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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는 멈추지 않는다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처음으로 떠오른 생각.
과연 꿈인가 생시인가 하는 것이었다.
혹시 이 모든 것이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은 것은 아닐까.
눈을 뜨고 천장을 본 후에야 확신할 수 있었다.
'생시.. 맞구나..'
틀림없는 CLC 숙소의 내 개인실이다.
천장의 문양이 이가 틀림없다는 사실을 증명해낸다.
내가 해냈음에도 믿기지가 않는다.
북미의 롤챔스에서 우승을 따냈다는 사실은 단박에 와 닿기 힘든 업적이다.
'하하, 솔직히 7전 4선승제는 너무했어.'
여섯 시간 동안 생으로 경기를 치른 여파는 대단했다.
결승전이 끝나고 밴에 타자마자 노곤노곤 잠에 들었을 정도다.
다른 팀원들도 당연 힘들었겠지만 나는 전체적으로 신경 쓸 게 많았으니까.
정말 필름이 끊긴 것처럼 눈을 감고, 다시 떠보니 침대에 있다.
그것으로 밖에 설명이 안되는 상황이다.
'그래도 이겼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양 팀이 팽팽하다 보니 마지막 블라인드 픽까지 가버렸다.
결국 최후의 승자는 우리 CLC, 그리고 나지만 상대 TSL도 과연 만만치 않았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한 판, 한 판이 곤욕이었다.
만약 내 자드의 숙련도가 조금이라도 부족했다면.
컨디션이 조금이라도 안 좋았다면.
상대가 자드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분석할 시간이 있었다면 우승이란 결과를 낳지 못했을 수 있다.
그만큼이나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뿌연 안개 속과도 같은 치열한 승부의 세계였다.
하지만 결과는 모든 것을 증명한다.
"해냈다아..!"
육성으로 터져 나온다.
내 방에서 나 혼자 지껄이는데 눈치 볼 일이 뭐가 있겠냐만은.
혼잣말을 한 게 괜시리 멋쩍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축하 파티도 없이 그냥 자버린 셈인가.'
롤챔스의 우승을 이뤘음에도 해야 할 일은 아직 산처럼 쌓였다.
그렇지만 오늘 하루 정도야 놀아주는 게 인지상정.
가벼운 마음으로 침대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나는 몸이 무겁다는 것을 느꼈다.
어찌된 영문인지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설마.. 가위눌렸나?'
방 안은 반쯤 환하다.
벌써 해가 중천에 떴는지, 반투명한 커튼 너머로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이렇게 밝은 방에서 눌리는 가위라니.
듣도 보도 못한 상황이지만 없으리란 법은 또 없다.
일단 귀신이 어딨나부터 파악하기로 하자.
'...여깄었구나.'
몸이 들리지 않았던 이유는 왼팔이 부자유스럽기 때문이었다.
둥그스름한 물체가 내 왼팔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 물체라 함은 다름아닌 사람의 머리.
내 팔을 베개처럼 베고 누은 예은이 세상 모르고 쿨쿨 잠에 빠져 있다.
'귀신처럼 들러붙어 있었구만.'
어째서 이 녀석이 내 방 침대에서 자고 있는 걸까.
조금 장난스레 과장하자면 원나잇이라도 한듯한 상황이다.
영문을 모르겠지만 이성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분석한다.
일단 여기는 CLC 숙소의 내 개인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닐 터다.
예은이 방을 착각해서 들어왔다 거나 하는 수준의 해프닝이겠지, 라고 생각하는 게 타당한 결론이다.
'팔을 거둬버리면.. 깨겠지?'
어제 결승전에서 피곤에 쪄들었던 건 나 뿐만이 아니다.
예은도 체력적으로 꽤나 한계가 온 상태였다.
그러니만큼 있을 수 있는 실수지만 아무리 그래도 말이지.
'왜 여기서 자고 있냐고..'
그 부분만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
분명 내가 모르는 뒷사정이 있어 보인다.
어쩌면 허구헌날 둘이 안 사귀냐고 짖어대는 팀원 놈들이 장난을 쳐버린 걸지도.
만약 그렇다면 필히 복수를 해줘야 하는 일이겠지만 그 전에.
'이 상황을 어떻게 넘겨야 할 텐데.'
내 팔을 벤 채 세상 모르고 곤히 자고 있는 예은.
이 녀석이 일어나면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까.
모른다는 변명이 과연 통할까.
아무리 고민 해도 해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어차피 마셔야 할 벌주라면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래 봬도 외모만은 썩 괜찮다고 할 수 있는 예은이다.
입과 눈을 닫고 가만히 자고 있으니 반반한 얼굴이 더욱 강조된다.
천사까지는 아니겠지만 뽀얀 피부가 인형같이도 보인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치유되는 산뜻함.
평소 행실을 생각한다면 병주고 약주는 듯한 기분이다.
'뭐랄까.. 범죄를 저지르는 분위기네.'
굳이 따지면 나도 피해자 쪽에 속하겠지만.
