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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는 멈추지 않는다
*솔랭 파트는 그렇게 길지 않을 거에요. 동시에 스토리 진행도 될 겁니다.
예은 또한 분명히..
새로운 시즌의 배치고사는 정말 중요하다.
지난 시즌에 나는 한국 서버의 2위를 달성했지만 북미 서버는 그렇지 않았다.
그랜드 마스터만 대강 찍어 놨다.
MMR을 상승시키기 위해서라도 배치고사는 더욱 중요했고 이미 목표는 달성했다.
"자, 뭐 먹으러 갈래?"
의자에서 일어난 나는 밝은 표정을 지으며 예은에게 말했다.
예은의 코칭을 맡게 된 이후로 내 방엔 컴퓨터가 한 대 더 늘었다.
내가 쓰는 용도와 예은이 쓰는 용도.
덕분에 굳이 연습실까지 안 가도 내 방안에서 듀오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다.
배치고사를 깔끔하게 10승을 했으니 밥정도야 기분 좋게 사줄 예정이다.
그런데 예은의 상태가 영 안 좋아 보인다.
"왜 그래, 맛있는 거 사준다니까?"
자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린 애처럼 볼을 부풀리고 있다.
재밌는 게임해 놓고, 잘만 이겨 놓고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내가 먹을 킬을 점멸까지 써서 신나게 스틸하신 양반이 왜 이렇게 삐지셨을까.
"몰라, 먹던가 말던가."
"야, 입은 넣고 말해라 입은."
입술까지 뾰루퉁 튀어 나왔다.
무엇이 불만인지 명확하게 이야기해주면 오죽 좋으련만.
속마음의 표현이 익숙지 않은 녀석이다.
'사실 내심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오늘은 12월의 24일, 크리스마스 이브다.
공교롭게도 새로운 시즌의 오픈 날짜와 겹쳐버렸다.
그것을 아니까 어제 내가 잘 대해준 거기도 하다.
"사람 기대하게 만들어 놓고…."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들리지 않았을 정도로 예은이 아주 조그많게 속삭였다.
중간중간 들리지 않는 단어가 있었지만 입술의 모양으로 추측했고 얼추 맞을 듯하다.
생각 이상으로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의 약속에 의미부여를 해버린 모양이다.
"적어도 며칠은 빠듯하게 돌려야 첫 그랜드 마스터를 찍을 수 있다고?"
"크리스마스 내내 게임만 하게? 이 바보 멍충이가.."
화가 잔뜩 난 듯 쏘아붙이더니 고개를 휙 돌린다.
확실히 예은의 말마따나 시기가 시기다.
게다가 휴가인 와중에 일이나 다름없는 게임을 하고 있으니 화가 날 만도 하다.
그러한 면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놓치기가 아까운 시기인 것도 사실이다.
길게 잡아도 나흘 내에는 분명 첫 번째 그랜드 마스터가 결정될 터다.
아무래도 나와 예은 사이에 타협점이 필요하다.
담판을 지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럼 밤에 노는 건 어때?"
"바, 밤? 그건 조금…. 생각지도 못했는데.."
어울리지 않게 말을 흐린 예은이 검지 손가락으로 머리 끝자락을 빙빙 돌린다.
조금 당황한 듯한 모양새다.
난색을 표할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기왕이면 부디 받아들여 줬으면 좋겠다.
"이곳 주위의 치안이 아주 안전하지는 못하니까 밖에 나가 놀기는 뭣하고 아마 방에서만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네.. 방에서?"
평소에는 니라고 편하게 터놓는 예은의 말끝이 답지 않게 조심스럽다.
그러고 보면 나는 얘 방에 들어간 적이 없다.
문 안 쪽으로 들어오는 건 허락해 주지를 않더라.
성큼 발을 내딛은 적이 있었는데 그 순간 뒤꿈치로 찍혀버렸다.
트라우마가 되어 이 녀석 방에 들어가는 건 시도도 안 하게 됐다.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조금만.. 생각해 보고."
