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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에도 겨울이 찾아왔다
어젯밤 회식 자리에서 폭식을 해댔던 예은.
쭈꾸미를 그렇게 먹고도 무언가 부족한지 2차에 가잔다.
그렇게 바에서 아주 꽐라가 될 때까지 퍼마셨다.
술값은 둘째 치고 왜 필름이 꺼질 때까지 마셔대는 건지 걱정이 될 수밖에.
그런데 정작 본인이 입을 다물고 있으닌 속내를 물어보기 껄끄로웠다.
술이 깨고 제정신을 차렸을 때 물어보고자 마음에 담아두기만 했다.
그리고 다음날.
나는 정오까지 곯아 떨어져 있던 예은을 깨워 근처의 해장국 집에 데리고 갔다.
예은은 부스스한 머리로 숙취의 고통을 새기며 해장국을 한 사발 말아 먹었다.
다 먹을 때까지 한 마디도 안 하던 예은은 후식 겸 갔던 카페 안에서 갑자기 입이 트였다.
속사포처럼 쏟아내고 있었다.
"알겠어?"
"알겠..다니까."
"뭘 알겠다는 건데?"
남녀사이, 특히 애인간에 잘잘못을 따질 때 절대 끝나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지는 질문 공세.
설마 예은과 주고 받게 될 지는 상상도 못했다.
이야기의 흐름이 답없는 정도까진 아니지만 심히 불편한 자리다.
"네가 평소에 많이 신경 써주고 있다는 거 다 알지. 설마 모르겠어? 이쯤..하자?"
"내가 너한테 어떤 부분을, 어떻게 신경 써줬는데?"
멜론 아포가토의 가장자리를 티스푼으로 짓뭉갠 예은이 나를 노리듯 쳐다본다.
이를 상대하고 있는 내 심정은 당연 편하지 않다.
확 테이블을 엎고 나올까?
이마에 핏줄이 빠직 서는 게 화가 나지만 참아야만 한다.
어제 인터뷰도 그렇고 그 후의 반응도 그렇고.
무언가 심히 언짢아 보이는 데다 이 녀석도 일단은 여자다.
여자들은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속이 많이 풀린다더라.
모르지 않기에 끓는 속을 참으면 대꾸해준다.
"내 플레이에 잘 맞춰서 해주고, 랭겜에서 절대 안 하는 탱커도 팀원들을 위해서 잘 해주고 있고….
"됐다, 말을 말자."
욕지거리가 올라올 뻔했다.
말을 말 거면 묻지를 말던가.
사람을 장문으로 해명하게 해두고 반응하는 꼬라지가 저거라니.
참을 인 자 셋이면 살인도 피한다는 속담이 격하게 떠오른다.
"..니가 그럼 그렇지."
"내가 뭐 어때서?"
결국 뭐 때문에 화가 난 건진 알 수 없었지만 이 상황을 넘긴 것을 위안으로 삼자.
그렇게 생각하며 내가 시킨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넘겼다.
그 시원함 덕분일까, 막혔던 속이 풀리면서 하나 떠오르는 게 있다.
준결승전을 진행하는 중간중간 경기 끝난 후에 꼭 한 마디 해주고자 마음먹은 내용.
어쩌면 이것으로 한 방 되돌려 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너.. 내가 이니시 걸고 죽으면 앞뒤 안 가리고 돌진하더라? 왜 그랬어?"
"그, 그거?"
아까까지 나를 잘만 몰아붙이던 예은이 커피잔만 휘휘 내젓고 있다.
그거 아포가토라서 그렇게 저으면 안될 텐데.
뺨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것이 곤욕스러운 모양이다.
대꾸 할 말이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나는 예은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서둘러 결정타를 박아넣었다.
"이니시도 좋은데 상황봐서 원딜 지켜야지. 바늘갑옷 두른 네네톤이 원딜물고 그러면 답이 없다고?"
