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
로스앤젤레스에도 겨울이 찾아왔다
TSK와의 준결승전 결과는 우리 CLC의 승리로 확실히 정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선수들의 할 일이 끝난 건 아니다.
특히 나와 예은은 따로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오늘 경기의 MVP로 인터뷰를 해야 한다.
"인터뷰라.. 너 할 말은 정해뒀냐?"
무언가가 탐탁치 않은듯 예은이 심드렁한 표정을 한 채 의자에 기대있다.
은근히 내숭이 쩌는 녀석인만큼 인터뷰가 시작한 후에도 저러진 않을 테지만.
문제가 있다면 폭탄발언을 내뱉지 않을까 하는 것.
걱정이 돼서라도 확인하지 않으면 좌불안석이다.
"있지.. 있어. 아주 많이 있지.."
"제발 부탁한다. 욕설만은 하지 말아줘…."
엄지 손톱을 으득 씹는 걸 보아하니 담아둔 것이 꽤나 있는 듯하다.
쓸데없이 도화선을 건드리기 보단 부디 덜 터지기를 바라는 것이 최선일 지도.
대충 짐작은 가니 앞서 인터뷰를 진행하는 내가 조금 풀어놓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그렇게 기다리기를 수분.
이윽고 인터뷰를 진행하는 여성 아나운서가 도착했다.
예은 또한 어느새 다른 사람이 되어 다소곳 앉아있었다.
"두 번의 MVP를 거머쥔 CLC의 Error선수를 만나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Error선수. 아니, Unknown Error라 하는 편이 나을까요?"
"편하신 쪽으로 부르셔도 괜찮습니다."
첫 번째로 인터뷰를 진행하게 된 나는 쪼금 긴장한 상태다.
그냥 몇 마디 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어렵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상당히 까다롭다.
대답을 미리 준비해두지 않으면 인터뷰에서 벙쪄버리는 바보같은 모습이 화면에 송출될 수도 있다.
"와, Error선수와는 정말 자주 만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만큼이나 CLC를 승리로 이끄셨다는 뜻이기도 하죠. 혹시 새로운 CLC의 에이스로서 팀을 승리로 이끄는 비결, 시청자분들도 듣고 싶어 할 것 같은데 한 말씀 해주실래요?"
"별다른 거 있겠습니까? 이게 다 제가 잘난 덕분.. 이 아니라 다른 팀원들이 제가 캐리할 환경을 보조해준 덕분입니다. 뭐, 결론적으로 제 캐리가 맞지만요."
조별 리그부터 반수 이상의 경기에서 MVP를 받았던 것은 나다.
그만큼이나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이게 의외로 그렇지가 않다.
매번 똑같은 인터뷰를 하지 않기 위해 대답을 준비하는 것만 해도 수고가 장난이 아니다.
그래도 이제는 제법 넉살스럽게 받아치는 방법을 배우게 됐다.
"날이 갈수록 능글맞아지는 Error선수네요. 그럼 짧게 요점만 여쭙겠습니다. 산다라와 자드, 미역슨 선수의 주력 챔프들은 미리 연습을 해오신 건가요?"
"연습도 했습니다만 본래부터 다루기도 햇습니다. 특히 자드는 출시됐을 때부터 주목을 하고 있었죠. 그런데 첫 롤챔스 신고식을 미역슨 선수에게 뺏겨버렸어요."
어떻게 잘못 해석하면 능욕이 될 수 있다.
나는 준비해둔 답안을 따박따박 읊었다.
아나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는 분위기.
그 외에 몇 가지의 질문이 오간 후에 내 인터뷰 시간은 끝이 났다.
바야흐로 시한폭탄, 예은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Error 선수의 캐리를 내조해주는 일등 공신이자, 뭇 남성들의 마음을 설레이게 만드는 아리따운 외모의 소유자인 MyumMyum선수 만나보겠습니다. 그런데 왜 뮴뮴인지 저만 궁금한가요?"
"걍 만화책 보다가 대충 지었어요."
아나운서의 물음에 예은이 무뚝뚝한 어조로 대꾸한다.
경기장의 분위기가 싸늘히 식어버리는 건 아닐까.