어차피 놀 준비는 네가 아니라 내가 하게 될 텐데.
결정을 내릴 거면 빠르게 해줬으면 한다.
내 수고가 조금이라도 덜어지려면 말이다.
정 싫으면 말던가.
"안 한다곤 안 했어. 그냥.. 아! 몰라. 가면 될 거 아니야 가면."
괜시리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낸다.
솔직하지 못한 녀석.
그래도 결정이 빠른 건 마음에 든다.
대답 안 하고 질질 끄는 것보단 몇 배는 낫다.
"화 풀렸으면 갈까?"
"..어딜 가는데?"
아무리 늦은 아침을 먹고 모였다고는 해도 점심이 지나 저녁이 가까워지는 시간대다.
이 녀석이 배고프지 않아도 내가 배고프다.
안 간다고 생떼를 부리면 손목을 끌고서라도 강제로 데려갈 거다.
"딱히 배고픈 건 아니지만 어울려는 줄게."
"너 오늘따라 왠지 모르게 유난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따라 예은의 표정 변화가 변덕스럽다.
얼굴이 화가 나 있는 건지 기뻐하고 있는 건지 이 녀석과 지내온 나조차도 모르겠다.
어쨌든 간다고 했으니 말을 바꾸진 않겠지.
나는 예은과 함께 빌딩을 나가 식당으로 향했다.
크리스마스 기념이라는 건 아니지만 두툼한 고기를 썰러 갔다.
가끔은 고오급 레스토랑 분위기 나는 곳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게다가 배가 안 고프다고 했으니 식비도 많이 나가지 않을 때 선심쓰자.
그런 꿍꿍이를 가지고 비싼 음식점에 데려갔지만 내 착각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꿀떡꿀떡 잘만 삼키더라.
오히려 식욕이 도는지 평소 이상으로 먹어댔다.
한국이었다면 정말로 고기 썰은 철판에 밥을 볶아 달라 할 기세였다.
.
.
.
* * *
식사 후에는 당연 솔로랭크 삼매경을 보냈다.
이번 시즌 초에 첫 번째 그랜드 마스터를 달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에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많지 않다.
순수하게 실력을 통해 증명하는 것도 물론 좋겠지만 프로게이머란 직업은 그렇게 한가하지 않으니까.
특히 나와 예은의 경우 곧 LCF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더더욱이다.
시간이 있을 때 또 하나의 전설을 세워둘 속셈이다.
─트리플 킬!
Unknown Error님을 도저히 막을 수 없습니다!
예은은 내 옆에서 묵묵히 듀오게임을 진행하고 있다.
어째서인지 밥을 먹고 온 이후로는 딱히 신경질을 부릴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아까는 점멸까지 써서 킬을 뺏어 먹는다던지 온갖 심술을 다 부렸는데 놀라울 정도로 고분고분해졌다.
원래 사람이 배가 고프면 짜증이 나는 법이지.
아까 괜스레 짜증을 부린 것도 배고파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적팀이 찬성 5표 반대 0표로 항복하였습니다!
깔끔하고 화끈한 양학.
판수를 거듭할수록 게임의 수준이 조금씩 높아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나와 예은의 듀오를 막기엔 한참은 부족하다.
방금도 한타에서 예은이 이니시를 칼같이 열어줬고 내가 킬을 쓸어담아 게임을 마무리 했다.
짜악!
한 판을 따낼 때마다 하이파이브를 주고 받는다.
나와 예은은 현재 배치고사를 포함해 15연승째.
서버가 열리자마자 부단히 달려온 결과물이다.
게임을 상당히 오래 한 것 같지만 대부분이 오픈판이다.
프로게이머 둘이 작정하고 양학을 하고 있는데 이를 버틸 수 있는 상대는 거의 없다.
심지어 다른 라인도 아니고 미드와 정글.
이래 봬도 나는 양학에 일가견이 있다.
나 뿐만 아니라 예은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너 게임할 때 표정 무서운 거 알고 있냐?"
"뭐가?"
예은이 감자칩을 바삭 씹으며 대답한다.