이 상황 그대로 경찰이 들이닥치면 현행범으로 체포되겠지.
왼팔의 무게감이 기분 좋게 자극될수록 더욱 그러한 예감이 든다.
고개를 살짝 돌리니 조그만 머리통이 눈에 띄인다.
내 코끝과 예은의 머리카락이 가까워질수록 체취가 분명하게 맡아진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결승전이 끝나고 돌아와 그대로 누워 잤다고 생각하는데.
갓 샤워를 한 것처럼 향긋한 체취가 풍겨온다.
나도 모르게 들어진 왼손이 예은의 머리칼을 쓰다듬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빗겨주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지금 하고 있는 행위가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걸 암에도 멈추지 않는다.
적어도 머리카락을 한 곳으로 모아 정리할 때까진 일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불행히도 그 작은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속눈썹이 유난히 긴 인형의 눈꺼플이 스르르 감아 올려졌다.
"......."
자고 있는 척이라던지 몰랐다던지 변명이 통할 상황이 아니다.
상정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
죄지은 것은 분명 없을 텐데도 입술이 씰룩거린다.
"좋은, 아침이네..?"
"응."
예은은 부드러워 보이는 입술 사이로 한 마디를 흘리더니 다시 잠에 들었다.
상상 이상으로 신경이 굵다.
아니면 이 상황, 나만 과잉반응하고 있는 걸까.
이 녀석과 지내다 보면 내가 미친 건지, 세상이 미친 건지 고민에 휩싸일 때가 많다.
이 녀석이 채 잠을 깨지 못했을 때 두루뭉실 넘기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렇지만 나는 흔들어서 깨우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죄인도 아니거니와 이 상황을 계속해서 즐길 정도로 얼굴이 두껍지 않다.
나는 예은이 베고 있는 왼쪽 팔을 좌우로 흔들었다.
"5분만 더 잘래.."
"넌 지금 잠이 오냐?"
정말 모르겠다는 느낌이다.
아니면 이 녀석은 이 상황이 어떻게 이루어진 건지 다 알고 있다는 걸까.
나만 바보가 된 기분이다.
"네 방에서 자는 거 하루이틀 일도 아니잖아."
"뭐, 그야 그렇지만은."
내 방 침대를 지 안방마냥 점거했던 나날이 불과 한 달 전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이렇게 된 거 나도 모르겠다.
솔직히 졸리기도 하고 나도 마저 잠이나 자야겠다.
"야, 땀 냄새나."
"싫으면 얼른 네 방으로 돌아가라고."
아직까지 내 왼팔을 벤 채 안기는 듯한 모양새로 자고 있던 예은이 투덜거린다.
어제 입었던 CLC의 유니폼 그대로 잠에 들었으니 어쩔 수 없다.
그리고 남자 방 냄새라는 게 다 그렇지.
왜 내가 내 방에서 이 녀석한테 한 소리 들어야 하는지 나라고 불만이 없는 게 아니다.
"..싫다고는 한 적 없어."
툭 쏘듯 내뱉더니 이불을 당겨 파고든다.
멀리서 본다면 이 녀석을 폭 안은 듯한 모양새.
정말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이다.
'내가 정말 이 녀석만 아니었어도, 후우..'
나만 신경 쓰고 있자니 왠지 분한 마음.
아이러니하게도 행복감 또한 일어난다.
햇볕 때문인지, 아니면 이 녀석의 체온 때문인지는 몰라도 따스함이 촉각을 기분 좋게 덥혀준다.
그렇게 감았던 눈을 다시 뜨자 시간이 10분쯤 지났을까.
어쩌면 1시간 이상 지난 걸지도 모르겠지만 내 방에는 벽걸이 시계가 걸려있지 않아 모르겠다.
창밖의 햇살에 변화가 없는 것 보면 오래 지나진 않았을 거라 유추된다.
손을 뻗어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예은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팔을 흔들며 예은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만 자고 일어나. 해가 중천이다."
"..누워만 있는 거야."
알게 모르게 조금씩 몸을 움직이고 있어 눈치채고 있었지만 역시 깨어있다.
최소한 팔이라도 빼게 해줬으면 좋겠는데.
밤새 예은의 베개가 되어줬을 내 불쌍한 왼팔은 한계를 맞이한지 오래다.
피가 제대로 흐르지 못한 혈관이 고통을 호소해온다.
"야..!"
정말로 5분만 기다려 주자.
마음먹고 마음 속으로 300초를 세었다.
로드 오브 로드로 따지면 점멸의 쿨타임.
그 쿨타임이 채워지기 전에 예은이 나를 향해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책임져 주냐?"
"풋, 네가 나를 책임져 줘야지."
집안 빵빵하고 스펙 좋고 잘 나가시는 분이 부담스럽게 왜 이러실까.
혹시 정말 오해가 있는 건 아닐까도 생각했지만 장난으로 한 말인지 배시시 웃어 넘긴다.