만약 내가 저리 했다면 아나운서가 난색을 표했으리라.
하지만 같은 잘못을 해도 잘생긴 사람은 용서받는다고.
현대사회에서 이 외모지상주의란 건 정말 먹히지 않는 구석이 없다.
위트있는 답변이라며 웃어넘기는 아나운서.
인터뷰를 계속해서 진행한다.
"좋아하는 만화의 캐릭터 같은 거군요? 저도 인터뷰 끝나고 꼭 검색해봐야겠어요. 분명 귀여운 캐릭터겠죠?"
"예예, 귀엽죠. 참 귀엽죠. 언니도 보시면 되게 좋아할 거에요."
내가 미친 건지 아니면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건지.
관중석에서 휘파람까지 불어오는 경기장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하다.
나도 저렇게 인생 편하게 살고 싶어라.
"깜찍한 외모와는 다르게 남성적인 챔프들을 주로 다루는 뮴뮴 선수, Error 선수와의 호흡이 장난이 아닌데요. 혹시 인터넷에서 떠도는 소문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인터넷 어디요? 래딧? 저 욕하는 글이라면 봤는데 다른 것도 있나요?"
깜찍한 아가씨의 입에서 끔찍한 답변이 튀어나온다.
그런데 아나운서는 이조차 위트있는 답변이란다.
그냥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 치고 예은이 사건을 터트리지 않기를 나는 옆에서 묵묵히 빌고 있다.
"그 소문이라 함이 그렇고 그런 부류인데 호호, 이번에 CLC에 Error 선수와 함께 영입되셨잖아요?"
"걔랑 왔죠. 근데 왜요?"
왠지 진행되는 인터뷰 내용이 불안해지는 건 나뿐인 걸까.
예은이 하도 가볍게 대꾸하다 보니 아나운서조차 물들어버렸다.
인터뷰가 아니라 담소가 돼버린 대화의 흐름은 예측조차 되지 않는다.
"특별하게 절친한 관계라 유추하는 시선이 많은데. 혹시 두 분이 사귄다거나 팀내에 스캔들같은 게 있진 않나요?"
"......"
예은의 표정이 울그락 굳는다.
설마 저쪽에서 예은의 도화선에 불을 붙일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나는 예은이 터지기 전에 마이크를 빼앗아 쥐고 말을 받아쳤다.
이래서야 당연 안되겠지만 상황이 상황이고 인터뷰 내용이 너무 극단적이다.
"그냥 친구에요 친구. 게임 잘하는 녀석 만나보니 여자더라고요. 딱히 별다른 건 없습니다."
한 마디한 나는 다시 예은의 손에 마이크를 쥐어줬다.
그런데 어째선지 굳었던 얼굴이 더 심화돼 있다.
지금껏 위트있는 답변이라 웃어 넘겼던 아나운서조차 예은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이제서야 부랴부랴 진지한 진지한 질문으로 넘어가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아나운서의 입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예은이 사고를 터트렸다.
"인터넷에서 저 까대는 놈.. 아니 분들. 귀 씻고 잘 들어..요?"
일났다.
마음같아선 마이크를 강제로 잡아 뺏고 싶지만 난 할만큼 했고 이제는 모르겠다.
터트린 건 아나운서도 뒤처리도 알아서 대처해주길 바란다.
성난 예은이 말을 이었다.
"여자인 게 뭐 어때서? 내가 못했냐? 이 자식 뒤치다꺼리하는 게 웬만한 실력으로 될 거 같아? 난 내 실력 꿇린다고 생각 안 하니까 깔 거면 못할 때 까!.. 세요."
할 말 못할 말 다 내뱉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
아니, 애초에 예정된 사고였을 지도 모른다.
부디 징계가 아닌 경고 차원에서 끝나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데 이게 또 내 생각과는 달랐다.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
"로드 오브 로드를 플레이하는 여성 유저라면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말. 정말 멋졌습니다 뮴뮴선수. 제가 남자였으면 고백했을 것 같아요!"
인터뷰가 중지될 거라 여겼던 것도 잠깐.
예은의 말에 크게 긍정을 해대는 아나운서를 신호로 관중석 또한 환호한다.
