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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는 멈추지 않는다
예은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후.
나는 세안만 대강 마치고 방을 나갈 채비를 했다.
정말로 어디 가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세상엔 혹시라는 게 있으니까.
최대한 빨리 나가 확인해 본다.
똑.
똑.
방에서 나가자마자 코너를 두 번 돌은 후 맞은 편에 있는 문 앞이다.
나를 이곳 미국까지 끌고 온 핫숏이 거주하는 위치.
지금껏 휴가인지 뭔지 때문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던 사람이 어젯밤에 돌연 나타났다.
정말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오랜만의 휴가라는 것 당연 이해해줄 수도 있는 노릇이지만 너무 무책임하다.
주단위도 아니고 한 달이 넘게 자리를 비우면 난 어쩌자는 건가.
일이 잘 풀렸기 망정이지 오늘 침대에서의 사태가 아니더라도 할 말이 차고 넘친다.
'정말로.. 없는 건가?'
문을 두드려 봤지만 사람이 나올 기색이 없다.
혹시 몰라 귀를 기대봤음에도 미음조차 들리지 않는다.
숨어있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설마 그렇게까진 하지 않겠지.
해가 중천에 뜬 시간대인만큼 외출을 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7층 휴게실에서 널널하게 TV라도 즐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을 마친 나는 지체없이 비상계단을 사용해 올라갔다.
.
.
.
* * *
결과적으로 나는 핫숏을 만날 수 있었다.
체력단련실에서 헬스를 하고 있던 헤일커드에게, 그리고 휴게실에서 TV를 보던 라이로에게 물어물어 찾아냈다.
핫숏은 이곳 7층의 한 구석에 있는 출입금지의 방에 떡하니 앉아있었다.
"어째서 여기 있는 거죠?"
나는 핫숏을 대면하자마자 타박했다.
딱히 따지려는 게 아니다.
숨박꼭질, 솔직히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곳은 내가 근 두 달 가까이 CLC 숙소에 거주했음에도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던 방이다.
그도 그럴 게 이 방은.
"구단주가 계신 방이니까?"
핫숏이 다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능글스럽게 이죽댄다.
뭐, 청소하시는 분들도 가끔 드나드는 방이고.
나도 볼 일이 없어서 안 갔을 뿐이지 마음 먹으면 갈 수 있다.
그저 순수하게 바보처럼 숨어있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지금 핫숏이 짓고 있는 표정은 진심이 느껴진다.
"맞아, 내가 이제 CLC의 구단주야."
"핫숏, 혹시 낮술 했나요?"
따지듯 대꾸했지만 사실 짚이는 바가 있다.
내가 알고 있는 미래에서 핫숏은 CLC의 구단주가 된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이다.
이렇게나 시기가 당겨지다니,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지만.
"나도 그렇게 놀고만 있었던 게 아니라고? 하하, 이러면 용서해 주려나?"
"...일단 이야기나 들어보죠.
이야기는 대강 정리가 되었다.
근 두 달에 가까이 휴가를 가졌던 건 사실이지만 비단 놀고만 있었던 게 아니다.
그 사이에 현 CLC의 구단주와 단판을 지었다.
운영을 전적으로 맡겨 달라고.
핫숏이 지금까지 쌓은 신용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잃었던 것도 있다.
구단주, 엄밀히 말하자면 대리의 일은 프로게이머와 겸업할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일이 아니니까.
더욱이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솔직히 나는 이쪽 일이 더 적성에 맞는 것 같아. 봐바, 너도 발굴해냈고."
"부정은 안 하겠지만.. 아직 한창 때인데 아쉽지 않아요?"
공식적으로는 발표도 되지 않은 사건이다.
북미가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로게이머 세 명을 꼽으면 그 중 하나에는 반드시 들어가는 핫숏디디.
그런 핫숏이 뜬금없이 은퇴를 하다니.
분명 커뮤니티 사이트들의 글리젠이 터져버릴 정도로 난리가 날 거다.
"그야, 그렇겠지..?"
"구체적인 계획은 있고요?"
과연 놀라울만한 일이고 뜸금없이 들었다면 나도 까무러쳤을지 모른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조금 빨라질 뿐이다.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현재 CLC은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을 자랑하는 팀이니까.
핫숏 하나가 빠진다 해도 굴러가지 않을 리가 없다.
어쩌면 팀의 운영을 맡음으로서 가능성있는 인재를 발굴하고 기존의 선수들을 더욱 키워낼 수 있을 지도.
"그래서 말인데 재고해줄 수는 없나?"
"뭐, 그 말 할 줄 알았습니다만."
핫숏이 나지막한 어조로 부탁해온다.
CLC와의 계약 조건.
기본적으론 2년의 장기 계약을 가졌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을 만족하는 것으로 네 달로 줄어든다.
바로 롤챔스에 연이어 LCF를 우승하는 것.
지금으로부터 한 달하고 반 정도 후에 롤챔스보다 기대도 높은 대회가 열린다.
1년에 단 한 번만 열린다는 로드 오브 로드 챔피언스 리그 파이널.
북미와 유럽의 최강자를 결정짓는 롤드컵의 축소판이다.