반응을 보니 이 녀석은 사정을 아는 것 같다.
"어제 밴에서 너랑 나 잠드니까 얘들이 일을 꾸몄더라."
역시나 알고 있었다.
팀원 녀석들이 짜고서 나랑 이 녀석을 한 방에 몰아넣었단다.
계획을 주도한 사람은 다름아닌 핫숏이라고.
간만에 돌아온 주제에 장난질부터 치다니 두고 보자.
"그런데 넌 어떻게 아는데?"
"바보, 내가 너냐? 당근 깨어 있었지."
나에게는 한없이 무방비한 것처럼 보이는 예은이지만 하는 짓 보면 여우가 따로 없다.
자는 척 하면서 다 듣고 있었댄다.
과정이야 어찌 됐건 훌륭하다 우리 스파이.
"복수는 같이?"
"당근이지. 다 죽었어 아주~!"
예은이 툴툴 거릴 때마다 조그맣게 뿜어진 입김이 내 가슴팍에 닿아 간지럽힌다.
꼼지락꼼지락 움직이는 작은 후두부 탓에 내 왼팔도 간질거린다.
평소에도 묘하게 스킨십이 잦은 사이지만 이상하게도 오늘은 다르다.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음에도 신경쓰인다.
내가 여태껏 이렇게까지 이 녀석의 행동을 뚜렷하게 관찰한 적이 있었을까.
오늘따라 유난히 작은 새끼 여우마냥 칭얼대는 예은의 모습이 귀엽게도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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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로드 오브 로드 챔피언스 리그 윈터시즌이 끝나고 새해가 오기 전까지 남은 행사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당연하게도 예수님이 탄생하신 메리 크리스마스.
하느님을 믿던 안 믿던 공휴일인만큼 가치가 있는 날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로드 오브 로드 유저들에게만 적용되는 연례 행사.
바로 새로운 시즌의 시작이다.
프리시즌은 어디까지나 프리시즌.
솔로랭크 자체는 마찬가지로 굴러갔다.
하지만 새로운 시즌이 시작되면 모든 이들이 배치고사부터 다시 봐야 한다.
MMR은 기본적으로 유지되지만 그렇다고 의미가 없다는 소리가 아니다.
배치고사라는 건 한 마디로 기회니까.
한 게임을 이기면 평소보다 점수가 몇 배는 오른다.
반대로 지면 평소보다 몇 배는 떨어진다.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이러한 기회는 한 시즌에 단 한 번만 잡을 수 있다.
─최근 로드 오브 로드에 푹 빠져 사는 남자인데 고민입니다.
여자친구가 크리스마스에는 꼭 같이 보내자고 하는데 하필이면 이브 날에 새 시즌이 시작된다는 거 있죠?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번 시즌에는 꼭 골드 티어에 가고 싶어요.
골드만 가면 박제해둔 후 현실에 집중하려 합니다.
여친이 제 사정을 이해해줄까 걱정이에요.
└이 나약한 바보자식. 진정 지켜야 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이냐?
└남자에겐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 있다.
└여친은 다시 사귈 수 있다. 하지만 랭크를 올릴 기회는 다시 잡을 수 없다.
바보들의 헛소리는 뒤로 해두고.
새 시즌이 시작하는 날은 의미가 깊다.
한 마디로 기회가 굴러다닌다.
조금 과한 예를 하나 들어보자.
실제로 이전 시즌에서 실버에 불과했던 사람이 배치고사 운빨이 미친 듯이 터지며 다이아까지 수직 상승했다.
그리고 래딧을 포함한 로드 오브 로드 커뮤니티에 자랑하고 다녔다.
만약 다시 내려갔다면 비웃음을 살 거리겠지만 놀랍게도 현지 적응을 해버렸다.
혼돈의 카오스라 불리우는 다이아 5티어.
패배와 승리를 반복하더니 어느샌가 훌륭한 천상계의 일원이 되었다.
똑같이 실버, 골드에 있었던 이들을 복통에 시달리게 한 사건.
하지만 이번 시즌의 주인공은 나일 수도 있다.
─이제 내일하고 여덟 시간 후면 시즌3 열리는 거냐?
제발 사람같은 팀원 만나게 해주세요.
솔직히 팀운 조금만 받혀주면 다이아 갈 수 있다 나도..
전 시즌은 정말 팀에 사람이 없어서 못 올라갔다..!
└글쓴이 1200판 실버네.
└이 사람, 한 시즌에 1200판을 한 주제에 팀탓을 하고 있어..?
└제발 배치고사에서 글쓴이 같은 사람 안 만나게 해주세요!
그 누구에게나 사정은 있다.
어쩌면 숨겨진 재능이 눈을 뜰지도 모른다.
실버에서 1200판을 썩었을지 언정, 다이아에 가면 1인분 꾸준히 해주는 믿음직한 유저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인생이라는 건 정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고뭉치.
롤챔스가 끝난 이후로도 시계는 째각째각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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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봐주시는 독자님들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