당연하게도 내 감자칩이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내가 걸고 넘어지려는 부분은 이 녀석의 표정이다.
그 가학적인 미소 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다.
킬을 따낼 때마다 조그맣게 히죽거린다.
상대가 어쩔 줄을 몰라하며 우왕좌왕하는 태도를 즐기고 있다.
궁지에 몰아넣고 일부러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렸다가 상대에게 희망을 주고 난 후에야 막타를 친다.
그러고선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짓는데 옆에서 보고 있으면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그야 재밌잖아 그런 거."
"알고 있긴 하지만 너 성격 무지 나쁘다…."
위화감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예은의 성격이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참 못됐다 못됐어.
그래도 이전처럼 욕설과 트롤을 하지 않으니 다행이긴 하다.
어쩌면 정신적으로 아주 조금은 성숙해진 걸지도 모른다.
"혹시나 해서 말해두지만 스크림이나 대회에서는 그러면 안되니까."
"바보, 공사 구분도 못할 줄 아냐?"
이 녀석 말이 가끔은 옳다.
윈터 시즌만 해도 충분히 제 역할을 해줬다.
딱히 모나는 부분없이 욕심을 부리지 않으며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정말 기특하게도 말이다.
"가끔은 이쁜 짓도 한단 말이야?"
"하, 나 원래 이쁘거든?"
그 예쁜 얼굴로 감자칩을 한 움큼씩 집어 우적우적 씹어대는 건 둘째 치고.
확실히 외모만큼은 이견의 여지가 없는 녀석이다.
저렇게 자뻑을 해도 어떻게 반박을 할 구석이 없다.
그런 부분이 조금 재수가 터지긴 하지만.
"키킥, 그럼 너도 다음 생엔 잘 생기게 태어나던지?"
우쭐대는 모습을 보면 한 대 확 쥐어 박고 싶지만 생각보다 그렇게 미운 감정은 쌓이지 않는다.
이유를 설명하라고 한다면 못하겠지만 이런 걸 보고 성격이 잘 맞는다고 하는 걸까.
예전처럼 극성이지 않기 때문도 있다.
오히려 요즘은 종종 귀엽게도 느껴질 정도다.
말본새는 변하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둥그스름해진 듯한 분위기가 묻어난다.
쿠웅!
다음 큐가 잡히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이야기의 흐름이 끊겼다.
뭔가 더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녀석도 가끔 넋놓고 보면 매력적이다, 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애인으로 삼기엔 여러가지 문제점이 많긴 해도 말이다.
─Welcome to Summoner's field.
빠르게 밴픽을 마치고 게임으로 넘어갔다.
어차피 뭘 어떻게 해도 결과적으로 우리가 이긴다.
슬슬 상대팀도 잘하는 애들을 붙여주긴 하지만 역부족이다.
나와 예은을 상대하기엔 백만년은 이르다.
[전체]-아니, 여기 롤챔스 아닌데 왜 에러갓이 상대에 있냐..
[전체]-프로게이머 듀오 반칙 아닙니까?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상대팀의 투정이 들려온다.
대부분의 게임에서 저런 전체 채팅이 깔리곤 한다.
하지만 저렇게 징징대는 상대도 프로게이머, 아니면 그랜드 마스터라는 게 이 구간의 재미요소.
말로만 저러는 거지 무난히 져줄 생각은 추호도 없을 터다.
"쟤네 옛날에 스크림에서 우쭐댔던 애들이잖아?"
"그랬나? 너 그런 거 잘도 기억한다."
우리가 듀오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상대팀에도 듀오가 있다.
딱히 이름값이 크지 않은 프로게임단의 1군.
CLC 2군이 스크림 상대를 구할 때 어지간히 팅겨댔던 기억이 아주 미세하게 남아있다.
'쟤들 정도면 딱히 문제가 있는 수준도 아닌데 말이지.'
1군이랍시고 거들먹거리며 스크림을 거부하던, 혹은 갑의 입장에 서려던 팀들도 꽤나 있었다.