"이제는 아니겠지만 말이야."
핫숏의 말끝이 무겁다.
지난 롤드컵 이후로 북미와 유럽이 세계 최강자라는 사실에 의심이 달렸다.
이로 인해 LCF의 위상도 예전같지가 않다.
이번 NA 윈터시즌의 수준에 대해 걱정하는 팬들이 많았을 정도다.
결과적으로 나마 윈터시즌이 성대하게 흥하긴 했지만 아직이다.
한 번 떨어졌던 체면을 일으켜 세우는 일은 말마따나 쉽지가 않으니까.
그렇기에 핫숏은 부탁하는 거다.
그 윈터시즌의 흥행을 이끈 장본인이나 다름없는 나에게 조금 더 있어주지 않겠냐고.
"제 대답은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 떠나가지 않겠으면 싶어서 짓궂은 장난까지 쳤는데 잘도 해내더군."
짓궂은 장난.
그 말이 의미하는 바 모를 내가 아니다.
CLC 1군이 장기간 휴가를 가졌다.
현 2군 멤버들의 기량이 달린다는 건 아니지만 만약 1군과 함께 했다면 더욱 쉽게 우승했으리라.
결승전에서 TSL을 상대로 경기를 했을 때 드러난 문제.
봇라인의 구멍이라던가 신경쓰지 않고 안정적인 미드 캐리를 일굴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미드에서 파밍만 해도 이기는 게임이 나왔을 수 있다.
그것이 과장이 아닐 정도로 CLC 1군은 막강한 팀이다.
괜히 TSL과 동등하게 다뤄지는 북미의 2대 강호가 아닐 정도로.
물론 여기엔 시험의 의미도 존재했을 터다.
자신들도 어찌저찌 해낼 수 있는 걸 조금 더 편하게 하기 위해서 거액의 돈을 들여 나를 스카웃한 게 아닐 테니까.
CLC멤버들에게 휴식시간이 필요했던 것도 사실이고, 겸사겸사 어쩌다 보니 그러한 결과를 낳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핫숏이 딱히 시꺼먼 마음을 가지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 증명해준다.
전화를 통해 물어보기도 했었거니와 내 편의를 최대한 봐주기도 했다.
예은의 입단 여부.
더불어 내가 CLC내에서 빠르게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도 핫숏의 여파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럼에도다.
"상상 이상이지. 솔직히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어. TSL은 우리와 비견되는, 어떤 면에선 거울이기도 하니까. 한 마디로 우리를 넘어섰다는 거지."
"...과찬입니다."
핫숏과 이렇게 진지한 대화를 하고 있자니 조금 소름이 돋는 일이지만 어떻게 보면 당연한 변화일지도 모른다.
앉은 자리가 바뀐만큼 책임져야 할 무게의 단위가 달라졌다.
프로게이머가 아닌 한 게임단의 구단주로서 조금은 진지해주지 않는다면 오히려 곤란한다.
"아, 구단주임과 동시에 감독이기도 하다고?"
"구단주이면서 감독, 그리고 프로게이머까지 해먹는 건 어때요?"
내가 던진 농담에 핫숏이 질색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흔든다.
확실히 구단주의 일도, 감독의 일도 대강 알고 있지만 그 두 가지만 해도 삭신이 쑤신다.
그나마 이쪽 업계 사정이 밝고 발이 넓은 핫숏이니까 할 수 있는 거지.
본래라면 겸업할 수 있는 부류의 일이 아니다.
"윈터 시즌 우승은 정말 축하하고 고마워. 하지만 LCF는 그렇게 만만치 않을 거야."
이번 윈터시즌의 우승.
운이 좋았다, 라고는 할만한 건 아니지만 조금은 웃어줬던 것도 사실이다.
개최지가 바로 이곳 로스앤젤레스라는 것 부터 상당한 어드밴티지다.
예를 들어 월드컵, 세계적인 스포츠 대회에서 어째서 홈그라운드가 이점이 되느냐.
스포츠 선수들이 낼 수 있는 기량이라는 게 항상 올곧지가 않기 때문이다.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변동폭이 제법 크다.
하루 단위로 바뀌는 게 선수의 컨디션인데 다른 나라에서 시합을 해야 한다면 오죽 할까.
단적인 예를 들자면 우리 한국의 축구 국가대표팀이 2002년에 월드컵 4강까지 진출했다.
아무리 명장 히딩크 감독의 힘을 빌렸다고 해도 믿지 못할 성과다.
솔직히 한국은 단 한 번도 32강조차 뚫지 못한 약팀이었다.
홈그라운드라는 이점이 상당하게 작용했다는 것은 두말해서야 입만 아프다.
육체적인 활동이 요구되는 일반 스포츠에 비해 E-스포츠는 컨디션이라는 요소가 조금은 덜 작용하지만 그렇다고 없는 게 아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이번 롤챔스가 개최되었다는 것은 적지 않은 이점이 맞다.
만약 캐나다에서 대회가 열렸다면 우승을 하지 못했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렇게 말하면 슬프다고? 우리 CLC는 롤드컵에서 아주 죽을 쒔으니까."
