그런 면에서 봤을 때 그릇이 큰 편이랄까.
공부 잘 하는 녀석이 게임도 잘 한다는 말이 터무니 없는 헛소문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마치 스펀지에 물을 붓는 것처럼.
과연 어디까지 흡수할지 궁금할 지경이다.
솔직히 연구실의 실험쥐 느낌이 조금 난다.
"한국은 슬슬 시작했지?"
한참 나한테 화풀이를 하던 예은이 잡담을 걸어왔다.
돌리고 있는 큐가 영 잡히는 게 늦어 심심한 모양.
눈을 치켜 올린 채 볼을 살짝 부풀려 있는 것 보면 나를 그렇게 때려놓고도 뚱한 듯하다.
"바보야, 씨지맥 8강까지 간 거 몰라?"
"피~. 어차피 난 누구때문에 바빠서 알 수가 없네요."
폭력적인 부분말고도 여러가지 시비를 걸어오게 됐지만 자업자득이다.
예은말고 내가 말이다.
다른 팀원들의 실수는 어지간하면 이해하거나 우회하려 하는데 반해 예은의 실수는 걸고 넘어지게 됐다.
연습때는 말을 안 해도 둘이 남았을 때 꼬치꼬치 캐묻는다.
이 녀석의 성격을 고려한다면 아직까지 터지지 않은 게 솔직히 기특하다.
그렇기에 아까 나를 긁어올 때도 그렇고 어지간한 일은 이해해주고 있다.
하지만 씨지맥은 조금 기억을 해주는 편이 좋을 텐데.
"같이 발맞춰 오던 팀원이잖아? 신경 좀 써주라고."
"흥, 다 너때문이야."
행동도 그렇고 말투도 그렇고 과격해지고 있다.
잘 버텨주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슬슬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전에 이 녀석이 헛뱉은 말마따나 기분전환이 필요한 걸 수도.
나는 큰 마음을 먹고 결심했다.
"오늘은 어쩔 수 없지만.. 그럼 내일은 연습 끝나고 DVD방에라도 가서…."
"가서?"
아직 말도 채 끝나지 않았는데 눈을 초롱초롱 빛내온다.
조금 전까지 나를 때리고 째려보던 녀석이 태세전환은 우두루급이다.
나라고 감정이 있어서 이 녀석을 쪼아대는 게 아니지만 어쨌든.
이렇게 반응이 좋은 걸 보면 가끔은 나가서 하는 것도 괜찮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DVD방에라도 가서 큰 화면으로 한국 롤챔스를 시청하자. 연결은 뭐, 노트북으로 하면 되겠고."
"진짜.. 쥐어패고 싶다."
그럼 뭐 영화라도 볼 줄 알았나.
시기가 시기인데 기분전환도 전투적으로 해야 한다.
게다가 평소에도 때리고 있는 주제에 무슨.
'맞아도 안 아프도록 옷을 두껍게 입고 가야겠네..'
제대로 심기가 거슬리셨는지 손을 부들부들 떨고 계신다.
그나마 다행인 건 조금 전 큐가 잡혔다는 사실.
분풀이는 부디 상대팀에게 하길 바란다.
'이제 고작 일주일이 채 남지 않았으니.. 빠듯하다고.'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때려박아야 한다.
예은의 머릿속을 빠듯이 채워야 내가 편해진다.
그리고 내가 편해져야 게임이 수월해진다.
다가올 윈터시즌을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실험쥐는 부단히 챗바퀴를 구르고 있다.
.
.
.
* * *
아직 본선의 첫 경기도 시작하지 않은 북미와 달리 한국은 벌써 8강이 진행되는 와중이다.
8강에서는 두 팀씩 총 네 개 조가 4강을 목표로 경기를 치룬다.
이미 세 개의 조가 경기를 마쳤고 준결승 진출자가 확정지어졌다.
─클라스는 영원한다 역시 불밤..
삼선 블루한테 한 번 져가지고 불안불안 했는데.
8강에서 형제팀인 삼선 레드 압살해버림ㄷㄷ
어차피 조별리그는 무조건 올라가니까 살살 했나벼.
└엥, 그거 완전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격 아니냐?..
└우승이 중요하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당장 한두 판 지고 이기는 게 문제가 아니잖아?
└너 불밤 개객기, 얼밤 만세 해봐
└개, 개객….
조별 리그 B조에서 2위 성적으로 8강에 진출했던 불밤.
삼선 블루에게 한 판을 내준 탓에 D조가 아닌 A조의 진출자와 맞붙게 되었다.
A조의 1위인 삼선 레드가 8강의 상대였다.
삼선 레드는 삼선 블루와 같은 구단 소속으로 형뻘이 되는 팀이다.
그만큼이나 삼선 블루에 비하면 선수들 개개인이 아마추어 시절부터 촉망받았다.
팀의 실력도 실력이거니와 A조의 멤버들이 무난했던 탓에 2승을 해서 조 1위로 8강에 진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뭣하는가.
B조 2위로 올라온 불밤을 8강에서 만나게 되었다.
이번 윈터시즌의 우승 후보 중 하나인 불밤.
삼선 레드는 불밤에게 2대 떡으로 무참히 패배했다.
─삼선 구단주 입장에선 좀 글켔다.
만약 8강이 내전됐으면 둘 중 하나는 무조건 준결승 가는 거였잖아?
이러다 둘 다 떨어지면 ㄷㄷ
└글쎄, 간다고 쳐도 블루가 갔을 거 같은데?
