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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에도 겨울이 찾아왔다
한국보다 대략 2주 느리다.
한국의 롤챔스 윈터시즌이 끝난 직후, 북미도 드디어 개막했다.
아니, 개막하기를 넘어서 도착했다.
나는 이미 나는 선수 대기실에서 다가올 경기의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다.
조금 문제가 생겨버렸지만.
"..괜찮다며?"
"그냥 마스크만 한.. 콜록!"
참고 있으려 했지만 기침이 튀어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목구멍이 간질간질해지는 기침반사는 정말 불가항력이다.
'참, 되게 거슬리네.'
다행히도 컨디션에 영향을 주는 몸살감기는 아니다.
그저 기침이 조금 나올 뿐.
게임은 충분히 할 수 있지만 상당히 거슬린다.
"정말로 괜찮아?"
그렇게나 열심히 자신을 쪼아댔던 주제에 몸관리를 못했냐고.
예은이 한 소리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싱겁다.
어울리지도 않게 걱정이나 해주는 걸까.
"괜찮아, 괜찮아. 내가 발목잡을 일은 절대.. 콜록!"
"멍청아. 그런 거 아니거든? 따듯한 음료수라도 가져올 테니 어디 가지 말고 거기 있어라."
나를 한 차례 흘겨본 예은이 명령조로 툭 쏘아붙인다.
그리고 선수 대기실을 휙하니 나갔다.
'대체 어디서 뭘 어떻게 구하려고?'
선수대기실에도 기본적인 음료수야 준비돼 있지만 뜨거운 부류의 것은 없다.
겨울이라고 해도 로스앤젤레스의 오후.
온도변화에 민감한 사람에게도 기껏해야 쌀쌀한 수준이다.
시내에 나가면 반팔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흔할 정도.
물론 긴소매 옷을 입는 게 일반적인 선택이지만 말이 그렇다는 거다.
미국이니만큼 차같은 것도 없다.
그런데 대체 어디서 따듯한 음료수를 구하겠다는 건지.
"달라니까 주던데?"
".........."
시계의 초침이 두 바퀴를 채 돌지 않았는데 어느새 돌아온 예은.
손에는 머그컵 한 잔이 들려 있었다.
머그컵을 받아 그 안을 보니 따끈한 김이 올라오는 블랙 커피.
어디서? 어떻게?
물으려던 나는 그냥 조용히 커피를 마셨다.
여자가 이쁘면 세상을 살기 편하다.
만국 공통사항이라는 사실을 잠깐 까먹어버렸다.
"뭐, 고맙게 마실게."
"흥, 당연히 고마워 해야지. 여기 직원분한테 내가 부탁해서 얻어온 건데."
연하게 우려낸 블랙 커피.
설탕을 섞지 않았다는 점이 차를 연상케 한다.
그러고 보면 커피도 차의 일종이던가.
천천히 한 모금 마시자 막혔던 목이 풀린다.
'이 녀석이 은근히 행동력은 좋으니까.
경기장의 직원분한테 커피는 어떻게 얻어왔고.
그 직원분은 또 어떻게 찾으신 걸까.
이유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미 이곳 경기장도, 선수대기실은 한 번 같이 와본 적이 있었다.
"다른 주까지 갔으면 컨디션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는데 다행이란 말이야."
"하, 지금도 비실비실해 보이거든? 빨리 몸이나 뎁히고 있어."
이번 윈터시즌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치뤄진다.
우연이 아니다.
한 달보다 조금 전에 열렸던 로드 오브 로드 월드 캠피언 컵.
그 영향으로 윈터시즌 또한 덩달아 L.A에서 열리게 됐다.
대회 개최측의 입장에선 기존 시설을 쓰는 게 간단하기도 하거니와 홍보.
북미 롤챔스는 매 대회마다 전국을 오간다.
전국이 아니라 아예 다른 나라, 캐나다에 가기도 한다.
비용도 비용이겠지만 홍보하기 위한 수고가 장난이 아니다.
개최지 선정 또한 골치 아픈 문제다.
그렇기에 이곳 로스앤젤레스.
롤드컵의 감동을 다시 한 번, 같은 문구로 홍보와 개최지 선정 문제를 한 번에 잡을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여러 사정이 겹쳐 북미 롤챔스의 윈터시즌은 L.A에서 열리게 됐다.
솔직히 나에게도, L.A에 뿌리 내리고 있는 CLC에게도 조금은 어드밴티지가 있는 부분.
"미국은 시차도 온도차도 골치 아프니까. 추운 곳에라도 갔으면 악화될 뻔했어."
"알고 있으면 좀.. 쉬고 있어 멍청아."
왜 내가 아픈데 네 기분이 더 나빠 보이냐.
한 마디 하려다 참았다.
이제 곧 시작되는 우리 CLC의 경기.
뿐만 아니라 선수 대기실에 있는 건 우리 두 뿐만이 아니니까.
"오늘도 부부싸움 장난 아니네. 키킥."
"프릭 너.. 그러다 저번에 맞지 않았냐?"