나는 생각을 포기했다.
그렇게 인터뷰가 훈훈하게 마무리되어지는 찰나, 아직 못다 한 말이 있었던듯 예은이 마이크에서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이 자식은 그냥 내.. 따까리같은 거니까.. 그러니까…. 친구라고 친구 쪼금 친한."
이미 생각을 포기한 나에겐 아무것도 들리지 않지만 경기장이 시끄러워졌다는 것은 느낄 수 있다.
내 살다살다 이런 파격적인 인터뷰를 하게 될 날이 올 줄이야.
커뮤니티에 어떤 반응이 올라올지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애석하게도 시간은 흘렀고 내가 반론할 기회도 없이 준결승전의 인터뷰는 그렇게 종료되었다.
.
.
.
* * *
준결승전의 뒤풀이 자리는 조금 특별했다.
인터뷰에서 그렇게나 하고 싶은 말 다 내뱉어 놓고도 기분이 풀리지가 않은 예은을 위해 모두가 맞춰줬다.
팀에 한국 사람이 세 명이나 있다는 것도 이유겠지만.
"초코미? 이거 매운 거 아니야? 한국 사람들 엄청 맵게 먹던데."
"초코미가 아니라 쭈꾸미. 덜 맵게 해달라고 하긴 했는데 프릭 넌 어린애 입맛이라 못 먹을 수 있겠다."
매운 정도도 정도지만 도착한 음식의 반응이 새삼 놀랍다.
외국 사람들은 문어 종류를 안 먹는다고 했던가.
그래도 스시정도는 먹어봤는지 괜찮다고 했지만 정작 와서 쭈꾸미를 보니 또 이야기가 다르다.
"한국사람들은 문어를 많이 먹어..? 그리고 쭈꾸미는 또 뭐야?"
"그냥 문어의 한 종류라고 생각하고. 일단 잡숴봐."
토종 한국사람들은 흐물흐물 기어다니는 걸 생으로 잘도 삼켜대지만, 처음 먹어보는 입장이라면 꺼려질 수 있는 노릇이다.
이 문어라는 게 참 맛깔나기는 해도 외향적으로 조금 징그럽기도 하니까.
그렇기에 백문이 불여일견.
나는 쌈을 싸서 프릭의 입에 넣어줬다.
이렇게 먹으면 매운맛도 덜어지거니와 당장 눈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이렇게 샐러드에 싸서 먹는 거야? 흥미로운데.."
"일단 닥치고 입에 넣어라. 팔 떨어지겠다."
살다 보니 남자 입에 쌈을 싸서 넣어주는 날도 있구나.
그래도 잘 먹어주는 것을 보니 보람이 있다.
반응도 꽤 재밌고 말이다.
약간 질긴 스테이크? 아니, 새우? 근데 매워!"
"당연하지. 한국음식이니까."
외국 사람한테 매운 한국음식을 권하면 반응이 보통 두 가지다.
하나는 씻어서 먹거나.
다른 하나는 맵다맵다 하면서도 꾸역꾸역 먹거나.
프릭의 경우 후자였다.
"어, 리는 잘 먹네?"
"사천 쪽 음식은 이것보다 더 매운 것도 흔하니까."
미국에서 나고 자랐다고 들었던 데이비드 리지만 가치관은 중국인에 가깝다.
중국 프로팀의 코치를 준비했던 나는 중국인들과 접점을 가지는 경우가 많았고 그 덕에 리와 친해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간혹 자신들의 나라에 대해 조금 심하게 자부심을 가지는 중국인들은 난감한 경우가 있는데, 리는 그렇지 않은 편이라 다행이다.
가치관이 어떻든 간에 미국사람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노릇이겠지만.
"오길 잘했는데? 결승전 끝나면 다른 한국 레스토랑도 가보는 게 어때?"
"난 그 불고기하는 레스토랑 가고 싶어. 예전에 호기심이 생겨서 한 번 가봤는데 맛있더라고."
라이로도 헤일커드도 반응이 좋다.
내 메뉴 선택 능력이 찬사를 받고 있다.
하지만 이 메뉴를 선택하게 된 가장 큰 이유.