└레드가 형 아니냐? 형 쪽이 더 잘하는 거 아님?
└실질적인 게임은 블루가 더 잘하는 거 같던데.. 얼밤이 불밤의 형팀이라고 더 잘하는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너 불밤 개객기 해보라고.
└개, 개객….
8강 마지막 조의 경기는 삼선 블루 대 마진 수비대.
이미 예선전에서 한 번의 경기를 치뤘다.
승부 또한 결론이 났었다.
특별한 이변이 생기지 않는 한 삼선 블루가 이기지 않을까 하는 것이 커뮤니티의 반응.
물론 지난 LCL 서머시즌 이후로 이변이 꽤나 잦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마진 공격대의 팬들로선 형제팀인 수비대가 이기는 것을 내심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이변이라는 게 과연 쉽게 일어날까?
이변만 일어나서야 그건 이변일 수 없는 법이다.
대부분의 경기가 예상을 벗어나지 않아야 어쩌다 가끔 역배당이 터질 때 재미가 찰지는 법.
그렇게 8강 마지막 조인 삼선 블루 대 마진 공격대의 경기가 무난한 흐름으로 굳혀져 가는 가운데.
사실상 확정이 지어진 준결승의 대진표는 과연 눈을 부라릴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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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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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얼밤도, 불밤도 준결승 진출 축하하고 누가 올라가던 절대 원망하지 말자!"
"당연하죠, 오늘도 그렇고 앞으로도 계속! 얼밤과 불밤이 영원하길, 건배~!"
얼밤의 주장 클끼리와 불밤의 주장 빅빠따맨.
둘의 축사는 회식자리의 술잔을 옮기는 신호탄이 되었다.
남자들이 술자리를 가지는데 굳이 이유가 필요하겠느냐만은.
적어도 진행되고 있는 회식자리는 두 가지나 의미가 있었다.
쟁쟁한 경쟁 상대들을 꺾고 형제팀인 얼밤과 불밤이 준결승에 진출했다.
첫 번째 목적은 그 준결승전의 진출을 순수하게 축하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그 하나라면 바쁘디 바쁜 시간 쪼개서 회식까지 가질 이유가 없다.
일분일초라도 연습에 매진해 결승전을 목표로 해야 할 테니까.
여기서 필히 짚고 넘어가야 하는 하나의 사실이 있다.
바로 얼밤과 불밤 서로가 준결승전에서 맞붙게 됐다.
즉, 어차피 결승에 올라가는 것은 둘 중 하나 뿐이다.
현재 열리고 있는 회식자리에 담긴 깊은 속뜻.
떨어진 팀이 올라간 팀을 시기하지 않도록 친목을 다지기 위함이었다.
"결승에서 만났으면 아주 좋았을 텐데.. 아쉽게 됐습니다, 클끼리 형님."
"하하, 그러게. 그런데 빠따맨아 연습실에서 방망이 좀 치워주면 안되겠니..? 가끔 신경쓰여서 말이야…."
훈훈한 대화가 오가는 와중에도 회식자리의 취기는 깊어진다.
남자들이 가지는 술자리가 으레 그러하듯 한두 잔 마신 걸론 끝나지가 않는다.
얼밤의 주장 클끼리를 포함해 팀원들은 헤롱헤롱.
당연히 불밤 선수들 또한 피부가 붉어졌지만 이상하게도 정신만은 또렷했다.
<애들아, 적당히 물섞어 마시다가 회식 후에 연습실로 집합한다. 이견은, 안 듣는다.>
금일 회식이 결정되고 1시간 후, 불밤의 단톡방에 이러한 공지가 올라왔다.
공지를 올린 이는 불밤의 주장 빅빠따맨.
팀원 중 그 누구도 쉬이 넘어갈 수 없었다.
평소였으면 모르되 상황이 상황이었으니까.
형제팀인 얼밤을 재치고 반드시 결승전에 가겠다.
그러한 마음이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
12강 조별 리그에서 삼선 블루에 패배했다는 사실이다.
그 이후로 빅빠따맨은 불밤의 팀원들을 쪼아대며 강행군을 요구했다.
어느 정도냐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팀원들의 잠시간을 줄인다.
그리고 쪽잠까지 자게 하며 어떻게든 평소 컨디션을 유지시킨다.
정말 무서운 건 그 관리가 너무 철저하기에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티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
완전한 제 컨디션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적어도 육안으로는 식별할 수 없다.
<티내면.. 알아서 해라.>
한낱 2군에 불과했던 불밤이 어떻게 롤챔스의 우승후보로 손꼽히는 강팀이 될 수 있었을까?
팀원들의 열정과 노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은 물론이다.
거기에 더해 아주 약간의 스윙질.
지나친 연습시간에 불만을 갖던 팀원들이 있었다.
그들은 빅빠따맨과 담배를 한 대 태우고 돌아온 이후로 달라졌다.
그 어떤 힘든 연습도 마다하지 않게 된 데다 매사에 긍정적인 마인드가 넘쳐 흐르게 됐다.
이 정도의 통솔력과 화합력이라니, 빅빠따맨은 참으로 훌륭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간에 불밤은 조별 리그에서의 망신을 만회하기 위해서 하루하루를 피나게 보내고 있다.
벼르고 벼른 칼날은 다가오게 될 준결승전을 위함.
넘어서 어쩌면 결승전에서 만나게 될지 모를 삼선 블루를 향했음은 물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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