"..답이 없는 건 니 색히겠지."
순간 예은이 들고 있던 티스푼이 살짝 휘어버린 장면을 나는 똑똑히 보았다.
금속제인 데다 두터워서 성인 남성이 안간힘을 주지 않는 한 불가능할 수저가.
역시 손힘이 장난아니게 매서운 녀석이다.
이 이상 쪼아대면 안되겠다는 예감.
나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나도 잘못한 거 있지 당연히. 근데 조금 더 잘해보자 하는 의미로 말한 거야 하하."
"흥, 너한테 뭘 기대했겠니."
어떻게 곱게 말하는 법을 모르는 녀석이다.
말 끝마다 사람 혈압을 오르게 만드는데 재주가 있다.
이런 녀석이라도 친구는 친구.
그것도 앞으로도 오래도록 면상 마주 볼 사이다.
'참 신도 불공평하지.'
이런 성격 어긋난 녀석이 얼굴만은 빼어나니까.
인터뷰에서도 막말을 내뱉었는데 관중석의 반응은 좋기만 하더라.
치트키를 치고 사는 듯한 이 녀석을 보면 가끔 질투심이 일기도 한다.
오늘따라 한층 더 성가신 예은의 투정질.
고개를 내저은 나는 속으로나마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한 번은 져준다.
그렇게 옳다 옳다 떠받들어주며 숙소로 돌아가는 길.
아직까지도 뾰루퉁한 표정의 예은이 던지듯 내뱉어온다.
굳이 물어야 할까 싶은 이해가 가지 않는 한 마디를.
"그래서 난 너한테 친구냐?"
"당연히 친구 맞지. 솔직히 나만큼 네 성깔 받아주는 사람 또 없다?"
구구절절 옳은 소리다.
까놓고 말해 이 녀석이 아무리 예쁘고 게임을 잘 해도 성격이 이 모양인데.
오래도록 친구 관계 유지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솔직히 나도 어쩌다가 이 녀석이랑 코드가 맞게 된 건지 종종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 녀석은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 녀석이다.
어떤 농구팀의 감독님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포기하면 편하다.
그리고 그런 부분도 포함해서 난 예은을 좋아한다.
'친구로서 말이야.'
친구로서, 어디까지나 친구로서 하는 말이다.
그 이상의 관계.
적어도 지금의 나는 생각할 시기가 아니다.
.
.
.
* * *
TSL, 그리고 CLOCK9이 치르는 준결승전 B조의 경기.
이틀 전 치뤄졌던 A조의 경기는 당연 화제를 몰고 왔지만 오늘의 경기 또한 뒤쳐지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게 양 팀 모두 두터운 팬층을 보유한 강팀이다.
관중석은 이미 입석까지 매진 상태다.
과아아아아아아!
TSL의 선수들이 무대에 입장하자 팬들이 질러오는 함성.
경기장이 떠나가라 울리는 공기의 진동은 가히 압권이다.
그를 상대하는 CLOCK9의 팬들이라고 만만하기만 할까.
반대 편에서 무대에 오르는 CLOCK9의 선수들을 환영하는 함성은 TSL에 뒤지지 않는다.
<과거로 오늘을 평가하면 곤란하다. CLOCK9의 선수들이 등장합니다!>
CLOCK9이 TSL보다 상대적으로 약팀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팬들의 열성과 비례한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CLOCK9 또한 북미 굴지의 강팀이기도 하거니와 팀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미터스 선수 덕분.
그의 하드캐리력을 매료된 팬들은 경기장의 관람료를 아끼지 않는다.
항상 손에 땀을 쥐는 경기를 선보이는 미터스 선수이기에 개인의 힘으로 이만한 환호를 낳을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양 팀의 신경전.
팬들간의 불꽃 튀는 기세싸움이 끝난 후 경기는 시작된다.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있어서 일까.
첫 번째 세트는 초반부터 볼 거리가 많다.