예은은 아직도 떨떠름한 어조로 혼자 깨작깨작 접시를 비우고 있었다.
"평소처럼 먹어. 니 잘 먹는 거 다들 아는데 왜 이제 와서 뭘 이미지 관리하냐."
"...그냥 입맛이 없어서."
내가 방금 헛것을 들었나.
꿈에서도 상상할 수 없던 부류의 대답이 들려왔다.
이 밥순이가 입맛이 없다니?
그것도 네가 그렇게나 좋아하는 포장마차류의 음식을 눈앞에 있는데.
이건 보통 큰일이 아니다.
신속하게 해결책을 강구해야 한다.
"자, 내숭떨지 말고 입 크게 벌려봐."
"야, 잠깐. 그렇게 큰 건.."
상추에 깻잎을 올려서 쭈꾸미 두 점, 마늘, 양파, 뜨신 밥 반 스푼, 쌈장까지 말아 크게 한 쌈 싸주니 얼굴을 붉히면서도 잘만 받아 먹는다.
어지간한 성인 남성도 입에 넣기 힘들어 할 크기의 쌈을 먹으면서 입맛이 없기는 개뿔이.
밥순이가 이제 와서 이미지 개선하려 해봤자 한참은 늦었다.
그렇게 두 볼 가득히 쌈을 씹고 있는 예은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자 프릭이 의아하다는 어조로 나에게 질문을 던져왔다.
"그래서 둘은 정말로 안 사겨? 아니면 혹시 전에 사겼다거나?"
"그건 뭔 또 뜬구름 잡는 소리야. 인터뷰 때문이면 신경 꺼. 다 알고 있으면서 왜 그래."
이걸로 대답이 됐다고 생각했지만 프릭은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따져 댔다.
그것도 내가 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그럼 반대로 묻겠는데 너희 둘은 왜 안 사귀냐? 서로 잘 맞는 거 같은데."
"그러게 걍 둘이 사겨라 좀. 사귀는 게 뭐 별 것도 아니고. 참고로 CLC는 사내연애에 대해 딱히 제재 없다? 게이라면 조금 곤란하겠지만."
프릭에 이어 라이로까지 영문 모를 소리를 읊어온다.
미국사람에게 한국산 소주가 들어가다 보니 고장이 나버린 건가.
이 녀석들 술 취한 건 그렇다 치고 예은의 반응이 걱정이다.
'휴, 입맛이 돌아왔나 보네.'
그렇게 프릭과 라이로가 나에게 헛소리를 떠들어 대고 있는 사이.
예은은 정상으로 돌아온 예은이 평소의 식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혹시 얘가 회까닥해서 밥상 뒤엎으면 어떡할까 걱정이 됐는데 차근차근 해명을 해도 될 것 같다.
그 전에 이 복스럽게 잘 먹는 녀석을 위해 음식을 추가해줘야겠지만.
"아줌마, 여기 쭈꾸미 2인분 추가해주세요."
"......2인분 말고 4인분 넣어줘요."
입에 쌈을 우겨 넣던 예은이 못마땅하다는 말투로 주문을 수정한다.
이미 시켜 놓은 게 있는데 그렇게 생각없이 추가하면 남아버린다.
나는 어이가 없어 주문을 고치려 했지만 예은은 막무가내였다.
"야야, 진정해. 그렇게 많이 시키면 누가 다 먹으라고?"
"내가 다 쳐먹을 거니까 넌 신경 꺼 둔탱아."
그렇게 결국 쭈꾸미 4인분이 추가로 도착했지만 한 점도 남지 않았다.
남기는 커녕 밥까지 볶아먹는 예은의 식탐은 오늘따라 더욱 귀기가 들린 듯했다.
============================ 작품 후기 ============================
추천 버튼이 바꼈음에도.. 잊지 않고 눌러 주시는 추천 정말 고맙습니다.
독자님들이 주시는 쿠폰 덕에 힘내서 연재를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한 해가 밝았습니다.
신년에는 지난해의 부족한 부분 털어내고 재밌는 작품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연참도 간간히 꼭 해보겠습니다ㅎㅎ
부족한 작품 재밌게 봐주시는 독자님들 항상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