이름있는 게임단에서는 오히려 호쾌하게 받아주거나 정중하게 거절하거나 둘 중 하나인데 어딜가나 애매한 애들이 더하더라.
상대 듀오는 그래도 그렇게까지 기분 상할 짓은 안 했던 것 같은데.
우리 예은 누님의 심기를 적당히 거스르신 듯하다.
"박살을 내주자!"
예은이 하얀 이를 씩 드러내며 가학적인 미소를 지어온다.
이번 경우야 반쯤 장난이긴 해도 이 녀석 은근히 쟁여 놓는 스타일이다.
겉으로는 내색 안 하지만 나중에 꼬치꼬치 따져오는 게 여간 귀찮지 않다.
그런 무서운 누님이 내게 명령을 내리셨는데 따르는 수밖에 없겠다.
'그런데.. 익숙한 챔피언들이 자주 보이네.'
결승전의 여파, 당연히 상정하고 있었지만 생각 이상으로 성화인 모양이다.
적팀의 미드라이너가 무려 자드다.
심지어 그 자드는 예은이 언급했던 프로게이머 듀오 중 하나.
시즌 초의 랭크를 올리며 자드의 연습을 겸하는 모양이다.
'턱도 없이 어설프지만 말이야.'
너무나도 굼떠서 표창을 날리는 동작 하나하나가 사전에 잡힌다.
저렇게 던지면 어떤 바보가 맞아주겠는가.
자드라는 챔피언의 강점을 하나도 살리지 못하고 있다.
물론 안 맞는다 해도 견제만 당하고 있기엔 섭한 노릇.
나는 칼날 질주를 사용해 미니언을 타고 자드의 코앞까지 돌진했다.
철컹!
평형의 판결이 나와 동등한 체력을 가진 자드에게 틀어박힌다.
내가 플레이하고 있는 발렐리아의 E스킬, 평형의 판결은 나보다 체력이 높은 적에게 스턴, 낮은 적에게는 둔화를 건다.
나에게는 사정 좋게도 서로의 체력이 같을 때조차 마찬가지로 스턴.
기절한 자드의 살점을 두 움큼 뜯어냈다.
화락!
챠라락!
자드는 스턴이 풀리자마자 그림자 분신을 사용해 도망가면서 스킬쿨을 돌리지만 이를 피하는 건 간단한 일이다.
칼날 질주를 미니언에게 사용해 뒤로 내빼면 그만.
W스킬 파천살검류를 발동해서 자드를 패재꼈기에 체력교환의 결과는 일방적이다.
내 체력이 많아지면 다음 딜교환에서 스턴을 넣지 못한다는 점은 있지만 그게 꼭 단점으로만 작용하는 건 아니다.
'호오, 포션을 빨지 않고 있는데..'
아무래도 체력을 회복했다간 또다시 스턴에 걸릴까봐 나름대로 생각을 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건 외통수다.
자드를 다뤄내기엔 한참은 모자른 실력.
그런 실력으로 어설프게 머리를 굴려봤자 역이용 당할 뿐이다.
나는 다시 한 번 미니언을 타고 자드를 향해 돌격했다.
철컹!
스턴이 아니라 60%의 둔화.
하지만 지속시간이 자드가 생각했던 이상으로 길다.
E스킬인 평형의 판결부터 선마스터한 결과다.
물몸 챔피언을 상대할 땐, 특히 암살자 챔피언을 상대로는 평형의 판결부터 스킬을 찍는 게 바람직하다.
그렇게 되면 CC기의 지속 시간도 길 뿐더러 깡뎀 또한 상당하다.
지속딜러라 평받는 발렐리아가 누킹을 쑤셔 박는 게 가능하다.
그림자 분신으로 도망가는 자드를 나는 칼날 질주를 재사용해 따라갔다.
치지직..!
점멸로 도망가는 자드를 맞점멸로 따라가 평타 한 방.
한 대 더 때릴 수 있었음에도 굳이 수고를 하진 않는다.
남겨둔 발화가 상대의 목숨줄을 정확하게 끊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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