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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에도 겨울이 찾아왔다
모니터 화면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사춘기가 갓 지난 남자의 음성.
이제 막 소년의 티를 벗은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가볍게 흘러 넘길만한 부류의 것이 아니었다.
<혹시 제가 유럽에서 솔로랭크 1위를 찍고 건너왔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화면에 송출되고 있는 남자는 미역슨이다.
그리고 이 화면을 보고 있는 이 또한 미역슨.
당사자인 미역슨은 모니터 앞에서 어제 있었던 경기의 인터뷰를 되새기며 새삼 후회했다.
"으아..! 난 선전포고같은 느낌일 줄 알았는데.. 아무리 봐도 이건 완전 잘난 척 이잖아.."
"크큭, 네가 너무 민감한 거야. 패기있는 신인은 좋게 봐주는 추세라구? 뭐, 그것도 이겼을 때의 이야기지만."
당돌하게 내뱉은 발언을 후회하는 미역슨을 보며, TSK의 정글러 카인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받아쳤다.
조금 밉보일 수 있는 발언인 것도 맞지만 실력으로 증명하면 되기 때문.
이곳 프로의 세계라는 게 으레 그러하다.
한국 프로 무대엔 과도한 퍼포먼스로 찍힌 선수들이 존재하지만 이곳 북미의 사정은 그렇지가 않다.
한국에서야 너무 톡톡 튀는 이들을 고깝게 보는 경향이 있지만 서양에선 어느 정도 컨셉이라 웃어 넘긴다.
연예인들의 방송이미지와 현실 모습에 괴리감이 있듯 프로들 또한 마찬가지라는 생각이다.
크게 문제가 되는 발언이 아닌 이상 호기스런 모습은 오히려 좋아한다.
그래도 미역슨은 이제 갓 데뷔한 신인.
주위의 평판이 어떠할지 신경이 쓰이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하나의 이유로 기죽어 있기엔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너무 크다.
특히 미역슨 본인에게는 더더욱일 터.
사정을 알고 있는 TSK의 주장 카인트는 아까와 달리 나긋나긋한 어조로 미역슨을 다독였다.
"네가 그렇게나 기다렸던 Unknown Error를 만나는 날이 코앞이라고? 여기서 주저앉으면 될 것도 안돼."
"그렇...겠죠? 이제야 그를 다시 만나게 됐는데."
덴마크에서 태어난 미역슨이 유럽도 아닌 북미에서 데뷔를 결정하게 된 데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다.
가장 큰 이유를 꼽자면 바로 Unknown Error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
이는 미역슨이 했던 인터뷰의 내용과도 관련이 있었다.
유럽 솔로랭크의 1위를 달성한 미역슨은 자기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 북미 서버에도 아이디를 생성했다.
북미 솔로랭크의 전적은 당연 승승장구.
정말 어지간한 판이 아닌 이상 압도적인 캐리력을 선보이며 올라갔다.
그런데 한 번 제지가 걸렸다.
"당시의 저로서는 넘볼 수 없는 신기에 가까운 플레이였어요."
"Unknown Error라.. 아직까지 난 과장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에게는 기억에조차 남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도 그럴 게 그 판은 너무 쉽게 오픈이 났으니까.
자신은 그렇게까지 말리지 않았지만 나머지 팀원들이 완전히 전의를 상실해 게임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Unknown Error를 만날 일은 없었다.
미역슨 입장에선 충격적으로 다가온 한 판이긴 했지만 솔랭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하며 잊으려 했다.
그런데 자신도 종종 이용하던 래딧에서 그의 아이디가 보이기 시작했다.
정말 설마했던 일이다.
"지고 있을 수 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정말 제 딴엔 도박수를 둔 거에요. 카인트도 제가 얼마나 불안해 했는지 기억하죠?"
"그래, 이해한다. 네가 둔 도박수는 훌륭히 성공했으니 이제 당당히 어깨를 펴도 돼."