"저도 실시간 관람을 했지만 꽤나 안타까웠죠."
올해 치러진 롤드컵에서 본선 무대 칼탈락이라는 고배를 마신 CLC.
그마저도 역사가 변해 이루어진 성과라는 사실을 안다면 충격을 먹으리라.
사실 CLC는 조별 리그조차 뚫지 못하고 탈락할 운명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미래가 바뀌어 조별 리그를 통과할 수 있었다.
큰 틀에서 보자면 변한 게 없긴 하지만.
'아니, 꼭 그렇지만도 않아.'
내가 윈터시즌에서 우승한 것도 그렇고.
한국에서 씨지맥이 프로로 데뷔해 불밤을 꺾어 우승까지 차지한 것도 가볍게 넘길만한 요소가 아니다.
불안했던 요소였지만 역사는 확실히 바뀔 수 있다는 게 증명됐다.
이는 내 눈 앞의 핫숏이 벌써부터 구단주가 되었다는 사실만 봐도 자명하다.
"그런데 그 무~서운 누님은 계속 프로 한대?"
"핫숏도 누님이라 부르기 시작했습니까? 근데 그거 예은 앞에서 하다간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죽빵 맞을지 몰라요?"
보통은 눈 흘기거나 협박하는 선에서 그치는 예은이지만 핫숏을 정말 손이 나갈 수도 있다.
죽빵까지는 아니여도 뒷통수를 겁나 세게 후려 맞을 지도.
그도 그럴 게 오늘 낮의 사태를 주도한 인물이 핫숏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말았다.
"입단속 철저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다 듣고 있었다니.."
"한국 속담 중엔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라는 말이 있죠. 쥐라기 보단 여우같지만."
내 장난스런 농담에 핫숏이 크게 웃으며 맞장구 친다.
나도 일단은 피해자에 속하지만 예은의 뒷담을 까니 의외로 즐겁다.
지난 일로 핫숏을 몰아붙이는 것보다 이 편이 재밌을 지도.
그렇게 한동안 쌓였던 이야기들을 나눴다.
시시콜콜한 잡담부터 시작해서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느니.
앞으로는 어떻게 할 예정이니, 그리고 LCF에 나갈 팀은 어떻게 짜여질 것인지.
특히 이 부분이 중요하다.
"그러면 기본적으로는 CLC 1군과 함께 하게 되겠네요?"
"그러는 편이 더욱 강력할 테니까. 리도 그렇고 프릭도 그렇고 헤일커드고 그렇고 로크도그까지 전부 잘해줬지만 아직은 성장 중인 선수들이야."
그에 비해 CLC 1군의 멤버들은 하나하나가 완성이 된 선수들이다.
어느 쪽이 더 나을지 굳이 생각의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다.
트리플리프트만 해도 두말할 필요 없는 거물 중의 거물이다.
날고 기는 프로게이머들 사이에서도 첫 손가락에 꼽히는 괴물같은 원딜러.
여기에 토를 달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으리라.
"멤버부터가 이미 LCF의 우승을 따 놓은 당상인데요? 그래도 되는 겁니까?"
"하하, 자신감이 넘쳐서 좋아. 그만한 기량도 있고. 하지만 우습게 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이번 LCF는 다들 벼르고 별렀다는 소문이 자자하니까."
TSL만 해도 미역슨, 그가 새로운 주전 미드라이너로 합류하면서 더욱 더 굳건해 졌다고 한다.
미터스 하나만은 인정해 줄만 했던 CLOCK9 또한 새단장을 한다는 소문이 있다.
최근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독나타스도 이번 LCF에서는 다를 거라 으름장을 놨다고.
역시 세계에서 가장 이름값 높은 프로게이머답게 정보통이 예사롭지가 않다.
나도 제법 관심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것도 들어본 적이 없는 부류의 이야기다.
"정확히는 였겠지. 이제는 프로가 아니야. 구단주님이라고?"
"그도 그렇네요. 어찌 됐건 잘 부탁합니다 핫숏. 긴 생활이 될지, 아니면 짧은 생활이 될지 어느 쪽이든 말이에요."
의미심장한 한 마디의 교차와 함께 나와 핫숏은 악수를 나눴다.
이제는 프로게이머가 아니라 구단주.
한 팀의 대빵이 되셔버린 핫숏디디는 평소 내가 알던 그처럼 익살스럽지만은 않다.
이렇게 또 하나 변해버린 미래가 어떠한 변화를 불러 일으킬지.
지금의 나로선 예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곧 다가올 로드 오브 로드 챔피언스 리그 파이널.
만반의 준비를 갖춰 윈터 시즌 이상으로 확실하게 가져올 것이다.
"그런데 핫숏. 이거 위험한데요?"
"응, 뭐가? 자신만만하지 않았어?"
꿈꾸고 있는 이상은 한없이 높다.
하지만 다가오는 현실은 웃어주지 않는다.
나말고 핫숏에게 하는 말이다.
"여기, 들킨 모양입니다."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던 터라 미쳐 체크하지 못했던 까톡.
문밖으로 예은의 것이라 짐작되는 발소리가 그 음율을 천천히 키워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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