흘러나온 말은 다시 줏어담을 수 없다.
예은이 가볍게 흘겨보자 프릭은 움칫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갈 준비를 한다.
이런데까지 와서 바보짓 하지 말라고.
"하아…. 정말 바보들 투성이야."
나지막하게 내뱉은 예은이 한숨을 쉬어온다.
쫓을 생각은 없어 보이지만 못마땅한 모양.
프릭을 흘겨보는 눈초리를 돌리지 않는다.
'하지만 맞는 말이지.'
예은의 말마따나 정말 바보다.
나도 그렇고, 저 철딱서니 없는 프릭도 그렇고.
나같은 바보와 요 한 달간 어울리며 코칭을 받은 이 녀석도 그렇고.
"슬슬 갈 시간이다. 준비해둬 다들."
"코치님! 저기 무서운 누님이 저 자꾸 째려보는데요?"
"그건 우리 중국의 속담으로 자업자득이란 거다."
나머지 팀원들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까지 2군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진심으로 우승을 목표로 하고 있다.
정말 바보가 아닐 수 없다.
'노력하는 바보는 미워할 수가 없단 말이야.'
그 바보들의 대장으로서.
현 CLC 2군의 주장으로서 바보들의 패배를 묵과할 수 없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기침이 나오기 전에 빠르게 말을 이었다.
"이 한 달간 다들 내 억지에 어울려줘서 고마워."
고작 한 달이다.
발을 맞춰온 시간은 결코 길지가 않다.
하지만 사람의 우정은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가 이뤄낼 성과 또한 마찬가지다.
팀내에서 내 억지에 가장 어울려준 사람은 예은이다.
하지만 나머지 멤버들 또한 평소보다 훨씬 고생했음은 물론이다.
이곳 미국 사람들이 새벽을 새는 경험.
페이를 더 받는 것도 아닌 시간외근무.
인연이 없었을 텐데 끈질긴 한국 사람 만난 탓에 참으로 고생했다.
어울려온 시간은 길지 않았으되, 쏟은 노력은 얕지가 않다.
우리 CLC 2군.
반드시 해낼 수 있으리라 팀의 주장으로서 장담한다.
"나는 좋은 경험했다고 생각해. 그런데 한국 프로들은 원래 그렇게 연습시간이 많아?"
"김치를 먹으면 힘이 솟는다던데. 오늘 경기끝나면 회식으로 한식 레스토랑이라도 가자고?"
헤일커드의 농담에 진지했던 분위기가 어느새 장난스러워진다.
이게 CLC 2군의 평소 모습.
바보같긴 하지만 가진 바 열정은 거짓이 아니다.
그 노력과 열정을 헛되이 만들어서야 쓸까.
다름아닌 내가 그리하게 만들 것이다.
"그럼, 다들 일어나자!"
"아니 그건 내가 할 말인데.. 시현이 넌 은퇴해도 코치든 감독이든 걱정이 없겠다."
코치인 라이로조차 마지막까지 장난스럽다.
하지만 경기장에 들어서는 순간 모두의 표정이 가라앉는다.
장난스러웠던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다.
후끈한다.
"LCL와는.. 비교가 안되네."
"너 말고도 다들 이 정도 대회에는 처음 나와바. 긴장감이 장난 아닌데?"
선수석 부스의 유리벽 너머로도 울려온다.
관중들의 열기가 에너지로 변화되어 선수석의 유리벽을 때린다.
단순한 느낌, 감흥에 지나지 않을 텐데도 지금 이 순간 모두가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
한 마음이 되었다.
털썩.
부스 내부에 있는 총 다섯 개의 의자.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준비를 하며 기다린다.
오늘의 첫 번째 대진 상대를.
.
.
.
* * *
북미의 롤챔스.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저 참여하는 팀들이 다르다.
그리고 대회의 근본적인 규모가 다를 뿐이다.
과아아아아아아아!
끓어오르는 경기장의 온도는 내려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만약 여기서 오늘 대회는 온풍기때문에 중지됩니다.
한 마디 한다면 무서운 형님들이 뒷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낼지도 모른다.
이곳 미국에서는 정말 단순한 농담으로 치부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수천을 넘어서 일만이다.
그만한 관중들이 보내는 눈길을 한 몸으로 받아내는 것은 녹록한 일이 아니다.
범인이라면 한 순간에 얼어붙고, 바짓가랑이 사이에 실수를 저질러도 이상하지가 않다.
하지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 롤챔스 윈터시즌의 개막식 무대에 올라있는 한 남자.
그만한 시선들을 한 몸에 받아내는 것이 익숙한 듯하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남자는 무대에 오르는 게 오늘로 처음이다.
그럴 텐데도 더없이 익숙하다.
<2012년의 마지막 축제! 시작해 버린 로드 오브 로드 시즌3의 첫 번째 축제! 드디어 막을 올립니다!>
듣기만 해도 절로 흥이 난다.
준비를 해왔던 노력이 가상하고 애드립이라면 놀라울 지경이다.