솔랭에서 만난 유저가 엄청 잘했다.
그 하나 때문이라면 미역슨이 굳이 어린 나이에 글로벌 프로게이머를 지망할 이유는 없었을 터다.
하지만 이 경우는 조금 다르다.
자신을 꺾은 이가 북미에서 프로게이머를 하고 있다.
그런데 그 라이벌팀에서 자신에게 프로제의가 왔다.
소심한 성격과는 별개로 승부욕이 높은 미역슨은 홧김에, 정말 눈 딱 감고 받아들였다.
받아들이고 나서도 몇 번이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너무 생각없이 질러버린 게 아닌가.
하지만 결과가 좋았고, 결과가 좋으니 이제 큰 의미를 두지 않기로 미역슨은 마음을 내려놓았다.
"너도 알겠지만 이 프로판이라는 게 언제 어느 때 확 기울어질지 몰라. 내가 만약 너와 같은 상황이었다 해도 같은 결정을 했을 거라 생각해. 정말 잘 생각했어."
미역슨은 북미에 건너와서 숙소생활을 한지 2개월이 되고 나서야 카인트의 말을 여과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아무리 세상에 때묻지 않은 나이대인 미역슨이라곤 해도 기본적인 의심은 있기 마련이었다.
2군인 TSK에서 활약을 하게 되면 TSL로 승격을 시켜준다는 말.
곧이곧대로 믿기엔 너무나도 달콤한 이야기였다.
자신이 살던 유럽으로 따지면 모스코5에 비견되는 팀이 바로 TSL이었으니까.
그런 팀의 주전, 그것도 미드라이너를 맡게 되다니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는 부류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우리 구단주가 화끈한 편이거든. 인재 등용이라면 물불을 안 가리지. 특히나 너처럼 성장이 기대되는 선수라면 더더욱이고."
여기에 더해 이유가 한 가지 더.
현재 TSL의 미드라이너 맥도날드는 본인이 자진해서 코치로 옮기고 싶어했다.
그런데 현 TSL의 주전 미드라이너만한 인재가 흔하겠는가?
TSL은 안 그래도 혈안이 돼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탐나는 인재가 나왔으니 다른 나라 사람이라고 가릴 이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자신들 팀의 경쟁상대인 CLC가 그 이상의 수를 둬버렸으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나는 너만이 Unknown Error의 대항마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지금 시점에서는 맥도날드가 위겠지만."
아직은 성장 중이다.
미역슨은 촉망받는 인재고, 하루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아직이다.
1군의 주전인 맥도날드를 넘어서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물론 1군으로 승격하기에 부족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솔직히 말해 너에게는 미안할 정도야. 우리 TSK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잖아? 너는 잘 모르겠지만 이건 운이 좋아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거든."
큰고기는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
TSK의 주장인 카인트는 내심 아쉽기도 했지만 미역슨은 2군에서 머물 인재가 아니었다.
솔직하게 발목을 잡고 있다.
8강무대에서 치뤄졌던 독나타스와의 경기도 TSL의 1군멤버였다면 무난하게 2승을 가져갈 수 있었으리라.
그랬다면 자드라는 히든 카드를 선보이지 않아도 됐었다.
"그건 너무 지나친 생각입니다. 챔피언은 물론 중요합니다만, 플레이하는 이가 어떻게 다루는 지가 백 배는 영향이 깊죠. 만약 그 정도의 전략 노출로 제가 멈춰 선다면 그건 제 자신의 한계일 뿐이에요."
주변의 평가를 신경쓰는 이상으로 미역슨은 자기 자신에 대해 엄격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성숙함을 가졌기에, 인생에 있어 크나큰 갈림길이 될 수 있는 TSK의 입단을 결정할 수 있었던 걸 지도 모른다.
그런 미역슨의 대답을 카인트는 마음에 들었다는 듯 기쁘게 받아주었다.