인베싸움이 치열하다.
<풀리츠크랭커하면 역시 인베죠! 상대의 허를 제대로 찔러 성과를 만들어냅니다!>
CLOCK9에서 주도적으로 인베를 시도했다.
인베는 미니언이 젠되기 전 1레벨에 견제를 가는 행위.
스킬이 하나밖에 없는만큼 킬로 연결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 풀리크츠랭커만은 예외다.
풀리츠크랭커는 그랩으로 시작해 그랩으로 끝을 보는 챔피언.
1레벨에 찍는 그랩 하나로도 충분히 킬각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쉬운 일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지만 운만 따라준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조금은 뽀록이라고도 볼 수 있는 예측그랩이 터져 CLOCK9는 퍼스트 블러드를 챙길 수 있었다.
그것도 미터스의 리심에게 킬까지 양보했다.
<첫 세트는 TSL이 고전을 면치 못할 것 같습니다. 퍼블을 먹었을 때 가장 무서운 선수, 꼽자면 바로 미터스 선수가 아니겠습니까?>
<롱스워드가 하나 더 나왔습니다. 이러면 리심은 라이너보다 강력해요. 만나면 뼈도 못 추립니다.>
심지어 미터스가 잡은 챔피언은 다름아닌 리심이다.
리심은 스노우볼 잘 굴리기로 악명이 높다.
굳이 중계진이 아니더라도 첫 번째 세트를 CLOCK9가 챙겨갈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상한다.
경기의 흐름 또한 미터스 선수는 킬값을 제대로 하며 굳혀나가고 있다.
<아! 저게 원래 안 죽는 피인데.. 공격력 10차이가 이렇게 스노우볼을 굴려버리네요. 리심이 벌써 2킬입니다 2킬.>
하지만 TSL이다.
그 한 마디는 불안에 떨어야 할 TSL의 팬들에게 안정감을 가져다 준다.
TSL이라면 불리한 상황에서도 탈출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믿음은 헛되지 않았다.
<역시 TSL입니다. 이 이상은 허용할 수 없다 이거죠.>
몬테소리가 말하는 승부수란 당연히 용이다.
오브젝트를 챙겨 글로벌 골드의 격차를 벌리는 것이야 말로 가장 확실한 승리조건이 아니겠는가.
CLOCK9은 자신들의 이점을 살려서 승기를 점해야 한다.
일이 꼭 잘 풀리라는 보장은 없겠지만.
<원딜이 너무 허무하게 죽었어요! 나무카이에게 점멸 일그러진 전진각을 줬던 게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용만 챙기고 달아나는 게 최선입니다. 여기서 전멸이라도 한다면 따라잡히긴 커녕 게임이 터질 수도 있어요!>
CLOCK9이 무난하게 용을 챙겨가는 분위기였는데 실수가 나왔다.
조금 돌출된 상태로 포킹을 하던 CLOCK9의 원딜러.
이즈레알이 나무카이의 점멸 일그러진 전진에 속박 당해버렸다.
굳이 포킹까지 하지 않아도 용을 먹고 빠질 수 있었을 텐데 조금은 아쉬운 판단.
원딜러의 실수기도 하거니와 TSL의 정글러, 오드아이의 대비가 날카로웠다.
상대가 용을 시도할 걸 예상하고 미리 깔아놓았던 두 개의 와드 또한 빛을 발했다.
하나는 지워졌지만 다른 하나의 와드가 떡하니 CLOCK9의 진영을 밝히고 있었으니까.
그로 인해 시도할 수 있었던 과감하고 날카로운 점멸 이니시였다.
<도미노처럼 와르르르 무너집니다. 그냥 깔끔하게 빼는 게 나았는데 말이죠.>
<어설픈 반격은 있으니만 못합니다. 이대로 제임스까지 죽으면 3킬을 내주게 됩니다. 아, 그런데!>
와드방로로 벽을 넘어 도망가려는 척 대기하고 있던 리심이 혼잡한 순간을 노려 기회를 만들었다.