현재 개막식을 진행하고 있는 남자는 다름아닌 몬테소리.
이전에 토이치TV에서 Unknown Error의 관전방송을 진행한 남자다.
몬테소리는 그 관전방송 이후로 인지도가 말도 안되게 상승했다.
뛰어나 인재임을 입증받아 스카웃까지 당했다.
바로 로드 오브 로드의 게임사가 주최하는 대회.
이곳 로드 오브 로드 챔피언스 리그의 정식 해설자로서 단박에 발탁받았다.
물론 아직이다.
조금, 아니 상당히 아쉬울 수 있는 소리지만 그를 대신할 사람은 많다.
유쾌한 입담과 높은 성장 가능성을 인정받아 무대에 설 수 있었지만 자리를 잡았다고 보기에는 아직 이르다.
그럼에도, 어째서일까.
<총 열 개의 팀들이 자웅을 가리는 북미 최고의 대회. 아니, 세계 최고의 대회라고 해도 이견이 없습니다. 로드 오브 로드 챔피언스 리그 NA!>
안 그래도 끓어오르던 관중석의 열기.
몬테소리의 혈기 넘치는 진행으로 인해 넘쳐 흐를 지경이 됐다.
지경일 뿐, 혼란이 야기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집중도를 더욱 높여 어느 하나의 관중도 빠트리지 않고 진행될 대회를 기대하게 만든다.
재능이다.
수많은 관중 앞에서 설 재능을 가진 자가 노력 또한 아끼지 않는다.
어지간히 쇠퇴하지 않는 한, 사고치고 스캔들이라도 나지 않는 한 그가 이 자리에서 내려갈 일은 없어보였다
<얼마 전, 롤드컵이 열렸던 경기장. 그 뜨거움이 함께 했던 자리가 다시 들끓습니다. 시작합니다. 지체할 것 있겠습니까?!>
몬테소리는 묻고, 관중은 환호로 대답한다.
바로 옆에서 떠드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 지경인 경기장에서 더욱 더 큰 소리를 내게 한다는 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칫 잘못한다면 일만 관중들의 뜨거움에 먹혀버리고 만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한해.
일만의 관중보다 단 한명의 남자가 존재감이 짙다.
<바로 첫 번째 경기. 선수들을~~ 소개합니다!!>
경기장을 메우고 있는 일만 관중들의 시선은 한 점에 집중된다.
몬테소리가 서있는 무대 위.
그 몬테소리가 가리키는 왼편의 선수석.
선수들이 한 명, 한 명 튀어나와 무대로 향하고 있다.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팀 투르칸! 공격에 공격! 화끈한 경기력을 선보이는 팀입니다. 주장부터가 포스가, 몸집부터 만만치가 않습니다. 솔직히 좀 쫄았는데요?>
몬테소리의 장난스런 한 마디로 시작하는 팀 투르칸.
듬직하길 넘어 부담스러울 수준의 등치를 자랑하는 팀의 주장 쥬나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공격적인 성향이 두드러지는 팀이다.
한 마디로 북미판 마진 공격대.
경기력 또한 뒤지지 않는다.
한국에는 그다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결코 만만한 팀이 아니다.
<그에 맞서는 CLC! 하지만 조금 실망스러울 수 있겠는데요? 현재 핫숏과 트리플리프트를 포함한 멤버 전원이 휴가상태라고 합니다.>
현재 CLC 1군의 멤버들은 룰루랄라.
기나긴 휴가를 만끽하는 와중이다.
소문에 따르면 나름대로 솔로랭크도 돌리고 토이치TV방송도 하면서 기량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지만 어디까지나 유지.
까놓고 말해 놀고 있다.
당연 윈터시즌에도 참가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2군이라 말하면 섭하겠죠! 현CLC의 주축들입니다. 더군다나 문제의 귀인, Unknown Error가 주장으로 있는 현CLC가 지금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몬테소리의 목소리 톤이 한층 높아지는 것은 당연했다.
혜성처럼 나타나 활화산같은 존재감을 과시하던 그 남자.
북미의 로드 오브 로드 팬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Unknown Error다.
지금껏 모습을 드러낸 적이 그가 드디어 얼굴을 보인다.
이곳 로드 오브 로드 챔피언스 리그 윈터시즌 경기자, 일만의 관중 앞에 바로 선다.
구와아아아아아아아!!!!
오늘 최고조로 달아오르는 분위기.
단순히 소리가 시끄러울 뿐만이 아니다.
만약 소리가 없었다쳐도 느낄 수밖에 없는 일만의 시선.
눈깜빡할 시간조차 아쉽다.
<바로 그 Unknown Error에게.. 어?>
몬테소리는 Unknown Error와 인연이 깊다.
그는 모를지언정 몬테소리는 Unknown Error를 알고 있다.
때문에 준비하고 준비했던 한 마디.
터트리려던 몬테소리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얼떨결에 말을 흐리기까지 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역사가 없다.
전례가 없다.
남자들의 세계 프로무대.
이곳에 올라와서는 안될 귀인은 따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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