"좋아! 신입인 네가 이처럼 호기로운데 나라고 흐물흐물 있을 수는 없지. 그럼 필살의 전략 한 번 짜볼까?"
"오, 준비된 게 있습니까?"
준결승전 무대에서 TSK는 CLC를 상대하게 된다.
미역슨은 그토록 고대하던 Unknown Error와 맞라인을 서게 된다.
하지만 로드 오브 로드는 5:5의 AOS게임.
단순히 양 팀 에이스의 실력 차이로만 승패가 정해지지 않는다.
다른 팀원들의 수준과 호흡도 중요하겠지만 전략의 준비.
이는 약팀이 강팀을 상대할 때 더더욱이 필요하다.
그리고 솔직히 TSK는 약팀에 속한다.
독나타스를 꺾었던 것도 미역슨의 슈퍼플레이가 연달아 터진 덕분이다.
냉정하게 다시 겨룬다면 꽤나 높은 확률로 TSK가 지고 말 거다.
운이 좋았다는 사실은 경기에서 활약했던 미역슨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더 준비에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결코 후회가 남지 않는 승부가 되도록 상대에게 의외의 결정타를 먹인다.
자신들의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를 선보이고 경기의 결과는 맡긴다.
"바로 너에게 말이야."
"지금의 저라면 Unknown Error에게 밀리지 않을 겁니다."
카인트는 미역슨이야 말로 TSL의 차세대 슈퍼스타로 부족함이 없는 인재라 여기고 있다.
그런 그라면 어떻게 이변을 만들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믿고 싶었다.
그런 미역슨의 발목을 자신들 2군팀이 잡지 않기 위해서라도, 카인트는 자신의 오랜 친구에게 조금 머리를 숙이고자 마음먹었다.
'술값이 어지간히 나가게 생겼구만.'
자신의 오랜 친구 팀 워터의 주장 보보에라라면 무언가 알고 있는 게 있을 터.
한 마리의 매와 같은 날카로운 분석력을 특기로 삼는 친구에게 카인트는 염치 무릅쓰고 조언을 구하기로 했다.
대 CLC전의 컨닝페이퍼가 어디 없을까, 하고 말이다.
얼마나 꿀떡꿀떡 잘 넘어가는 술을 가지고 가냐에 따라 대답의 질이 달라지기도 한다.
지갑의 무게와 맞바꿔서라도 카인트는 돌파구를 얻어내기로 작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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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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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총 열네 개의 팀이 참가하여 그 중 여덟 팀만이 조별 리그를 통과하게 된다.
현재 살아남은 이는 그 반절 뿐이다.
그리고 오늘을 기해 결승전에 올라갈 한 팀이 정해지게 된다.
드디어 치뤄지는 로드 오브 로드 챔피언스 리그 North America 윈터 시즌, 그 준결승 무대.
TSL의 2군, TSK 대 CLC의 승부는 감히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다.
그도 그럴 게 양 팀의 두 에이스가 팽팽하다.
자신의 주력 챔피언 중 하나, 산다라를 잡은 미역슨의 기세가 만만치 않다.
이를 상대하는 CLC의 Error 선수 또한 자신의 주력 챔피언인 탤런을 다루며 분전하고 있다.
탤런은 라인전이 약하다고 할 수 있는 부류의 챔피언.
그럼에도 솔킬을 내주지 않으며 성장을 하고 있지만 여의치 않다.
미드가 아니라 정글의 상황이 많이 고달프다.
<첫블루를 뺏겼던 게 정말 컸습니다. 그 한 번의 실수가 아직까지 아모모의 발목을 붙잡고 있어요.>
<정글 레벨이 두 개나 차이납니다. 한타에 들어가도 궁이나 제대로 쓸 수 있을지 모를 상황이에요. 솔직히 지금 아모모는 막말로 서포터보다 몸이 안됩니다.>
정말 칼같은 타이밍.