와드방로를 오히려 돌진기로 활용해 TSL의 원딜러를 가격했다.
이~ 쿠우!
코앞에서 음파를 맞히고 궁극기로 까내는 당구.
상대의 반격 시기를 늦춤과 동시에 발차기로 원딜러를 따라간다.
도마뱀 장군의 혼령과 미개한 방망이를 든 리심은 원딜러 한 명 원콤내 버리기 충분했다.
그렇게 킬을 따낸 리심은 점멸을 사용해 벽을 넘어 유유히 살아 도망간다.
<3대3 동점입니다! CLOCK9이 용을 챙겼기 때문에 손해는 아니에요!>
<그래도 이제 글로벌 골드 차이가 크지 않습니다. 라인전에서 TSL선수들이 CS를 조금 더 잘 챙겼거든요.>
원맨팀이라 불리우는 CLOCK9.
그 한계점이 여실히 드러난 첫 세트였다.
미터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그 이상을 훌륭히 해냈지만 라인전에서부터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다.
굳이 킬을 내지 않더라도 CS차이.
선수들 개개인의 기본 역량에서 TSL은 CLOCK9을 압도했다.
결국 첫 세트는 수차례의 팽팽한 싸움 끝에 마지막 바론 한타에서 승부가 결정지어졌다.
<아무리 날고 기는 미터스라 한들 챔피언이 챔피언입니다. 더 이상 혼자서 지탱할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에요.>
<지금까지 잘 끌고 왔는데 말이죠. 유통기한 앞에선 미터스 선수라도 수가 없습니다.>
퍼블이라는 기분 좋은 스타트를 끊었음에도 CLOCK9은 TSL을 상대로 경기를 내주게 되었다.
미터스의 분전이 돋보였지만 TSL은 하나하나가 정예.
그들이 만들어내는 두터운 성벽을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더욱이 두 번째 세트부터 TSL은 방심을 하지 않았다.
풀리츠크랭커에게 허무하게 끌려준다던지 그런 허접한 실수를 두 번 허용할 팀이 아니다.
TSL은 자신들이 어째서 북미 2대 강호라 불리우는지 확실하게 증명해냈다.
세 번째 세트는 더욱 심각했다.
CLOCK9이 퍼블을 먹고 시작해도 부족한 마당에 역으로 따였다.
미터스 또한 슬슬 멘탈이 나갔는지 갱킹의 날카로움이 무뎌졌다.
그럼에도 마지막 세트.
최후의 최후까지 분전했지만 넘어가버린 승기를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TSL이 3대 0으로 결승전의 진출을 확정지었다.
<예, 바로 그 Unknown Error가 주장으로 있는 새로운 CLC입니다. 지금까지 승승장구 올라온 CLC지만 TSL만은 이제까지와는 달라요.>
이제는 2군이란 말이 무색해진 새로운 CLC다.
Unknown Error를 필두로 한 그들의 실력은 이미 입증이 되었지만 상대가 하필이면 TSL.
CLC 1군과 함께 북미 2대 강호라 칭해지는 TSL은 지금까지 CLC가 상대해왔던 팀들과는 격이 다르다.
놀라운 성장세를 자랑하는 CLC라지만 TSL을 상대로는 아직 부족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Unknown Error라는 두 단어는 팬들로 하여금 이변을 기대하게 만든다.
새로운 시즌의 첫 번째 대회.
로드 오브 로드 챔피언스 리그 North America 윈터 시즌, 그 마지막 결승전.
승리의 여신이 과연 어느 팀에게 미소를 보낼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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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님들이 주시는 쿠폰 덕에 힘내서 연재를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재밌게 봐주시는 독자님들 항상 감사합니다.
예은과 주인공의 사이에는 조만간 긍정적인 변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결승전 이후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