노리고 들어갔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엇박자의 카정이다.
아니, 노리고 들어갔따 쳐도 이건 불가능하다.
CLC의 정글러, 프릭의 동선과 습관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는 노련한 플레이였다.
좀처럼 예상하기 힘든 타이밍에 카정을 간 TSK는 퍼스트 블러드를 챙기고 시작했다.
퍼블만이면 다행일까.
이 한 번의 카정으로 인해 점멸이 빠지고 블루까지 뺏긴 아모모는 성장에 크게 차질이 빚어졌다.
여기에 더해 한 가지 더.
고르키와 조아라라는 강력한 압박 조합을 선택한 TSK는 라인스왑을 걸었다.
첫 귀환 후에 자연스레 탑과 라인을 바꿨다.
그로 인해 CLC가 이전 경기에서 보여줬던 루나의 로밍이란 선택지가 봉쇄돼 버렸다.
기동력의 신발이 나오기도 전에 이미 적봇듀오가 탑으로 가버린 게 결정적.
대처가 약간 늦어져버린 CLC는 탑 1차 타워를 내줘야만 했다.
아모모가 점멸이 없는 상태인 데다 레벨도 낮아 탑타워의 수성은 꿈도 꾸지 못했다.
이토록 팀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Unknown Error는 선방했다.
정글러가 한 번 살펴주지 않으면 도저히 풀어나가기 힘든 탤런 대 산다라의 라인전.
스킬포식자를 첫 아이템으로 맞춘 탤런은 꾸역꾸역 성장해 가고 있다.
하지만 Unknown Error의 할아버지가 와도 뒤집기가 힘든 흐름이다.
평소처럼 새까만 양날도끼를 갔다면 크레이브즈와의 연계로 한타의 일발역전을 노려볼 수도 있었을 터지만 그렇지가 않았으니까.
라인전을 버티기 위해 스킬포식자를 가야만 했던 탤런은 만족할 만한 딜을 뿜을 수 없다.
더욱이 TSK의 정글러, 리심에게 청동의 톨라리 펜던트가 나오자 암살을 노리는 것마저 힘들게 됐다.
어떻게 한타라도 잘 해보면 또 좋으련만.
팀의 선봉을 맡아줘야 할 아모모가 포킹 몇 대 두들겨 맞으면 정신을 못 차리니 그러기도 힘들다.
같이 앞라인을 맡고 있는 말화이트마저 라인스왑때문에 제대로 CS를 챙기지 못해 못 미더운 상태다.
몬테소리의 해설은 첫 세트의 요를 꿰고 있었다.
정글러들은 개개인별로 좋아하는 정글 동선이 존재한다.
특히 첫 정글링을 기계처럼 매판 똑같이 도는 솔랭유저들은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물론 프로쯤 되면 이를 신경을 써서 고치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의 습관은 무의식 중에 드러나기 마련.
TSK에서는 프릭 선수의 정글링 습관을 분석해냈고, 이를 통해 카운터 정글을 성공시켰다.
인터뷰를 해봐야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이겠지만 오늘의 준결승전을 위한 TSK의 사전준비는 장난이 아니다.
그렇게 TSK가 무난하게 첫 세트를 굳혀져 나가고 있는 와중에도 관중석의 분위기는 달아오른다.
5전 3선승제로 진행되는 오늘의 준결승전은 아직 많이도 남아있다.
기대가 되는 노릇이다.
CLC의 그 살짝 무서운 누님.
myummyum과 교대한다면 게임의 흐름이 과연 어떻게 바뀔까.
그리고 TSK는 또 어떤 카드를 준비해왔을까.
TSK가 선빵을 날리긴 했지만 CLC 또한 분명히 비장의 카드들이 있을 것이다.
래딧에서도 열띤 토론이 오가는 가운데, 첫 세트의 승패를 결정짓게 될 마지막 한타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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